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희생의 미덕이 어쩌고 하는 감상에 빠졌다기보다는
그 어린 사람 그늘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 태양의 후광을 받고 서
있는 아이들의 실루엣에서 문득 보살의 환영을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318-319쪽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방랑>리뷰를 시작하기 앞서 영화<카모메 식당>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로 이주 한 한 일본여성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연으로 식당을 차리고,
또 그 식당의 종업원이 되고 손님이 되었는지 영화에서는 똑부러지게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뿐 이다. 그저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또 그
보다 더 큰 상대를 위한 친절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보여준다. 물론 무레 요코가 쓴 원작소설 에서는 친절하게 가게 주인의
이야기부터 들려주니 영화를 보기전에 소설을 먼저 읽는것도 나쁘지 않다. 이 이야기를 책 <동양방랑>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서두에 적은 발췌문 때문이다. 위의 내용은 후지와라 신야가 버마(미얀마)의 한 노점에서 밥을 먹을 때의 일을 적은 것이다. 여행지에는 특히
대도시가 아닌 곳은 어린아이들이 곁에 다가오는 것이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여행객의 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저자도
식사중인 제 곁에 아이들이 점점 더 다가오는 것이 신경쓰이고 급기야 안그런척 여주인에게 아이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다.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애들은
'응달'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라고. 의아하게 생각한 저자가 재차 그 응달의 의미를 묻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일본인들이 응달의 의미를
모르는거냐고 되물을 뿐이다. 아이들이 곁으로 다가온 것은 식사중인 여행객인 저자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일말의 두려움을
느낀것이다. 다시 <카모메 식당>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영화를 보았을 때의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일본은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속내는 알 수 없고 때로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내게는 그정도의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의 감상을 주었고 그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화려하고 낭만적인 여행뿐 아니라 그다지 따라하고 싶지 않은 저자의 방랑이 어느덧 청춘을
넘어버린 내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여행이 삶을 축소해놓은 것이라고 할 때 여행 혹은 방랑중에는 이렇듯
뻔한 상황과 전혀 의외의 상황이 교차되어 등장한다. 가령 우리가 여행기에서 흔하게 접하는 문장인 다음의 경우가 그렇다.
+ 나는 지금 이 글을 터키 중앙부에 위치한 앙카라의 M이라는 변두리 호텔에서 쓰고 있다.
55쪽
+ 지금 나는 안탈리아의 해안 절벽에서
검은 나비를 손에 들고, 지중해의 부드러운 리듬 속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던 그 늙은 칸초네 가수를 떠올리고 있다.
104쪽
+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있다. 흑해를 보고 싶은 절박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여행이라는 것은 때떄로 의지를 거스르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여행의 습성이라고나 할까? 143쪽
그
당시 내가 어디에 머물렀는지, 지금은 과거가 된 과거의 '지금'은 어땠는지를 우리는 여행기를 통해 접한다. 그리고 그 여행기가 맘에 든다면 훗날
바로 그 장소로 날아가 부러워하고 소망하던 그 여행자의 흉내를 낸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그와 같이 글을 쓸 줄이야. 라면서.
그런가하면 이미 떠나온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새로운 장소에서 떠올리며 곱씹기도 한다. 그때의 감정과 상황이 반드시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상황에서의 감정과 태도가 옳은 것만이 아니었음도 알게 깨닫게 된다. 그런가하면 저자의 말처럼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반응에 따라
쉽게 체념하고나 납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동양방량>을 통해 내가 찾은 답은 사람,
좀 더 확대시키자면 인연이라는 것에 있다고 본다.
때리겠다고
덤벼도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은 거지가 있는가 하면, 쫓아가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은 거지도 있다. 거지도 다양하다. 가령 만 명의 거지에게
똑같이 연필 한자루씩 나눠주는 방식만큼 거지를 무시하는 처사도 없다. 인격과 인격이 만났을 때 비로소 감정이 생기고 행위가 일어나는
법이다.216쪽
위의
내용은 콜카타에서 만난 거지, 거지왕편에 등장한다. ?비단 거지뿐이겠는가. 인격을 대하는 데 있어서 '평등'과 '공평'은 어찌보면 위선이지
싶다. 물론 반드시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저자의 말처럼 수 만명의 거지에게도 공평하게 라는
수식어를 달고 연필 한자루씩 나눠주는 것은 옳지 않다. 거지 저마다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물론 공통적으로 원하는 돈을 줄 수야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자면 그 또한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재미난 사실은 저자가 거지에 대해, 인격과 인격에 관해
풀어놓은 이 에피소드의 주된 내용은 수입이 좋았던 거지왕에게서 느낀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무언가 똑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만 이 엄청난
방랑을 하는 그도 역시나 나와 같은 보통의 여행자구나 라고 느껴지던 부분이기도 하다.
여행과
방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학사전에
등록된 바로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은 여행이고,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은 방랑이다. 결국 목적이
있느냐의 여부로 나누자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동양방랑>, 즉 정한 곳 없이 떠돌아다닌 이야기다. 덕분에 여행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명목'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독자인 내게도 훨씬 자유롭게 그의 방향과 방랑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굳이 왜 그런 모험을 한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더불어 왜 굳이 이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 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니
가급적 많은 사람들의 삶을 봐두는 것이 좋다고 결론지을 뿐이다. 마치 하단에 발췌한 터키 트로트의 마지막 대목처럼, 그 거리 뿐 아니라 이 삶을
두 번 다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거리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
거리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
거리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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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쪽, 터키 트로트의 마지막 대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