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96
신철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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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갈피는 바로 신철규 시인의 시집, 지구만큼 슬폈다고 한다 속 3개의 시예요.

과학덕후인 저는 이 제목을 보고 뭔가 과학 같지 않지만 과학적인 시 구절인 것 같아서 그냥 바로 구입을 했었답니다.

 

시집에서 제 마음이 동한 건 세 개의 시 입니다. 소개할게요!

 

연인

 

고개를 기울이면

남산타워가 쓰러지고

건물 유리창들이 유성우가 되어 쏟아지고

화면에서 글자들이 흘러내리고

구름에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고개를 기울이면

당신의 어깨가 한쪽으로 꺾이고

한쪽 입술이 올라가고

오른쪽 눈에 눈물이 가득차고

기억이 주르륵 쏟아진다

 

(이하 생략)

 

이런 게 시인의 시선인가요? 고개를 기울였을 때 보이는 모습들을 쓰러지고, 쏟아지고, 흘러내리고, 떨어진다고 표현한 것에 , 맞아.”란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제 생각 속의 표현 능력을 키워준 것은 그 다음 연이에요. ‘고개를 기울이면...기억이 주르륵 쏟아진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전 고개를 기울인다는 표현이 좋아요. 왜냐하면 전 습관적으로 고개를 잘 기울이거든요. 주의 깊게 들을 때, 이해가 안 될 때, 인사할 때 등등 뭔가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잘 기울어져 있어요. 근데 마지막 표현, 고개를 기울이면 기억이 주르륵 쏟아진다..........

내가 어떠한 생각에 포옥 빠져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목에 살짝 힘이 빠지면서 고개를 기울이지요. 동시에, 그 생각 속의 많은 기억들이 순간순간 떠오르고, 스쳐가고 또 쏟아져요. 근데 저는, 지금에야 느끼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기억을 조금씩 미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당시 힘들었어도 지금은 약간은 포장해서 그땐 그랬지.. 그렇게 여기는 과거의 시간이 조금씩 있지 않나요?

 

저녁 뉴스

 

해변에 벗어놓은 옷들처럼 하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공중에 뜬 볼

배트를 든 채 홈베이스를 떠나지 못하는 타자

아직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이 정도에서 그만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네 생각 때문에

거실 바닥에 있던 리모컨을 밟아 박살내고

단추를 잘못 끼우고 엉뚱한 버스를 탄다

손끝까지 타들어온 담배에 손을 데고

신호등 앞에서 무심코 비닐봉지를 떨어뜨린다

(중략)

우리는 의자를 뒤로 빼고 천천히 일어서서

서로 반대쪽 손을 들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다른 해변에 도착해 있었다

 

이 시는 나의 상황과 야구의 상황을 번갈아 제시하고 있어요. 읽어보면 적어도 하나쯤은 공감가는 문장이 있어요. 우선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맨 처음과 맨 마지막의 연이에요. 해변에서의 하루를 보내지만 너와 나는 다른 해변에 있던 것이죠. 해변에서 너에 대한 생각을 하지만 지금 너와 난 떨어져 있다는 그런 말로 읽히네요.

 

기념사진

 

한 발짝만 더 물러나주세요.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덮개를 내리고

피라미드 모양으로 위태롭게 쌓여 있던 유리잔들은 치워진다

 

우리는 프레임에 들어가기 위해 뒷걸음친다

우리의 뒤에는 검은 커튼

 

넥타이를 매만지고

안경을 고쳐 쓰고

단추가 잘 잠겼는지 확인한다

부드럽게 쥔 주먹은 바지 재봉선에 붙이고

 

하나, ,

 

신부는 웃고 신랑은 땀을 흘린다

우리는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렌즈를 응시한다

신혼부부는 사진첩을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볼 것이다

머지않아 액자에는 먼지가 쌓이고

하객들의 얼굴은 점점 희미해진다

 

, , 하나

 

사람들이 다 찍힐 수 있게 조금만 더 밀착해주세요.

 

우리는 조금씩 몸을 한쪽 방향으로 틀고

선언문을 읽기 직전의 사람처럼 진지해진다

같은 표정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텅 빈 객석을 보고 다시 한번 웃음을 짓는다

 

 

위의 시들을 읽으면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지 않나요? 눈앞에 무언가를 묘사하는 듯 하다 보니 시에 대해 더 가깝게 갈 수 있었어요. 결혼식장엔 항상 하객으로만 가봐서 부부입장에서의 결혼식과 기념사진은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 시를 읽고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어요. 긴장되는 순간과 마지막에 긴장이 풀려 비로소 둘이 편안해지는 과정이 잘 나타났습니다.

 

요새는 머릿속에서 단편영화처럼, 그림처럼, 그려지는 시가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상상함으로써 과거의 여러 순간들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좋은 과거를,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시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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