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d ceux qu’elle nourrit ne savent plus rien d’elle. Quand elle est à elle-même hors d’atteinte : seul devant la page. Misérable devant l’éternel. Beaucoup de femmes écrivent ainsi, dans leurs maisons gelées. Dans leurs vie souterraine. Beaucoup qui ne publient p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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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 :
그녀가 먹이는 그들(식구)이 더이상 아무것도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그녀가 도달할 수 없는(가질 수 없는) 그녀 자신일 때. 종이 앞에서 혼자인 그때. 영원 앞의 비참한. 많은 여자들이 그래도 쓴다, 그들의 얼어붙은 집 안에서. 땅 아래 파묻힌 삶 안에서. 많은 이들이 출판하지 않는다.
한글번역본 :
번역문의 '가난한'보다 '비참한'을 선호한다. 가난이라는 단어는 대상을 한정짓는 역할을 한다. 비참은 조금 덜하다. 마찬가지로 '은밀한'보다 '파묻힌' 삶이 훨씬 더 와닿는 표현이다. 혹은 '지하'. 혹은 또다른 비슷한 표현. 왜 은밀하다고 번역했는지 그 의도는 알 것 같지만 반대하고 싶은 단어다. 은밀,에서도 우리는 은밀한 무엇을 상상한다. 또 마찬가지로 그 아래 번역문에 '나는 여왕이 될 거라 기대했는데'도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이 글을 쓴 작가가 아니므로 마음에 안 들어도 뭐 어쩔 수 없지만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서 여왕을 꿈꾸는가? 남자는 왕을 꿈꾸는가? 이래서 문제인 것이다. 확연한 권력의 차이, 꿈꾸는 자들의 위치 차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괴리. 내가 이 글을 썼다면 물론 이렇게 쓰지도 않았(못하)겠지만 절대로 여왕,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을 것 같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그래서, 좋다가 말고 좋다가 만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 남자는 왜 노상 여자를 말하는가? 남자는 왜 남자를 쓰지 않는가? 좀 쓰지? 맨날 여자 타령하지 말고? 탐구 좀 하라고, 남자 탐구!
+ 이만큼 여자를 잘 안다고 우쭈쭈 해주어야 하는가? 그런 건가? 그러고 싶다가도 슬쩍슬쩍 나오는 문장들이 맘에 걸려.
(책 표지가 아직도 이해 안 됨. 왤까. 왜 아시아여성일까. 무슨 의미일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