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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그렇다. 설마 했던 바로 그 패닉의 이적이 쓴 책이다. 잘난놈은 뭘 해도 잘났다는 식의 이론이 성립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막 출간되었을 무렵에는 가수 이적이 썼다는 소설이라 제법 센세이션 했고, 그 덕인지 책 자체가 좋았기 때문인지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많이 팔렸다.
책은 서너개의 단편과 일고여덟개의 꽁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긴 지문사냥꾼과 두번째로 긴 제불찰씨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굳이 긴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던 이유를 찾자면, 긴 이야기를 쓰려면 앞뒤의 줄거리의 타당성을 맞춰야하는 것은 물론, 처음의 느낌과 끝의 느낌이 같아야한다. 문체도 같아야 하고, 분위기도 같아야한다. 결국 장편은 많은 고민과 쓰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드는 만큼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적의 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의 장난식으로 써 내려간(것으로 보이는) 꽁트들에서는 재기발랄함이나 신선함을 느낄 수 있긴 했으나 감동이나 여운을 느끼진 못했다. 반대로 지문사냥꾼과 제불찰씨 이야기의 경우에는 긴 호흡으로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몰입은 곧 작품의 주제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증폭시켜주고, 주제에 가까이 간 독자는 여운과 감동을 얻는다.(하지만 이 전제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아래쪽에 설명하기로 한다.)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곳에 있지 않나 싶다.
역시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재이다. 알 듯 말 듯한 문장으로 가득 차 있는 소설에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지루함이 크다. 반면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는 문장으로 구성된 글은 주인공에 쉽게 몰입할 수 있어, 소설이라는 매체가 주는 가장 큰 매력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이야기가 탄탄한 팬터지에 많은 독자가 몰리는 것과 같은 것이 이적의 책에는 있다. 지문을 사냥하는 사람이나(지문사냥꾼) 몸이 점점 줄어들어서 그 작은 몸으로 귀에 직접 들어가 귀를 청소해주는 사람(제불찰씨 이야기)같은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실제로 흡혈귀(작품 내에서는 음혈인간)에게 메일을 받은 듯한 진짜같은 공갈을 친다거나음혈인간으로부터의 이메일), 특정 상황을 정밀묘사하듯 써낸 글(sos, 독서삼매, 모퉁이를 돌다) 따위는 문단의 기성 작가들이 생각해내기 힘든 기발함들이 가득하다.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의 미덕은 그정도다.
역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는 뻔하다. 아니, 바꿔 말하면 작품의 주제는 분실됐다.(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치명적 단점이다. 주제에 가깝게 접근할 수는 있으나 주제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은 그 소설가의 삶이라고 말할 정도로 소설과 소설가는 동일시된다. 하지만 순전히 상상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리얼리즘은 분실되었다. 정말로 있는 일 같은 기분이 들 때 독자는 자신과 소설의 인물을 일치시킨다. 그리고 인물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이 겪은 일을 독자도 겪으며 무언가를(주제를) 얻는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글은 애초에 독자와 인물 사이에 하나의 막이 형성되어 있다. 독자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어 주인공의 행보를 지켜 본다. 흥미롭고 재밌긴 하겠지만 어차피 남의 이야기다. 사람은 남의 이야기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특이하고도 재미있는 소재로 필자는 독자를 책에 흥미를 느끼게 해 주지만, 그것은 양날의 검이 되어 정도 이상의 접근을 막는다. 또 하나의 단점은 역시 작가가 아니라는 같은 이유에서 온다. 프로 소설가가 아닌 필자는 상대적으로 소설가들보다는 적게 글을 쓰는 것은 필연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장이 어색하다. 좋은 소설가가 쓴 소설은 문장 하나하나가 아무리 쓸데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더라도 문장 자체의 무의미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에 무의미한 문장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문장에서 의미를 찾게 되기 때문에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은 치밀하다. 소설들 자체가 워낙 느낌이나 감성에 무게를 두기 보다, 이야기 자체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문장의 치밀성 때문에 이야기 중심으로 보이게 된다. 이야기가 입체성을 띄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볼 게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보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쓰다보니 단점을 더욱 많이 언급한듯 하지만 역시 단순한 감상을 말하자면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가장 원초적인 재미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홈페이지에서도 본 글들이긴 하지만 일부러 책이 나오길 기다리며 보지 않았다. 이적도 언급했듯 모니터로 보는 글과 인쇄물로 보는 글에는 그저 편의성이나 느낌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읽는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만한 재미있는 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