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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열등하다'는 말이 차별과 혐오의 표현이 된 것은 20세기 말부터다(그러나 이 말은 여전히 유통 중이다). 여성은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자유 속에서 외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여성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추함과 영원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추하다는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성은 추함을 천박함, 범죄로 여전히 인식하고 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심받거나 심지어는 박탈당한다. "나는 못생겼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명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여성의 신체는 비평의 대상이다. 주름살을 비롯한 각종 노화의 흔적, 다시 말해 유한 존재인 인간의 몸에 새겨지는 숙명적인 표시들은 관리되고 치료되어야 하는 증상이 된다. 여성은 이제 자기 몸의 주인이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창조하는 예술가다.
동시에, "건강한 신체와 아픈 신체의 구별은 정상적 신체와 비정상적 신체라는 새로운 구별로 전위(轉位)된다." 이는 "삶과 죽음을 예언"하게 된 의학의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의사들은 이른바 좋은 태도를 보급하고 나쁜 태도를 비난한다. 어떠한 이상을 지지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는 문화"가 생겨난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죄의식 또한 달라진다. 유혹에 빠지거나, 죄를 짓거나, 정치적 투쟁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는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 개인은 남이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하여 추하게 보이면 어떡할까,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 추하게 변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러한 비극을 피하기 위해 개인은 노력해야 했고, 불행한 일이지만 그 노력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오래된 규범은 내면화되었고 모든 개인은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비치길 원했다.
규범은 기준이지만 동시에 제재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규범은 제재에 대한 공포를 수반한다. 현대는 타율성의 시대에서 자율성의 시대로 이동했지만, 철학자 이자벨 케발Isabelle Quéval의 표현에 따르면 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명령이다. "나는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는 정언 명령이다. 개인은 단지 외부의 규칙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이제 권위주의적인 언어를 가지게 된다. 즐거움 대신 고된 노동이, 만족 대신 근심이 자리를 차지한다. 못생긴 여성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무능력자다.
못생긴 여성의 역사를 복기해보면 처음은 여성으로 태어난 자체가 추함이었고, 다음은 자연의 실수가 빚어낸 결함으로 인한 추함이었다. 그 뒤를 이어 세 번째 추함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무관심, 예의범절과 자기존중의 결여, 게으름과 자포자기 등의 정신적 결함으로 인한 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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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함은 존재론적 영역을 침범한다. 추함은 개인의 정체성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추함이 곧 개인의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무심한 생각에까지 스며들어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분석한 대로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주체가 죄책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못생긴 개인이 느끼는 수치심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일종의 원죄처럼 존재를 건드린다. 주체는 불법적인 일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수치심은 추함을 죄악시하는 주장들에 의해 더욱더 커진다. 치욕과 모멸감 속에서 피해자는 타자가 보는 방식대로 자신을 바라본다. 사르트르의 주장대로 수치심은 늘 타인과 관련이 있다. 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본다. 타인의 시선이 나의 알몸을 보고 있다고 느낄 때, 타인이 나의 원래 모습을 볼 때 나는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에게 비친 나의 모습이 실제 내 모습임을 인정할 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타인이 나를 추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경우,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추함에 대한 수치심이며, 라캉이 말한 "수치론적hontologique"인 추함으로, 나의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는 추함에 대한 수치심이다. 그리하여 대자적 존재는 즉자적 존재에 의해 갉아 먹힌다. 나는 추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추함의 본질은 곧 고통이라고 한 흄Hume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는커녕, 자신의 모습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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