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한국에서 내가 처방받은 약은 여성호르몬제였다. 산부인과 의사는 증상 몇 가지를 듣고는 빼박 갱년기라며 약을 처방했다. 그 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심장이 수시로 벌렁거리고 제멋대로 뛰는 느낌이었으며 어쩐지 안정이 되지 않아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긴 이야기가 있으나 너무 기니까 거두절미하고. 한국 가는 비행기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위에 탈이 났고 다음날 동네 내과에 갔었다. 한국의 병원 시스템을 잊어버리고 구구절절 며칠 간의 일을 이야기하며 증상을 설명하려 애쓴 나는 밖에 환자들 엄청 많다며 의사에게 호통을 들었지만, 다다음날 그 의사의 처방전을 본 산부인과 의사는 그가 명의라고 추켜세웠다. 처방전에는 신경안정제 반 알이 들어있었다. 힘이 너무 없어 링거를 꽂고 누워있던 나를 살피며 나이도 그렇고 혹시 모르니 다른 원인을 찾아보라고 권유한 것도 내과의사였다. 그는 나의 무엇을 보고 내가 불안한 상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을까?
병원에서 처방받는 모든 약의 부작용을 알게 되면서 되도록 약을 먹지 않는 나는 한밤에 심장 때문에 잠이 깨는 일에 놀라서 호르몬제를 일주일 정도 먹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저혈당도 아니고 갱년기도 아니라는 것. 불안한 마음과 공포. 공황 초기. 지금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했는지. 불안한 게 맞았는지. 그리고 공황증세가 맞는지도 사실. 어쨌든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내 아픔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호전에 영향을 미쳤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화가 났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공황증세는 마찬가지 이유로 갱년기 증세와 비슷하다. 증상 몇 가지만으로 덮어놓고 갱년기라 확신하고 무조건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자세. 왜 의심하지 않지? 그러다 문득, 알았다. 내과에서는 이전의 상황을 횡설수설 길게 늘어놓았었다. 산부인과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간략히 증상 위주의 설명을 했다. 내 설명이 진단에 영향을 미친 건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태도는 아직도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산부인과 의사와 내과의사는 모두 여성이었다.
프랑스에서 우리 가족의 주치의(일반의)는 최근까지 13년 동안 나를 봐왔다. 7년여 전, 어느 날 된통 체했을 때였는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채로 병원을 찾았다. 인사를 하고 문 안으로 들어서는 나의 얼굴을 빤히 보던 의사가 말했다. 울고 싶은 얼굴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치솟았다. 그랬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 날 의사는 내게 한국에 한번 다녀오는 건 어떠냐고 권했고 그 말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한국으로의 혼여를 꿈꾸게 되었으며 실제로 몇 달 뒤 비행기를 탔다. 내 인생 최초로 혼여라 이름붙일 수 있는 여행이었다.
한동안 병원 갈 일이 없었는데, 작년 말 편지 한 통이 왔다. 주치의가 병원을 닫았으니 다른 주치의를 찾아보라는. 표정만 보고 우울한 것을 눈치채주던 의사는 이제 거기에 없다. 나는 낯선 의사 앞에서 아픔을 늘어놓게 될 것이다. 나의 주치의는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