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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나의 딸 그리고 나
로릴리 크레이커, 강영선 / 경원북스 / 2018년 3월
평점 :
빨강머리 앤은 세상의 모든 "고아들"에게 생물학적인 혈연관계가 있든 아니든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다고 느껴지는 "집"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15쪽
책 <빨강머리 앤 나의 딸 그리고 나>의 출발점은 우리 모두가 한 때, 혹은 진행형 '고아'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저자 로릴리도 그랬고, 그녀의 딸 피비도 입양아다. 빨강머리 앤을 보면서 피비가 엄마인 로릴리에게'고아'의 의미를 물어본 것이 시작이 된다. 자신도 입양아였기 때문에 고아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고 했다. 피비에게 고아를 제대로 설명해주기 위해 찾아보게 된 사전적 의미를 통해서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강제적으로 버림받거나, 어느 형태로든 '남겨진'존재가 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우리 모두를 '고아'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하긴, 성경속에 예수님마저 새집과 여우굴을 언급하시면서 사람이 당신도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셨으니 저자의 비유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로릴리가 빨강머리 앤을 통해 힘을 얻었던 때는 중학교 2학년때 동급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였다. 어떤 고난속에서도 꿋꿋하게, 아니 놀라울 만큼 밝았던 앤도 사실 제대로 다시 원작을 읽다보면 엄청 많이 상처받고 울면서 시간을 보낸 때가 있었다. 앤이 마냥 성격이 좋아 활발하기만 했던 소녀라면 그렇게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저자말처럼 앤도 부족한 것이 참 많은 아이었다. 원작과 살짝 차이가 있긴 해도 애니메이션만 보더라도 앤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어른이 된 내가 봤을 때 정말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소녀라고 느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부족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끊임없이 상상하기를 즐겼던 앤은 그렇게 로릴리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로릴리가 어른이되어 입양한 피비에게도 친절한 손길을 내민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빨강머리 앤 3권에서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계시의 책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쓰라린 바에 그런 책을 읽었다. 111쪽
책을 읽다보면 세 명의 앤을 만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닌 빨강머리 앤, 그리고 저자 로릴리, 그리고 그녀의 딸 피비.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과 비교하자면 우선 로릴리는 루시 모드 몽고매리 원작을 복습함과 동시에 로릴리의 삶에서, 세상의 고아들에게 어떻게 앤의 상황들이 적용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고, 백작가의 책은 원작보다는 우리가 어릴 때 만났던 TV시리즈 빨강머리 앤을 토대로 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우리가 '앤'이었던 상황도 있지만 때로는 매튜의 입장, 마릴라의 입장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 것이다. 사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곧 마흔을 앞둔 내게 어린시절 수다스럽고, 이따금 거짓말도 하는데다가 끊임없이 공상에 빠지는 철없는 앤은 피곤한 존재다.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느꼈던 마릴라의 심정이 지금의 나는 오히려 더 납득이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튜는 앤에게 있어서는 다정다감한 지킴이었을테지만 여동생인 마릴라에게는 그저 우유부단한 오라버니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매튜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 센 마릴라와 마찬가지로 엉뚱한 앤 사이에서 오죽 불편했을까 싶은 마음도 이해가 된다. 여기에 저자가 살아온 이야기들이 더해져 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입양'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앤이 위기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현실보다 더 가혹한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의 삶도 결코 평안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원작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도 마찬가지다. 앤처럼 고아원에 버려진 적도, 로릴리나 피비처럼 입양된 것도 아니었지만 작가역시 마찬가지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고아였고, 특히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로 했던 아버지로 부터 외면당했다. 우유부단했을지언정 늘 앤에게 관심을 두고 지지해준 매튜의 모습은 작가의 이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루시 모두 몽고메리가 7살이 되었을 때, 그녀가 사랑하던 아버지는 성공과 돈을 좇아 서스캐처원의 황량한 서부였던 활기찬 도시 프린스 알버트로 이사를 가면서 그녀를 완전히 내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로웠던 어린 소녀를 홀로 남겨두었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책장의 타원형 유리 문 안쪽에 살고 있는 상상 속의 친구 둘을 만들어냈다. 루시 그레이와 케이티 모르스였다. 264쪽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집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한때는 집이 었다가 어느정도 세월이 흐른뒤에 돌아보니 그저 잠시 거쳐가는 정류장이었을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집은 무엇인가, 찾았다면 제대로 찾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또 꼬리를 물었다. 원하는 답을 찾을 순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로 다른 언어로, 문화에 살면서도 '빨강머리 앤'을 통해 위로를 얻고, 대를 지나오면서까지 위안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루시 모드 몽고메리. 그녀의 유년도,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녹록치 않았음에 어쩌면 더더욱 우리는 앤에게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고 위로를 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의 크기는 저마다 다 다르게 다가올테지만 지독한 그 외로움마저 잘 견뎌내고 이야기로 완설될 때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그 희망, 그 희망을 꿈꾸게 해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