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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주변에 도통 연애를 안 하는 언니가 둘 있다. 사실 딱히 남자가 필요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아서 그냥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나보다 했다. 그런데 한 언니가 김제동 같은 사람이면 당장 연애하지 한다. 뭐, 나도 김제동 말하면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방송 모습이 진짜 같아 좋지만, 연애상대로? 정말이야? 물으니 그렇단다. 그래서 일하는 분야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다 다르지만, 연애를 도통 안하는 다른 언니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언니, 언니 혹시 김제동이 연애하자고 하면 연애 할 거야? 그럼, 당연하지. 김제동 같은 사람만 있으면 당장 연애한다.

물론 김제동이 맨날 하는 말처럼 여자만 좋다하면 자신은 오케이여야 하냐고 하지만, 이 노총각 인기가 좋구나. 그런데 문제는 이 언니들, 김제동이 앞에 있대도 술친구는 해도 연애하자고 달려들 것 같진 않다.

그런 김제동이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에 이어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라는 인터뷰 책을 냈다. 인터뷰 책을 좋아한다. 누구를 만나냐도 중요하겠지만, 누가 인터뷰를 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좋은 질문은 필연적으로 좋은 답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니.

그러나 김제동 첫 인터뷰집은 안 읽었다. 김제동을 너무 많이 아는 듯한 기분이 들어 신선함도 없었고, 사람 좋은 사람이 인터뷰를 하는 건 뭐 좀 뻔할 것 같았다.

거기다 두 번째 책이라니. 난 보통 소설 두 번째 권이 아닌 이상 다른 기획물 두 번째 권들은 철저하게 잘 팔린 첫 번째 책을 등에 업고 엑기스 다 뽑은 이야기를 질질 끌어놓는 것이라 여기기에 잘 안 읽는다.

하지만 읽어야 한다. 리뷰를 써야 하니. 뭐 읽기가 힘든 것도 아니다. 글자도 크고, 헐렁헐렁하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럼, 김제동이랑 같이 읽어 내려간 사람들 이야기, 생각보단 이야기를 하다만 느낌이 드는 것들도 꽤 있다. 그러나 어떤 편, 가령 법륜 스님과 인터뷰에서 스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알아가고, 이해해가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 책을 읽는 나와 눈높이를 맞춰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이게 김제동의 따뜻함이란 건가.

어떤 인터뷰는 자기들끼리 너무 친한 느낌이 들어 소외당한 기분이 드는데, 김제동은 친한 사람과 인터뷰를 할 때도 같이 알아가는 기분이 든다. 이것 참 놀라운 재주로군.

그래도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김제동을 인터뷰한 부분이다.

‘웃음과 혁명’을 연결시킨 부분. ‘고정돼 있는 것은 절대로 웃음을 줄 수 없습니다. 끝없이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제가 안경 벗는 것도 변화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식상하다면 또 다른 걸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혁명으로 가는 것입니다.’

김제동의 글을 보면서 생각보다 밝은 사람이 아니라 좀 걱정되기도 했는데, 늘 변하는 사람, 움직이는 사람이라 바깥의 휘둘림에 유연한 뿌리로 잘 버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일을 대하는 태도, 현안을 보는 눈,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을 보고 많이 배웠다.

음, 김제동 팔로잉 시작! 이제 그의 목소리를 더 자주, 많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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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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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오래된 친구가 있다. 16년 전인 고등학교 1학년, 각반 반장들과 학생회 간부들이 모여 간부여행을 갔다. 진도의 어느 초등학교, 활짝 핀 수국 앞에서 신경숙의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졌다. 1학년은 제2외국어가 일어와 불어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애는 일어반, 나는 불어반이었다. 2학년이 되어서는 제2외국어반에서 또 이과 문과로 나뉘었다. 그 애는 이과, 나는 문과였다. 이런 연유로 친해질 물리적 거리가 하나도 없는데도, 우린 친해졌다. 가장 즐겨하던 것은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기, 같이 있으면 수다 떠느라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딱히 같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그냥 같이 앉아서 수다떠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둘이서 산책하면서 수다를 떨다보면 재밌어서 배를 잡고 웃느라 여기서 쭈그려 앉고, 몇 걸음 못가서 또 쭈그려 앉았다.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던 친구도 막상 같이 있으면 자학개그로 유쾌했고, 난 그 애의 그런 예민함이나 감성이 소설가가 되기에 좋은 자질이라고 이야기해줬다.

소설가를 꿈꾸던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한 번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고, 몇 년은 글쓰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다.

 

우리는 뭐가 맛있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집에는 별일없냐는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소설 이야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거리는 넘쳐서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하는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 친구가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니 시기는 그런데,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일 때문은 아니었다. 일을 시작할까 말까 고민할 때 난 다른 사람들의 시선 말고 너의 필요로 고민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의 마음과 그 일이 친구의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달라졌다. 점점 그 애와 하는 이야기들이 지겹고, 쓸데없고, 짜증이 나서 듣기가 힘들었다. 그애의 남자 관계, 사람 관계 이야기에 잔소리를 하게 되고, 잔소리를 하는 내가 짜증나서 점점 만나는 걸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가 짜증나서 상처주는 심한 말을 점점 하게 되고, 그런 말에 상처 안 받는, 혹은 안 받으려 외면하는 게 또 비겁한 것 같아 마주보기가 싫어졌다.

 

전화도 문자도 피한 게 2년쯤 된 얼마 전, 또 연락이 왔다. 사람들과 관계맺기에 게으른 내가 이렇게 길게 인연이 이어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라 여기며 만나기로 했다.

그 사이 친구는 제자리 걸음인듯, 하다가 또 변해있기도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친구의 “소설 쓰는 사람은…”이라거나 “우리 쪽 일은…” 하며 자신이 속한 분야를 특별하게 말하는 것을 참고 듣지 못하고 “세상 모든 일이 그런 부분이 있지.” “영업에 필요한 정신이지.” “뭐 예술을 한다는 게 그런 큰 특징이 있는 거지.” 하는 식으로 그 친구의 특별함에 대한 이야기를 보편적 이야기로 바꾸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힘들었지만 잘 이겨내고, 이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을 들으며 2년 전에 한 이야기였는데, 그대로라는 식으로 힐난했다. 그러다 곧 내가 뭐하는 짓인가하는 자괴감에 빠지고, 너의 어떤 점이 그러는지 자꾸 짜증나고 거칠게 대꾸하게 된다고 말했다. 난 그냥 너가 좋아서 만날 뿐이라는 그 애에 말에, 다시 화가 나고, 우리 관계가 변했는데 넌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얼마나 너 중심인지, 잘 지내? 라고 물을 때 내가 엉, 잘 지내지, 하고 나면 역시 넌 잘 지내는 구나, 나는 말야…하는 너의 준비자세가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를 잔뜩 늘어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박범신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 친구가 작가 박범신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1997년 <흰 소가 끄는 수레>에 매혹되어 그의 작품들을 읽었던 날이 있었다. 당시에는 잘 나가던 인기작가가 절필을 하고 칩거를 하다, 자신을 둘러싼 여러 비난과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글을 썼다는 솔직함이 충격적이고 멋졌다. 그런데 얼마 전 읽은 박범신 소설 <은교>는 소설로도 재미있고, 인물들도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었고, 사랑이야기보다는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며 감동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솔직함들에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어떤 평가나 비판도 다 알고 있다는 느낌.

세상에서 가장 쉽게 상처받고 예민하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새들은 스스로 길을 내고 스스로 길을 지운다.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가도 그 흔적이 남지 않듯이. 톨스토이는 말년에 자신의 작품을 다 불태우고 싶다면서 먼 변방의 간이역에서 죽었는데, 이제 그 마음 알 것 같다. 삶의 족적을 깊이 남기고 싶은 것도 욕망이고 그 흔적을 물새처럼, 아무것도 없이 다 지우고 싶은 것도 욕망이다. 이 저녁, 혼자 앉아서, 내 몸은 왜 새처럼 가볍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나는 무슨 꿈을 좇아 여기 왔을까. 91p

 

-소설을 보든, 에세이를 보든 작가의 문장에서 여자, 젊음, 명예에 대한 욕망이 읽힌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솔직히 말해준다. 삶의 족적을 깊이 남기고 싶은 욕망에 그 흔적을 물새처럼, 아무것도 없이 다 지우고 싶은 욕망. 작가 박범신에게서 친구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왜 이리 갈팡질팡하는지 원. 올해는 별로 신수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되는 일이 없다. 마음도 천지간을 떠돌 뿐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펴낸 이후엔 소설조차 거의 쓰지 않았다.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근원으로 돌아가 마음의 편안함을 얻고 싶다는 도교적 욕망은 합치되기 어렵다. 그건 다른 길이다. 내가 갈팡질팡하는 것은 그 두 개의 욕망 사이에 내 몸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102 p

 

-그리고 앞에 계속 친구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내 상태가 그런 것 같다. 친구에게 넌 너한테만 빠져있어, 언젠가 좋은 소설을 쓰겠다고, 지금 쓰지 못하는데 언제? 하며 퍼붓는 이야기들은 사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고 있는 거니, 그저 게으른 거 아니야. 작가의 말처럼 한쪽에서는 치열하게 꿈을 찾는 것을, 한쪽에서는 그냥 하던 일 그나마 나에게 잘 맞는 일 그냥 하면서 편하게 살자는 마음이 부딪치고 있다. 그걸 멋있게 포장하기에 급급했는데, 노작가의 두 개의 욕망 사이에 낀 몸을 보니, 나 역시 꽉 끼어있는 기분이다.

2011.12.17

원고를 쓰지 않으니 뭘 하든 삶이 텅 빈 것 같다. 손이 말굽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39년여, 이리저리해서, 50권 이상 썼으니 손가락이라고 해도 그 습관과 지향을 잊었을 리 없다.

불운했던 화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까지 갈 수 없다.” 107 p

-습관과 지향...몸에 새겨진 습관과 지향...

 

 

 

오래 함께 살면 아내가 어머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지금처럼 잠 깨고 잠시 동안도 그럴 때이다. 아, 아내는 어떻게 수십 년이나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단순노동을 견디며 가족들 명줄을 이어주었을까. 아내의 그것에 비해, 내가 쓴 소설들, 사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쨌든 좋아서 평생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 세상에서 아내를 만나면, 내가 평생 밥을 하고 아내 보곤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해야겠다. (다음 세상에서도 아내와 살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113 p

 

-내가 박범신 에세이를 읽고 있다고 하니 누군가가 그런다. 작가가 그렇게 여자를 좋아한다고. 응, 그럴 것 같아. 책에 나와. 아내, 가족에 대한 의무가 얼마나 자기를 억누르는지. 그게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지만, 본능으로는 싫고, 떠돌고 싶고, 자유롭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 부분을 찍어 보낸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다음 세상에서 아내를 만나면, 내가 평생 밥을 하고 아내 보곤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해야겠다.’니. 그러나 뒤에 괄호를 보면 빵 터진다.

그러나 난 요새 오래 산 부부를 보면, 여자들의 희생으로 부부 관계가 유지되긴 하지만, 그 부인들에게도 숨겨진 재미, 행복이 있을거라 여겨진다.

일방적이면 관계가 이어지지 않으니까. 작가도 가족 안에서의 그런 일방성을 힘들어하지만, 그래서 더 일방적이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집필 중의 작가는 그러므로 때로 짐승처럼 울부짖고 때로 폭포처럼 투신하고 때로 바람처럼 솟구친다. 가끔 물같이 고요하게 나부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갈림길과 단애와 함정들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과 같은 이런 모습으로 다시 쓰고 싶다. 나는 여전히 ‘청년작가’다운 기개로 늙어가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날 시퍼런 ‘현역작가’로 살고 싶은 꿈. 120 p

 

-박범신 작가 앞에 붙는 청년작가. ‘은교’를 읽고 나서도 그랬지만, 작가의 젊음에 대한 갈망은 크다. 그게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오늘 그냥 도서관에서 책만 읽고 있어도 반짝반짝한 젊음을 보면서 눈부셔한 나를 생각하니, 젊다는 건 상대적이지만 그 갈망을 조금은 알겠다.

 

나는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으로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경우도, 젊을 때에 비해 환경은 놀랍게 개선됐으나, 행복지수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행복감을 연출하는 제스처가 늘어났을 뿐이다. ‘탄생 이전에서부터 부여받은 슬픔과 결핍감’이 언제나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자면, ‘행복하지 않게 태어난 케이스’일 것이다. 261 p

 

-이 부분을 읽고 친구에 대한 마음이 풀어졌다. 어쩌면 그 친구도 행복하지 않게 태어난 케이스일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불행할 게 없어 보이는데,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 같지만 따지고 들어가 보면 자신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항상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어쩌면 친구와 비슷한 마음 계열을 가진 작가가 솔직하게 말해주니, 마음이 풀린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가? 나는 나를, 내 상황을 행복, 불행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만족 정도의 마음이다. 지금이 최선인가? 최선까지는 아니지만, 최선으로 가는 길목쯤? 이라는 핑계. 그리고 행복, 불행이라는 단어가 참 싫다. 착하다는 말처럼.

 

돌아보면 아버지라는 핑계,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핑계, 어디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핑계로 늘 ‘차선의 선택’을 따라온 인생을 살았다고 느낀다. 나의 회한은 대부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말하고 싶다. 한 시기가 끝나면 한 시기가 시작된다고. 인생이란 새로운 시간의 입체적 설계라고. 지금은 ‘바르도’의 시간이라고.

이제, 평생 찾아 헤매던, ‘최선의 길’을 선택해, 생의 비의로 들어가는 큰 문을 만나고 싶다. 그것이 비록 ‘수직상승도’라고 불리는 최후의 그것일지라도. 142 p

-아, 작가도 ‘최선의 길’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니, 난 이 부분을 한 시기가 끝나면 다른 한 시기가 시작한다는 것,으로만 기억했는데, 최선의 길이라고 표현했다니.

작가에게서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예민하고, 눈물 많고, 사랑 많은 그러면서 더없이 솔직한 작가 박범신.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나랑 참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덮을 때는 아니다.

작년 겨울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고향 논산에서 보낸 일기를 통해 그의 인생을, 그리고 나를 들여다본 시간이었다.

음, 책 리뷰치고는 너무 길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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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한 사람 13 - 이율배반
사카모토 신이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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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만화가 넘 천천히 나와서 원작을 읽고 싶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머릿속에서 그려야할 히말라야나 일본 알프스를 생생히 볼 수 있으니 여전히 기다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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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우연히 피지 않는다.
정말로 꽃은 우연히 피지 않는다. 자연을 들여다보면 우연보단 무수한 전략과 노력으로 식물과 동물들은 살아간다. 심리 치유 명상 전문가 지장스님의 지혜와 수행의 글, 질문의 시간, 상상의 시간, 휴식의 시간, 침묵의 시간, 공백의 시간, 기도의 시간, 통찰의 시간, 참회의 시간, 숙제의 시간 등...진실로 나와 직면할수 있는 시간을 이 책을 통해 만나고 싶다.


 

 

 

 

 

 

 

 

 

 

 

 

 

 

빌뱅이언덕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유서를 기억한다. 평생을 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셨던 분, 이 소박한 말과 마음...권정생 선생님 글은 보고 있으면 꼭 소리내서 읽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권정생 선생님의 지난 산문을 모은 책, 보고 싶다. 아주 예전의 글이래도 지금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유효하다. 


 

 

 

 

 

 

 

 

 

 

 

 

 

 

연애
김여진이 책을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제목이 '연애'일줄이야. 그런데 딱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공무원 아버지 밑에 무난하게 자랐다할수 있는 나에게 시련을 주고,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해 준 건 연애다. 아무리 상처받더라도 사람답게 살려면 연애중이어야 한다는거. 감여진의 생각도 그런가보다. 

김여진은 연애를 "가장 행복했고, 가장 아팠고, 그러면서 완전히 몰입했"던 순간들로 기억한다. 연애는 단순히 연인관계에만 한정되지 않고, '웃으며, 함께, 끝까지' 자신과 타인을 성찰해가며 성장시키는 관계 맺기로 확대된다. 
음, 우린 서로 사랑하기 위해 지금 이 땅의 문제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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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06-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 님, 6월 주목 신간을 올려 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먼댓글 주소가 잘못 된 것같아요.
다시 한 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올리신 책은 제가 확인하였습니다.

날개 2012-06-07 08:59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고맙습니다.
실은 제가 병원에 있어서, 아이폰으로 접속해서 올렸는데, 먼댓글이 안돼서 어쩌나했습니다. 요새 스마트폰이 많아서인지, 병원에 컴퓨터도 없어서 그냥 올리고 오늘 집에 와서 수정하려는데, 이렇게 확인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먼댓글 주소 다시 수정했습니다.

라일락 2012-06-07 09:46   좋아요 0 | URL
병원에서 올리셨군요. 혹시 17일까지 서평을 올리시지 못하시면 연락주세요.
메일을 안 주시면 다음 달 서평단에서 제외됩니다.
메일 주소를 모르시면 제 서재에 방명록과 사연을 남게 주세요.
읽고 삭제해 드릴께요.
빠른 시일내에 쾌차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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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추천해준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야 책을 읽게 됐다. 책을 산지도 꽤 지난 것 같다. 고래는 매력적이다.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이 고개를 약간 갸웃하면서도 강력하게 말했던 것 같다. 음, 지금까지 소설과 다르다, 그런데 낯설기보다 재밌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의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과연 금복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 온 것일까? 아니면, 그런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주인공이 된 것일까?’ 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불경스런 질문이며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금복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아, 몇 쪽이었더라.

 

그날 이후,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된 대신 그의 눈앞엔 기억 속에 담겨 있는 풍경들이 아무 때고, 순서도 없이 불규칙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먼 과거에서부터 눈이 멀기 전까지의 긴 시간에 걸쳐 그의 인생을 모두 기록한 사진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엔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년희 풍경과 전쟁터에서 목격한 온갖 끔찍한 장면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벽돌공장을 다닐 때 보았던 낯선 이국의 풍경들, 그리고 떠오를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미어지는 가족들의 얼굴, 또한 버드나무 아래에서 벌이던 금복과의 정사와 혼자 남발안에 남아 벽돌을 굽고 있을 때의 한없이 쓸쓸했던 겨울의 풍경 등, 그의 전 생애에 걸핀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었다. 누군가 그 장면을 필름에 담아둘 수 있었다면 한 평범한 사람의 생애에 그토록 많은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 또한 한 사람의 기억 속에 그토록 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는 한편, 인류학과 사회학, 역사학과 심리학 등 여러 인문학 분야에서 더할 수 없이 귀한 자료가 되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 모든 장면들은 몇 년 뒤, 그가 버드나무 아래 개울가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266쪽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폰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혹, 이런 점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이야기꾼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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