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인간이 '불사'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타인과의 '비교'가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부와 높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한들 결국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억울한 사람도 있을테고 또 반대로 그런 이유로 그나마 힘든 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나이를 들면 들수록 신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면 아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소설 <헌등사>는 그것이 정말 괜찮은지 진지하게 묻고 있다.



증조할아버지들의 몸은 우리들의 몸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증조할아버지들은 딱딱한 것을 먹을 뿐 만아니라, 먹는 양이 그야말로 많다. 너무 많이 먹어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한다. 우리들에게는 여분의 힘 따위는 한 방울도 없다. 136쪽



일본에 대지진이 있은 후에도 그들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노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해지고, 새로 태어난 후대들은 뼈가 녹고 음식물조차 제대로 소화시킬 수 없을만큼 연약한 장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시아 여러나라 중 가장 두드러지게 무역활동을 하고, 가장 빨리 고령화가 되어 노인부양을 걱정했던 때는 오히려 추억이다. 다와 요코가 그린 <헌등사> 시대에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은 자국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모토아래 다시금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을 펼치고 외래어까지 금지한다. 도쿄에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은 맞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노인들은 약해진 손주들을 부양해야 하고, 60~70세는 젊은 노인으로 경제활동의 중심을 맡고 있다. 70세도 안되어 정년퇴임을 맞이했던 지금의 일을 아주 오래된, 허구속의 일들로 치부해버릴 만큼 소설 속 세상은 희극과비극이 그대로 공존해버린다. 일본어와 독일어, 이중언어로 작품을 쓰는 다와다 요코는 일본에 대한, 고국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각성하지 않은 일본인들을 비판하며 <헌등사>를 쓰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미움도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소설 곳곳에서 묻어난다. 일본의 구전동화, 관습, 축제등을 차용한 표현이 많아 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도 있고, 소설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도 많이 생겨났다. <헌등사>를 읽다보면 자연앞에 교만스러운 일본인을 보는 동시에 그들이 축적해온 문화에 대한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 것이다. 독일어와 일본어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다와다 요코가 독일어로 쓴 작품이 궁금해진 까닭도 이때문이다.


"증조할아버지, 괜찮아요?"

라고 묻는다. 무메이는 '괴롭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기침이 나오면 기침을 하고 먹을 것이 식도를 역류하면 토할 뿐이었다. 물론 아픔은 있지만 그것은 요시로가 알고 있는 '어째서 나만이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가'라는 억울함을 동반하지 않는 순수한 아픔이었다. 그것이 무메이 세대가 전수받은 보물인지도 모른다. 49쪽



몸이 약해진 반면 사고는 유연해진 아이들은 음식에 연연해하는 지금의 우리를 자조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존의 SF영화속에 등장하는 음식은 에너지를 위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거나 조리과정 자체를 생략한 형태였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먹는 그들이 어떤면에서는 행복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맛을 없는 음식을 맛없게 먹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음식의 맛 자체를 고려하기 전에 내 몸이 거부하는지부터 신경써야 하는 무메이와 같은 아이들은 삶 자체가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맛을 느낄 여유가 없듯 행복이란 것도 하나의 사치처럼 여겨지는 듯 했다. 음식이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자체를 버리듯 삶 자체가 행복해야된다는 사고를 버린 무메이에게는 미움도 악도 없다.

무메이는 '증조'를 '할아버지'로부터 떼어놓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옛날 아이들의 '엄마'가 무메이에게는 '증조할아버지'이며, 그 이외의 가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증조할아버지'가 가져다준다. 85쪽

저자는 인간의 오만이 빚어낸 미래를 비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헌등사>속의 미래가 전부 다 나쁘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 약해진 몸으로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안타깝고 괴로운 것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서 행복이란 감정에, 맛이라는 찰나의 감각의 의연해질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나는 과연 애초에 '제대로'번역하기 어려운 이 작품을 '제대로'이해는 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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