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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라, 비둘기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비둘기떼가 나타나 우리 마을을 점령하고 부터 사람들의 인심은 몰라보게 흉흉해졌다.
어디서건 부리를 부딪히며 먹이 다툼을 하는 비둘기를 닮아 간 것이다.
이 소설, 참 친절하다- 라고 생각한 건, 갑작스레 이야기를 끊고 소설의 인물들을 하나 둘 밖으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페이지를 맞닥뜨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생각치도 못했던 등장인물의 섬세한 소개글을 훑어 본 후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튀어나오길래 등장인물 소개까지 하나 싶었는데 소설의 끝과 마주해보니 그게 아니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작가의 마음도 눈치챘지만 읽는 독자에게 정확하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읽는 방법을, 전봇대 뒤에 서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새침데기인 척 하며 일러준다. 그래 이 소설, 끝까지 친절하다. 그리고 이러한 친절 역시 작가의 의도란다. 작가의 말에 버젓이 친절한 소설이 쓰고 싶었다는 말에 진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내 자신이 대견했을만큼 놀라웠으며 기뻣고 탄성까지 내질렀음이다. 비록 작가가 의도한대로 흘러간 내 생각들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내 생각과 작가의 의도가 일치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유유자적 날아다니고 싶을만큼 기쁘다. 에정대로였다면, 2월에 출간이 되었을 책인데 좀 늦은감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도언 작가의 이 책을 2월 부터 내내 기다려왔다. 그렇다고 내가 김도언이라는 작가를 잘 아는것도 아니다. 좀 솔직해지자면 난 겨우 김도언 작가의 소설집에 실린 단편 하나만을 읽었을뿐이다. 그런데도 왜 기다렸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이다, 정말. 기다리고 싶었을뿐이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랬기때문에 누구보다 더 먼저 읽고 싶었고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쑤시며 나와라, 나와라 주문을 걸었으며 결국엔 가장 빠르게 배송이 되는 곳에서 배송비까지 들이며 -인터공원은 신간도 배송비를 받더군- 주문을 했다. 두근 두근, 책을 받아들고는 마냥 웃음만 나왔더랬다.
소설 「꺼져라, 비둘기」는 제목 그대로 비둘기에게 점령당한 특색 없는 소읍인 토담리에 사는, 비둘기를 구워 먹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열여덟 살의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이산이라는 이름의 순박한 소년의 시선에서부터 시작한다.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 비둘기가 토담리에서는 불행의 상징이자, 이 마을에 '악'을 불러 온 근원이었다. 마을 변두리에 타이어 공장이 들어서면서, 몰려드는 비둘기는 토담리를 병들게 했으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과 평화를 쪼아먹는 흉물과도 같은것이었다. 이산의 어머니 역시 이 비둘기로 하여금 목숨을 잃었고,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으며 결국, 이 작은 소읍은 비둘기들이 싸지르는 똥으로 범벅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더럽혔다. 유해 동물로 발표 된 비둘기, 그것은 토담리의 중심이었으며 마을의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똥을 싸지르는 비둘기들로 인해 더럽혀진 옷과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세탁소 주인 박씨 아저씨와 목욕탕을 운영하는 주씨 아저씨가 작가가 배치해놓은 소설의 대표적인 '악'이다. 작당하고 비둘기에게 닭 사료를 뿌려대니 살이 찐 비둘기들은 하늘이 아닌 땅을 딛고 사는 동물이라 치부해도 모자라지 않다. 또한, 이산이 불의의 사고로 씨름을 그만두고 아버지와 새엄마가 운영하는 '비둘기네 해장국' 식당에서 일을 거들면서 이상한 알약을 매일같이 건네는 새 엄마 옥미희와 그의 아들 조만세 그리고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기도 한 오토바이 상회의 계씨네 형제가 '악'의 표본이다. 이렇게 소설의 악역을 맡은 인물들을 적고 보니 꼭 소설에서 그랬던것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와 부당하다고 소리를 지를 것 만 같다.
어떠한 사회든, 단체든 그것이 크든 작든 선과 악은 공존한다. 단지 이 사회는 '악'을 발설해도 되는 것과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나뉠뿐이고 '선'은 적당히 걸러내어진 불편함일 뿐이다. 진실이 불편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건, 위선과 오만과 패악으로 뒤틀려버린 사회의 '발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선'이란 누군가가 '선'의 지반 자체를 흔들거나 알려하지 않는 이상 발각되어지지 않는다.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소멸을 해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이런것들을 구태여 발설하지 않거나 숨기지 않는데서 집중 할 필요가 있다. 때려 죽일만큼 나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착하게 구성되어진 소설이라는 것, 그것은 시인을 꿈 꾸는 두 번째 화자인 '선'의 역할을 맡은 영민의 시선이 소설에 닿으며 확실해진다. 소설에서의 '선'은 전직 씨름 선수였지만 이산의 어머니인 아내를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이산의 아버지와 이산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몸을 의탁해 온 실래씨 그리고 첫 번째 화자였던 이산이 '악'과 대조되는 대표적인 '선'이다. 또한, 비둘기가 들어서고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워지면서 손님 없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비둘기 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을 이끄는 영만의 부모가 그들이다. 대체로 영만은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인 실래씨에게 시선을 맞춘다. '사랑' 그것은 위대했다, 라고 말해도 무방할만큼 영만은 실래에게, 실래는 또 영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라는 것을 증명키라도 하듯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선'은 '악'에게 위협당하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선' 또한 '악'을 평정하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귀신에 홀린 듯, 극악스럽고 앙칼진 이산의 새엄마, 옥미희를 받아들였던 이산 아버지의 넋 나간 외로움과 공허가 불러 온 '선'의 포효, 그래 그것은 묵묵히 숨을 고르던 '선'의 발각이었다. 소설은, 영만의 어머니가 비둘기를 잡기 위해 만든 그물을 던지며 화자들의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꺼져라, 비둘기」라는 이 소설이, 아주 소설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악'은 떠나고 '선'은 남는다는 것이다. '필요 악'으로라도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악'은 다양한 형태로 '선'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잘 지키고 있음이 사실이다. '선'과 '악'의 공존, 그것은 불변이자 진리이며 명백한 사실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드러내놓고 비판하거나 소설과 엮어 대립이라도 시켜보면 좋으련만 지식이 빈약해 더 깊이 들어서지는 못하지만, 소설은 소설다웠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바라고 희망하는 소박하고 단아한 유토피아- 그래, 나는 그저 이 소설만큼이면 충분 할 것 같다. 영롱하게 빛나던 영만의 사랑처럼, 애틋함에 타오르는 사랑을 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어 나에게 주어진 적절한 삶의 속도로 걸어가고 싶다. 다만, 그것이 한 낮의 꿈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