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하기’ 김혜순

여자하기는 ‘여자이고자 함‘이다. 타자와 감응하여 작고 낮은 것을 몸에 분포해야 한다. 여자이고자 함은 대립항인 남자라는 포지션이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함을 전제로 하기 이전에, 인간 각자가 스스로 여자라는 복수성, 내 안에서 흘러넘치는 여성적 실재를 향해 여행해 가야 함을 이른다. 또한,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이나 나의 에너지로 다른 사물들과의 연결과 접속 속에서 여자를 구현해가야 한다. 나는 날마다 다른 정체성의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나는 텍스트 속에서 오늘은 소녀였으나 내일은 할머니로, 다시 할머니소녀로 태어나고 싶다. 오늘은 연어였으나 내일은 사냥하는 곰으로 태어나고 싶다. 나는 색으로, 무늬로, 이미지로, 어떤 작은 기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나는 한 여자가 아니라 여러 여자, 여기 있는 여자가 아니라 여기, 저기 있는 여자, 나 때문에 여기가 여기 없는 저기가 되는 여자가 되고 싶다. 여자이고자 함은 순수한 에너지 차원에서의 감응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내 여행의 앞에는 나를 제외한 어떤 중심이 있다. 제도들이 파생하고, 규칙들이 남발되며, 나의 여권이 불온해지는 견고한 체제가 있다. 여자와 짐승을 변두리에 두거나, 권외에 두는 언어 체제가 있다. 이 체계를 거슬러 가노라면 ‘여자이고자 하는 자‘를 죽음, 부재, 텅 빔으로 변질시키는 ‘죽임‘이 있다. 그러면 나는 부재의 운동성이 된다.
결핍의 수용이 아니라, 결핍이라고 규정되는 범주를 거치지 않는 방식의, 내 운동성의 리듬이며 속도가 된다. 나는 부재와 맞물려 움직인다. 바르도 퇴돌Bardo Thos grol의 안에서 처럼. 바르도 퇴돌은 ‘둘do 사이bar를 듣다thos그리고 깨우치다grol‘라는 의미다. 둘 사이란 낮과 밤 사이, 죽음과 삶 사이, 선과 악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같은 모든 사이 중음의 세계다. 그 사이를 ‘들을 수 있으면’ 영원히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무릇 여자이고자 하는 자, 바리공주처럼 자신의 부재를 여행하리라. 부재 없이는 리듬도 없다. 여행도 없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부재 없이 시적 언술은 불가능하다.
여자하기는 일종의 여행이다. 이 여행은 여자의 몸으로 겪는 복수적이고, 관계적인 경험이다. 몸의 경험을 사유하기이다. 사유하기는 공동체하기이다. 여자하기의 여행은 그 나름의 궤적이 있다. 이 여행은 길 아닌 길로 가는, 다방면으로 준동하는, 이분법의 고착을 넘이서는 가기이다. 수직적인 것들과 중앙제동장치와는 상관도 없는, 여행하는 나라의 정부로부터도, 떠나온 나라의 정부로부터도 이방인인 사람. 바리공주처럼 이쪽에서 저쪽을 여행하는 자, 지금 있는 여기에서 지금 떠나갈 거기로 접속해나가는 길이 있을 뿐, 그 길의 증식이 있을 뿐, 사이를 건네주는 뱃사공인 여행자, 일종의 무정부 상태, 계보도 조상도 없는, 모국어가 낯설어지는 상태.
(전자책 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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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6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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