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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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이라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물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상황들에도. 이름에 그 사람(존재)을 가두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름이 상황을 규정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우주의 눈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이름이 필요하다.

<긴긴밤>의 첫문장은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이다. 작가라고 이름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까. 이름지어진 것들의 세상에서 벗어나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고, 이름이 주는 경계를 떨쳐버리고 싶은 소망일 수도 있었겠다. 더 큰 뜻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지워진 이름들, 사라진 이름들, 이름이 있어도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사람(존재)들이 여전히 많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


이름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 맞다. 그러나 이름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고 ‘아버지들’. 나는 이미 이 단어에서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어떤 존재도 어머니의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알. 그것은 동물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인간의 폭력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버려지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도 한다. (아이를 버리다, 버려지다, 같은 단어의 사용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야기 속 보여지지 않는 맥락에서 이미 많은 고정관념을 통해 생각을 하기에, 이런 설정이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좀더 나아가 왜 아이를 ‘버리는’ 건 늘 어머니인지,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 어째서 재현은 늘 이런 식인지도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펭귄들은 알이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미운오리새끼?)로 품기를 꺼려한다.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는 특성, 낳은 알이 깨어지거나 얼어버리면 다른 알을 훔쳐서라도 품으려는 성향, 암수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 이런 펭귄의 성향들을 참조하자.) 생명은 물론 소중하다. (이 문장에 얼마전 미국의 임신중지위헌판결이 겹쳐보이는 건 나만 그런가?) 인간에 빗대어 아기를, 자식을, 품고 키워야 한다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면, 좋다. 뒤집어 생각하면 지나친 ‘새생명중시사상’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알을 지키려는 펭귄이 다쳤다. 그를 두고 나온다. 급박한 상황이다. 하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물에 빠진 어른과 아이(주로 엄마와 아이로 설정되는, 아빠와 아이는 들은 적이 드물다.) 중 누구를 먼저 구하느냐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모르겠다. 그 알을 그렇게 지켰어야 했는지. 사랑하는 이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나?


노든이 어렸을 때 있던 곳은 코끼리 고아원이었다. 그 곳의 코끼리들은 떠나지 않는다. 야생의 터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곳이다. 동물들을 야생으로 보내려는 선한 노력일 수 있지만 선함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물들이 왜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는가도 고민해야 한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자세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으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죽임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원인이 그 한가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것들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질문들이 필요하니까. 


고아원을 떠나 독립하는 노든은 수컷이다. 독립을 격려하는 할머니 코끼리는 고아원에 머무른다. 자꾸 성별 운운하는 것이 싫지만 보여지는 것이 그러하니 어쩔 수가 없다. 야생을 모르는 노든을 가르치는 것은 아내 코뿔소이다. 암컷 코뿔소에 대한 묘사는 적다. 조연이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딸 코뿔소를 낳고 노든을 ‘성장’하게 만들고, 인간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쓴 아내 코뿔소는 계속 ‘아내’ 코뿔소이고 옆에서 죽음을 당한 딸 코뿔소도 ‘딸’ 코뿔소이다.(그들도 이름이 없다.) 살아남는 것은 노든, ‘수컷’ 코뿔소이다. 이것이, 남성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여성을 착취하고 죽이는 세태를 반영하려는 의도일까? 나중에 노든이 보살피게 되는 알-펭귄-을 위해 딸 코뿔소가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했던 것일까? (인간은 동물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기도 하니까. 남자가 여자를 이유 없이 죽이는 경우처럼…) 알에서 나온 펭귄의 성별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암수 구별이 잘 안 된다는 펭귄의 속성을 생각하자.) 성별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좋은 의도일 수 있다. 독자들은 어떨까? 기존의 동화들을 떠올려보라. 영웅서사들, 꿈을 이루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모두 ‘왕자’ 아니던가?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명작동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부터도 이 어린 펭귄을 은연중에 수컷일 거라고 짐작했다. 화들짝 놀랐다. 어린 펭귄을 보호하고 격려해주는 것은 ‘아버지’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생명을 지키고(정작 아내와 딸은 죽고)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다른 수컷(으로 짐작할 가능성이 높은 펭귄)이 성장하도록 길을 터주고. 이런 맥락에서 이 이야기는 '수컷 성장 서사'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모든 설정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성공이다. 돌봄과 교육에 무관심한 아버지들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성공일까? 수많은 질문들 앞에 독자들이 그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를 성찰할 수 있을지, 또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애초에 동물에 빗대어 인간의 욕심과 세태를 풍자하려고 했다면, 연대를 통해 감동을 주려고 했다면, 왜 코끼리와 코뿔소와 펭귄이 ‘자유롭게’ 어우러져 살지 못하는가? 이야기 속 어린 펭귄은 같은 종인 펭귄 무리를 찾아 거기에 속할 것이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인종차별주의를 보여주는 동화라는 사실을 아는가? 삐딱한 눈을 가진 나는 이야기 곳곳에 물음표를 찍는다. 감동적인 이야기예요, 라고 쓰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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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1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딱한 시선 너무 좋아요. 그런 삐딱한 눈이 있어야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이 나오고 그 삐딱함을 수용할 수 있는 힘도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

난티나무 2022-07-19 01:34   좋아요 0 | URL
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네요.^^
편향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앞으로도 삐딱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