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잠에서 깨어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까 하며 폰을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갑자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나 듣던 소리다. 이게 뭐더라. 잠시 혼란한 사이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실제 상황입니다. 화재 경보입니다. 모든 투숙객은 지금 즉시 대피하십시오. 실제 상황입니다."

맙소사. 내 생에 이런 일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와 나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사이를 기타등등의 생각과 함께 두서없이 오갔다. 진짜 불이 난 건지, 경보가 실수로 울리는 건지, 전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컸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것은 실재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실재적이게 되어 있을 것이다. 위험이 존재했든 하지 않았든, 그 위협은 두려움의 형태로 느껴졌다. 실제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위협은 현재에 임박한 현실성을 가진다. 이러한 실제적 현실성은 정동적이다.

두려움은 어떤 위협적인 미래의 현재에 속하는 예상적 현실이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느껴진 현실이며, 그 문제의 정동적 사실affective fact로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99)




급히 잠옷을 벗어던지고 바지를 꿰입고 배낭에 눈에 보이는 소중한(!) 것들을 쓸어담고 운동화를 끌고 복도로 난 문을 (열어도 되는지 겁이 났으나 일단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으므로) 열었다. 옆에서도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직원이 화재 경보 아니라고, 들어가라고 한다. 어휴. 


「위협이 물질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은 아니다. 그것은 진짜로 느껴진, 어느 과거-미래의 모든 정동적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미래의 위협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연기된 것이다. 그 상황은 영원히 열려 있다[끝을 알 수 없다].」 (99)

「수행적 행위나 말a performative은 항상 자동-발효되는self-executing 명령으로 닥쳐온다. ...... 경보라는 기호는 아무것도 없음 이상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명령법에 불과하고, 여전히 자율적으로 하나의 명령을 발효시킬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해서, 우리가 외부를 향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해 하나의 사태 현실에 깨어 있게 한다. 그것은 계속 주의를 강제로 집중시키며, 다음 느낌으로 변이되면서 이전의 느낌을 깨뜨린다. 여전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기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 경험이며, '지각이 드러내는 것 이상'보다 더욱 많은 것을 포함한다.」 (121~122)




글로는 짧게 썼지만 방에서 허우적거린 시간이... 음. 실제 상황이었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렸다. 경보가 울리고 방송이 나올 때부터 그랬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해야 했다. 위기대처능력 꽝인 나. 어렵거나 곤란하거나 난처하거나 힘들거나 위험하거나 한 상황에 놓이면 어쨌거나 나는 줄곧 이런 신체 반응을 보일 텐데 하는 생각에 소심해졌다. 이걸 뒤집으면 그동안 나는 꽤 안전(?)한 생활을 했다는 말일 테다. 아니 딱히 그렇지도 않... 흠 헷갈린다. 심장 두근거리는 것부터 어떻게 좀 하고 싶다. 쉽지 않겠지. 아무 일도 없다는 직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텔에 울려퍼지는 경보와 안내방송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물론 방문을 열기 전과 후의 내 마음은 당연히 달랐다.


「기호활동semiosis은 기호가-유도하는 되기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의 기호가 실제 경험에서 몸의 되기를 역동적으로 결정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힘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실수로 기표화된 현재 존재하지 않는 불에 대해서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미래-발생적 불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선취적으로 옳을 것이다.」 (123)




경보의 시간이 지나고 옆지기와 나는 화재가 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묵고 있는 방은 건물 7층, 만약 중간 어디쯤에서 화재가 나고 복도가 연기로 가득하다면, 문을 열고 탈출할 수 없다면, 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리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도.


「 선제행동이 명시적으로 생산하고자 했던 안전은 그것이 피하고자 했던 것을 암묵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에 입각하고 있다. 즉, 선취적 안전은 그 자체가 기여하는 불안전의 생산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제행동은 그 자체의 실행을 위한 조건을 생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선제행동은 본래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위협-잠재성에 내재된 자기-원인적인 힘을 그 자체의 작동을 위해 포획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09)

「위협의 정동적 현실은 전염성을 가진다. (107)

...

위협은 아무런 실제 지시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 선제행동이란 아무런 실제 지시대상이 없는 위협을 대상으로 삼는 권력의 한 양식이다. 선제행동의 정치학이 그 자체의 작동에 대한 위협의 잠재능력을 포착하면, 권력의 실제적 대상을 찾는 것을 중단한다.」 (111)




가끔, 내가 지금 죽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었어, 하는 순간이 온다. 진짜로 불이 난 거였다면, 방에서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지만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위기대처능력도 없고 근력도 없고 끈기도 없고 수영도 못하는 나는 죽을 위험에 처하면 그냥 죽는 것인가. 몇 년 전의 나보다 죽는 게 좀 덜 억울할까. 그러면 몇 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좀 덜 억울하게 될까.

그 와중에도 물건을 챙기려고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대책 없다. 옷도 갈아입었고 책도 쓸어담았다. 챙기지 않은 물건들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화재였다면 나는 내 목숨을 아까워하는 귀신이 되었을지도...@@


「신체적인 활성화 사건은 아직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분이 없는 거듭-깨어남의 문턱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몸이 자신의 '본능'과 기호의 구성적 수행에 의해 전달된 거듭-깨어남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124) (*마치 꿈과 사건의 경계처럼)

「선제적 논리는 정동적 기재에 기반하여 작동하고 현재와 미래 사이를 돌고 도는 비선형적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 논리에서와 같은 무모순noncontradiction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규범적 논리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선형적 인과관계에 특권을 주며 현실의 효과에 대한 원인을 미래성에서 찾기를 꺼린다.」 (105)




밖으로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벽에 박힌 글자들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치던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화재시 절대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마시오." 그 옆에서 소화기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내가 저걸 사용할 줄 알던가. 


 "만일 우리가 [과거에] 위협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위협을 느낀다면, [미래에도] 위협은 항시 있을 것이다. 한 번 위협은 영원한 위협이다once and for all,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는 비선형적의 시간 속에서." (100)






** 인용문 : 2장 정동적 사실의 미래적 탄생 (브라이언 마수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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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04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화재가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그 시간의 떨림은 쉬이 가라앉질 않겠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순간은 자꾸 떠오를 거예요. 저도 교통사고를 목격했던 것,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것들이 여전히 수시로 떠오르거든요.

인용하신 정동이론의 문장들은 정말 다 맞춤하네요. 그리고 어쩐지 이런 순간들의 불안을 좀 다스려주는 느낌도 들어요. 정동이론 사야겠네요. (왜 결론이..)

난티나무 2023-04-04 15:33   좋아요 1 | URL
그런데 좀 웃긴 건요, 그 순간엔 다리가 후들후들 정말 무서웠는데 몇 개월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무엇일까요? 일단 미시트라우마로라도 기억을 간직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으로 보면 그건 또 나름 칭찬(?)할 만한 반응인데, 만약 위험에 처했던 경험이 없어서 혹은 위기대응방식에 무지해서 그 공포를 잊은 거라면?? ㅠㅠ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게 작동한 거잖아요. 생각이 많아집니다…

책 재밌다니깐요? ㅎㅎ 2장에서 제가 겪은 일과 엮으려고 인용문 뽑아왔지만 대테러대응 등 정치적 위협과 정동을 연결지어 이야기하거든요. 뒷장들도 재밌어요. 저는 5장까지 읽었지만 정리하려니 끙 힘이 듭니다…ㅋㅋ

그레이스 2023-04-04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놀라셨겠어요.
우리 아파트 화재경보는 일상이어서 듣고 무심히 지나요.
정동이론 읽어보고 싶네요
수동과 능동 깨어남...!

그런데 막상 위기의 순간엔 제 기질과 습관만 발휘될듯 ㅠ

난티나무 2023-04-04 15:39   좋아요 2 | URL
아이쿠 경보가 일상이면 어쩌나요… 양치기 소년 생각나요.ㅠ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형편없는) 위기대처능력을 욕하는 사람으로 ㅠㅠ 저도 비슷하다는 걸 인식하게 됐어요. 일단 팔뚝힘을 키우는 걸로!(읭?)

책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2023-04-04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화재경보가 오보여서 다행이고요.
그런데 그런 순간을 저렇게 막 이론과 연결시켜 글을 쓰는 난티나무님의 능력에 깜짝 놀라고요. 역시 열심히 공부하는 분의 글은 다르구나 막 느끼면서 보고나면 다 까먹고 글은 글이고 생활은 생활인 저를 또 막 반성하고요. ㅠ,ㅠ
그래도 정동이론 어려울거 같아서 안읽을거같은걸 또 미리 반성하고요. ㅠ.ㅠ

난티나무 2023-04-04 15:50   좋아요 1 | URL
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을 대략 써놓았었는데 책을 읽다가 똭 나와서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짜맞춤이죠.^^;;;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생각은 계속 했거든요. 아마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실제로’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겠죠. 경험을 풀어내주는 글을 만나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여러 가지로요.^^

책은 끌리면 읽는 거지요. 반성이라니요.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4-0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재 경보ㅜㅜ
놀라셨겠어요ㅜㅜ
가슴 두근거림!
오늘 지인을 만나 나이 들수록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우리는 왜 심장 두근거리는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런 얘기를 나눴었는데 난티님의 화재 경보 울림으로 인한 급박한 상황이었다면.....ㅜㅜ
암튼 다행입니다.
이게 정동이론과 연결된다니?
띠용~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4 21:43   좋아요 1 | URL
심장 두근거림! 그러고 보니 그런 신체현상도 억압교육의 결과로 볼 수 있겠네요.ㅠㅠ 뭐 하나 연결 안 된 것이 없어요...@@
알고 보면 모두가 ‘정동‘인 것이죠....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