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셋 : 아름다움과 여성혐오 열다 페미니즘 총서 2
쉴라 제프리스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엄마는 늘 나를 보면 입술 색이 그게 뭐니 립스틱이 싫으면 립글로스라도 색깔 있는 걸로 발라라 라는 소리를 달고 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엄마를 2년여에 한번씩 만나는지라 그런 소리들도 띄엄띄엄 듣는다. 옷이 그게 뭐니 얼굴이 어두워보인다 빨강을 입어라 얼굴색이 확 살잖니 좀 찍어발라라...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 좀 빼라는 소리는 안 듣고 대신 살 좀 찌워라 소리를 듣는다. 너무 말라 이뻐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아니 내가 괜찮은데 왜 찍어발라야 하냐고 되물으면 그래도 밖에 나가려면, 그래도 어쩌구저쩌구... 

흰머리가 보이면 할머니 취급을 받으니 곧 죽어도 염색을 포기할 수 없다는 엄마. 민소매를 입고 싶지만 절대로 살이 덜렁거리는 팔을 내놓고 다닐 수 없다며 더워도 긴 소매를 고집하는 엄마.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축 처진 엉덩이살을 내놓고 다닐 수 없다고 늘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웃옷만 입는 엄마. 이렇게 늘어놓다 보니 글쎄 엄마만 탓할 일이 아니네. 우리 엄마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ㅠㅠ 


문득 중학교 어느 때가 떠오른다. 가난의 문턱에 진입하기 직전, 혹은 이미 진입한 때로, 내가 즐겨입었던 목깃 달린 면티셔츠와 밝은색 청바지. 티셔츠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진분홍색이었을 것이다. 다른 옷이 많이 없기도 했다. 아무튼 긴머리에 핀을 꽂던 초등('국민')학생은 중학생이 되면서 숏컷을 했고 이차성징이 진행 중이라 몸이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리라. 그 땐 이유도 모르고 내 얼굴과 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티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입는 게 더 '이쁘'다는 엄마의 권유를 번번이 묵살하면서 바지 위에 티셔츠를 덮이게 입고 집을 나서곤 했다. 여기저기 살이 붙은 엉덩이를 바지라인을 따라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싫었다. 그 와중에 티셔츠를 넣고 거울 보고 빼고 거울 보고 했으니 그냥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ㅠㅠ 얘야, 안 그래도 돼. 한마디 해주고 싶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교생 실습을 나갈 때 주위에서 꼭 퍼머를 하라고 충고를 했다. 어려보이는 여자교생은 학생들에게 휘둘리기 십상이라고. 순진한 나는 첫 퍼머를 했고 긴 치마를 입었고 그래서 실습 내내 불편한 생활을 했다. 여학생들이 와서 남학생들의 나를 두고 찧고까붊을 몰래 이야기해 주었다. 누가 그러는지 알아챌 수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얘야, 너를 살아. 한마디 해주고 싶네. 그 시절의 나에게. 


몇년 전, 가까이 살던 후배가 말했다. '언니, 왁싱하세요? 해야지, 서로에게 좋은 건데. 위생을 생각해서라도.' 왁싱 생각 1도 해본 적 없었던 나는 그게 왜 위생을 위한 건지, 서로에게 어떻게 좋은 건지 물었으나 후배는 대답을 아꼈고, 난 거기 털이 있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말았다.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정말 네가 선택한 행동이라 생각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는 아는지? 


책을 읽으며 충격을 받는 경험이 계속된다. 아무 생각 없었거나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뒤집힌다. <코르셋>에서는 동성애가 그러했고, 하이힐과 전족이 그러했으며, 패션도, 크로스드레서도, 성형도 다른 수많은 미용 행위들도 그러했다. 새로 알게 된 쇼킹한 사실, 다른 관점들.

치마를 입기 싫어진다. 하이힐은 원래 안 신고 싫어하지만 더더욱 싫어진다. 화장도 마찬가지다. 몸에 달라붙는 옷들도, 피어싱도, 성형수술도, 보톡스도, 포르노도, 모두모두 더더욱 싫어진다. 그런데 여자들은 좋고 싫음을 떠나서 해야만 한다고 강요당한다. 아무도 너한테 강요하지 않았어,라고 말하지 말라. 엄마가, 아빠가, 친구들이, 직장동료와 상사들이, 인터넷과 대중매체가, 강요한다. 라디오와 TV에서 성형외과 광고가 흘러나오는 세상. 지하철과 버스에 성형미인 사진이 붙는 세상. 여자라고 하면 가슴 빵빵하고 엉덩이 톡 튀어나온 체형에 어떻게든 다 보이는 옷을 입히려는 실제 세계와 인터넷 세계.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할 지 암담하다. 50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이럴진대 10~20대 여자들은 도대체 어찌 살라는 말인지, 더 어린 아이들은 또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런지. 화장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요즘의 TV 속 연예인 화장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남자들에게도 화장을 입히는구나. 입술이 빨갛거나 꽃분홍색인 남자들의 입술을 보며 왠지 모를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은 불안함을 느낀다. (<코르셋>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땐 온세상이 이상해 보인다. 시끄럽고 추악하고 암울하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가 또 끝없이 솟구쳤다가 그래서 씩씩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 

눈에 차게 들어오는 하늘과 나무와 꽃과 말없는 집들의 풍경이, 내 주변의 고요가, 

너무도 평온해서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생각을 뒤집어본다. 이거 정말 평온인가. 

혼자 있고 현관문은 잠겼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다. 나는 평온한가. 




--- 밑줄 : 가져오는 밑줄은 얼마 안 되지만 그은 부분은 엄청 많다. 읽어보길 권함. 목차만 봐도 대략 내용이 짐작되리라 생각한다. ---


"미용 관습은 여자의 순종을 표시한다. 여기에서 순종은 여자에게 성적으로 복무할 의지, 심지어 성적 복무를 위해 노력을 들일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여자가 단순히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굴종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게 미용 관습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여자가 구현해내야 하는 성적 차이difference가 바로 굴종deference인 것이다. 성적 차이/성적 굴종을 표시하도록 강요받는 정도는 남성 지배 사회마다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성적 차이/굴종이 무의미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모든 남성 지배 사회 질서의 근간이 되는 것도 성적 차이/굴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지배 계급이고 누가 피지배 계급인지를 명확하게 표시할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남성 지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서구 사회에서 그런 표식이 되는 것은 여자에게 강요되는 '아름다움'이다. 몸의 상당 부분을 노출함으로써 남자를 흥분시키는 옷을 통해, 치마를 통해, 몸에 달라붙는 옷차림을 통해, 메이크업과 머리 스타일과 제모를 통해, 때로는 수술까지 감수하며 이차성징을 뚜렷하게 전시하는 관습을 통해, '여성적'인 몸짓 언어를 통해 여자는 '아름다워진다'. 여자는 성적 차이/굴종이 존재할 수 있도록 여성성을 실천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여남 차이란 다름 아닌 권력의 차이이며, 여성성은 피지배 계급인 여자가 지배 계급인 남자에 대한 굴종을 나타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행위인 것이다." (98~99) 


"왜 남자들이 여자에게 전족을 강요했는지, 엄마가 무슨 심정으로 딸에게 전족을 시켰는지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하이힐 착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전족하는 이유 한 가지는 남자와 여자의 분명한 차이를 창조하기 위함이었다. ... 전족 관습이 남자들에게 가져다주는 성적 흥분도 중요한 이유였다. 남자들은 여자가 전족하면 질이 좁아져 '처녀'와 성관계를 하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서구 남자들은 하이힐 신은 여자의 종종걸음을 도발적이라고 받아들이며 만족감을 느끼는데, 전족도 유사한 만족감을 주었다. 레비에 따르면 "아장거리는 발걸음과 뒤뚱거리는 엉덩이는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레비는 전족한 아내를 둔 남자를 인터뷰했는데, 그 남자가 생각하는 전족 발걸음이 매력적인 이유는 오늘날 하이힐 걸음걸이에 대한 시각과 매우 비슷하다. ... 중국 남자들은 망가진 발을 갖고 놀고, 입을 맞추고, 쪽쪽 빨고, 입에 집어넣거나 페니스 주변에 갖다 대고, "발가락 사이에 수박씨와 아몬드를 끼워 먹고," 발 씻은 물을 마시는 데서 성적 쾌락을 얻었다. 로시에 의하면 전족으로 얻는 만족감 중에는 여자가 망가진 발에 생긴 '굳은살 벗겨내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있었다. 이는 발 페티시를 가진 현대 남자가 하이힐 때문에 생긴 피해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과 흡사하다. 남자들이 전족을 강요한 또 다른 동기는 여자의 모든 자유와 독립성을 제한해 '정조'를 지키려 함이었다. 전족은 일종의 '정조대'처럼 작용했다.

여자들은 전족이 초래하는 고통을 알면서도 딸의 발을 동여맬 수밖에 없었다. 결혼 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고, 발을 작게 하지 않으면 결혼할 남자를 찾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발이 작으면 작을수록 좋은 아내감으로 여겨졌다. 성매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어릴 때 가족에게 팔려 성매매 되는 용도로 길러지는 여자아이들도 존재했다. 당연히 이 아이들도 전족을 했고, 발이 작을수록 성매매 될 때 수요가 많고 높은 가격이 매겨졌다. 이렇게 결혼의 형태건 성매매의 형태건 남자들이 서로 간에 여자를 팔고 거래하는 한 전족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299) 


"립스틱 바르기는 역사적으로 성매매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미용 관습이다. 성과학자 해리 벤저민과 R.E.L. 매스터스는 '성 혁명' 초기에 성매매를 정당화, 정상화하려는 목적으로 쓴 책에서 립스틱 바르기가 성매매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중동에서 성매매 되던 여자들이 구강성교를 제공한다고 알리기 위해 입술을 붉게 칠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립스틱은 입술을 여자의 외음부처럼 보이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며, 립스틱을 처음으로 바른 건 페니스의 구강 자극을 전문으로 하는 여자들이었다." "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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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3-3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읽을게요. 사회주의 페미니즘 끝내자마자 읽을거에요. 불끈!

리뷰 잘 읽었습니다. 난티나무 님의 이 책을 읽을 당시의 고통과 괴로움이 막 전해지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에서(제가 아마 포르노랜드 책 리뷰하면서 언급했을 텐데요), 여자주인공 두 명이 얘기하면서 ‘너 왁싱을 안하다니, 섹스할 생각이 없구나?!‘ 라고 대화하는 장면을 보았어요. 섹스를 할 생각이 있다면 왁싱을 하란 말인가... 그 장면이 너무 불쾌하고 괴로웠어요. 왁싱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본인이 원해서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언제부터 본인이 원하는 게 된걸까요, 그러니까 세상이 왁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성에게 어필한다고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도 사람들은 ‘내가 원해서‘ 몸의 털을 밀었을까요?


저도 읽어볼게요. 아마 저 역시도 밑줄 박박 그으며 읽게될 것 같습니다.

난티나무 2021-03-30 17:14   좋아요 0 | URL
아아 정말 괴로웠지만.... 읽기를 잘 했어요. 아마 다락방님도 그러실 것 같아요.^^ 늠 쇼킹합니다. 우웩우엑도 많이 했어요.ㅠㅠ 영화에서조차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쩌자는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