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두 밑줄감
(~33쪽까지 읽고)
여성의 시 언어는 남성의 시 언어와 다르다. 여성의 언어는 이제까지 밖에서 주어졌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여성의 언어는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인 것이다. 이 위반이 이제까지 있어왔던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 때문에 여성의 시는 기존의 서정시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적 인식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 위반의 자리에 서면, 시의 온전한 재료이며, 존재 비평인 언어마저도 여성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이 닥쳐온다. 이렇게 부유하며, 쫓기는 그 자리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이 불러야 하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시 잉태하고, 분만해야 한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그 명명의 자리에서 사랑의 아픔으로 뒤범벅된 여성시인의 다양한 발성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 P7
나는 여성시인도 바리데기 연희자와 같은 어떤 상징적인 치름, 그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여성시인에겐 스스로 인지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자신의 여성적 삶의 현실, 혹은 자신 스스로 구축하지 않으면 여전히 남의 현실로만 존재하는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여성시인은 그 순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 그 병과 함께하는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아픈 몸으로 죽음과 삶의 소용돌이를 치러낸다. 그런 어느 시간의 점, 여성시인은 ‘여성성에 들린다.‘ - P15
영감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나‘를 통해 ‘나‘를 무(無)로 만드는 기제, 그러나 그 기제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저 바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바깥이 내게로 여릿여릿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열고 여성성으로 들리자 저 바깥이 착각의 소용돌이인 내 안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영감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나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져 있는 것만 같다. 먼지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만 소용돌이친다. 나는 휘날리는 모래 알갱이들 같은 불모에 휩싸여 사라져버린 나를 부른다. 나는 나와 만났다 헤어지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사라졌다 하는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걷어차며, 걷어찼다가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방으로 떨어져가며 말의 새끼줄을 스스로 생산해낸다. 그 새끼줄이 나에게서 뿜어져나와 나를 옭아맨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끼줄을 뽑아내지 않으면, 또는 그것에 옭아매여 있지 않으면 나는 영감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미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새끼줄을 끊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그 허방에 목매달려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그 영원한 허방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한 대로 미쳐버릴지도, 아니 벌써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 절명의 시각, 내가 나라고 믿었던 사랑과 아픔이 모두 깨어난다.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죽음이 보내온 신기루라는 이름으로. 그때 역설적으로 세계가 다시 내게로 살아나온다. 시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아득한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 P23
특히 여성시인이 ‘나‘를 열어 ‘나‘의 그 알 수 없는 심연의 죽음 속으로 빠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심연이 바로 자신의 존재임을, 시를 쓰는 작업이 바로 그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여성시인은 그 불모의 사막 속에서 ‘나‘를 보내고, 모든 ‘나‘를 불러들인다.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비추며, 모두를 무성하게 한다. 그것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부재를 통한 무수한 존재의 발견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두 있다. 그곳을 여성시인인 내가 방문하는 것이 내 시의 궤적이다. - P25
여성시인의 영감은 이 지상에서 버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유일하게 생산적인 것으로 치환시켜주는 기제이다. 동시에 버려진 아이를 끌어안고, 그 버려진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기제이다. 혹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여행을 날마다 감행하는 샤먼처럼 ‘살아 있는 죽음‘ 속으로 스스로 떨어져가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성시인에게 영감은 남성시인의 관념적인 죽음의 응시, 그 투명한 공간으로의 여행과는 다른 공간으로의 여행을 감행하게 하는, 날마다의 ‘들림‘을 명명한 것이다. 여성시인이 바라보는 죽음, 혹은 무(無)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들어 있다. 동양 철학이 궁구하던 무(無) 속에 ‘절대적인 없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듯이, 여성적 영감이 끌어당겨서 홀려가는 여행의 공간 속에서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그 순간, ‘나‘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해 저 너머로 간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은 아이인 또다른 ‘나‘를 만나러.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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