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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어떤 말이든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묘하다. 몽환적인 미소를 본 것처럼 설명하기 애매한 여운이 손끝에 맴돈다.
표현의 폭이 다양한 소설이다. 15층 건물 벽을 올라가는가 하면, 입에서 꽃이나 벌레가 튀어나오고, 그림 속으로 엄마가 들어간다. 몸을 녹일 만큼 지독한 산성비가 내리고, 괴상한 생명체가 집안에 말없이 앉아있기도 하며, 덩굴식물로 변해버린 사람이 건물 벽을 감싼다. 잠자리에 무릎을 베고 누운 손주에게 토닥토닥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듯 전달 방식이 독특하다.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다음 작품이 궁금해질 만큼.
얼마 전에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밝히는 뉴스 기사가 나왔다. 스프에 토마토가 합쳐진 퓨전 요리 이름 같은 느낌을 주는, 아직도 발음이 생소한 ‘스푸마토’. 윤곽선을 번지듯이 그려서 연기에 싸인 것처럼 경계를 애매하게 하는 미술 기법이라는. 다빈치는 입 주위를 30번 이상 덧칠을 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정면에서 봤을 때는 입술 모양이 아래로 처지게 보이나 입술 이외의 다른 곳을 볼 때는 미소를 짓는 것처럼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유명하다는 그 미소가 도무지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여야만 해, 보여야만 해’ 자기 암시를 걸며 책에 실린 그림을 바라보면 이 인간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고. 몇 번을 그렇게 바라보다 결론을 내린다. 저런 희한한 무표정이 15세기 미소의 정의였으리라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모나리자>를 떠올렸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기본적으로 허구가 바탕이 되는 소설이지만, 담겨있는 내용은 지극히 다큐적이고, 신화적인 독특한 구성이 감싸고 있는 내용이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듯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던 거다.
소설집을 접할 때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생각한다. 일곱 개의 별을 여행하면서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들처럼, 소설집 안에 실린 다양한 소설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 삶에 투영해보고, 제본으로 연결되어있는 책처럼 소설들을 이어붙일 수 있는 하나의 주제어를 나만의 시각에서 정해보기도 한다.
삶이란 참 무겁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이야기를 한 꺼풀 걷어내고 바라보는 현실은 너무나 선명하다.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너무나 쉽게 했고, 종종 재단에까지 이르렀다.’(p11~12)
주인공 하이가 몸이 당겨지는 방향을 거슬러서까지 기를 쓰고 오르려 했던 대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파트 벽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아니었을까.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는 ‘이것’으로 보이던 게 실은 ‘저것’이었음을 알게 되지. 반대로 ‘저것’으로 보이는 게 실은 코앞에 닥친 ‘이것’일지도 모른다는.’(p27)
‘충분히 조심만 하면 대상과의 올바른 거리를 가늠하여 가장 바람직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으며.’(p28)
이 문장들을 읽으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의 영역은 이쯤이면 되겠다 싶으면 그게 아닌 경우가 다반사다. 얼마만큼 손을 뻗어야 정확히 닿을지, 어디를 향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바람직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매순간 노력을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속죄양을 뜻한다는 『파르마코스』. <콩쥐, 팥쥐>나 <신데렐라>가 연상되는 우화적인 이 소설은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마녀사냥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벌레들을 토해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루’. 희생양이 된 그녀는 결국 마을을 물속에 잠기게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게 정말로 물 자체였는지, 물 너머로 비치는 미워할 만한 누군가인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p68)
보석과 꽃을 입에서 토해내는 ‘수’를 데려간 의원은 더 많은 보석을 얻기 위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그녀의 배를 가른다.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인간의 속성. 이따금 뉴스에서 비춰지는 모습을 보면 현실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돈을 향한 어떤 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힘든 순간이 오면 마법처럼 어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관통』은 이루어지지 못해 그림처럼 박제되어버린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p94)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남루한 세계, 거기에 수만 분의 하나만큼 생물학적 온기와 진동을 보탤 뿐인 자기 자신. 언제고 일상에의 대항과 반항이란 이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시켜주는.’(p95~96)
유모차에 두고 온 아이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그림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거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릿하다.
앞집 사람들과 친밀감 있는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직장 때문에 마주치는 시간대가 다르다는 소심한 핑계를 대보지만 마음 한 구석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이창』은 저마다 마음 안에 있는 창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을 통해 타인의 모습을 보지만 결코 다가가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동정은 시간과 비용 낭비에 불과하고 정의라곤 깨금발로 서 있을 자리조차 잃은 때 나는 보기 드문 오지라퍼일지 모른다.’(p103~104) 아동 학대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칭 오지라퍼.
그녀를 향해 ‘혼자 깨어 있는 척 치열한 척하지 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까.’(p124)라 말하는 남편은 주변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겨울철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며.
우산에 구멍이 뚫리고 사람의 몸이 녹아버릴 정도의 산성비라니. 『식우』의 내용을 접한 순간,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휴!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쉬었더랬다. 하지만 며칠 후 인터넷에서 중국 텐진의 폭발 사고 기사를 본 순간, 이 소설이 오버랩 되었다. 빗물과 반응하면 신경성 독가스를 발생시킨다는 시안화나트륨. 소름이 돋았다. 소설 속 이야기도 가능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저 내가 아니면 너도 안 되기 때문이다.’(p164)
TV프로그램에서 우스갯소리로 등장하는 ‘나만 아니면 돼!’처럼 삭막한 느낌을 주는 말이다. 표현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 G시는 국가의 중심이었고 G가 곧 국가였으며 국가가 G였다. (중략)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O의 사람들이었다.’(p171)
오리들의 전염병이 돌았을 때 O시의 사람들을 대했던 정부의 태도와 식우를 피해 이동해온 G시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대조적이다. 강자의 편에 서는 권력의 이면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 날 방 안에 『이물』이 등장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인데, (중략)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p210)
여비서나 사회복지사로서 살아가면서 주변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삶의 모습은 점점 칙칙해져가는 무채색을 닮아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덩굴 식물로 변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다.
‘당신은 들리지 않아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척할 뿐입니까?’(p217~218)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 만은 합니다.’(p238)
먹을 것을 몰래 먹다 들킨 것처럼 순간적으로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던 문장이다.
‘단지 사람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리로 손을 들어 올리는’(p240) U의 모습에서는 <여기, 사람이 있다>와 함께 용산이 떠올랐다.
‘그들이 건네고 싶어 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 같다.’(p240)
곳곳에 있는 문장들이 마음 한가운데로 쏟아졌다.
소설 『표류』에서는 인생을 표류로 정의한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표류죠. 스스로 항로를 개척해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항구에 닿아 닻을 내리는 것! 그게 인생인 거죠.’(p144, 김해원 소설집 『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사계절, 2015)
『표류』에서 희망과 의지가 묻어나왔다면,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절망적인 주인공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p270)
푸념하듯 넋두리하는 주인공의 말 속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똑같은 그림이라도 감상하는 이에 따라 느낌과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별점 5점과 4점 사이에서 갈등한다. 뭔가 모자라거나 부실한 것이 아니라 TV 프로그램<복면가왕>에서 패널들이 자주 말하듯이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가래떡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숨이 차기 때문에, 별 하나를 슬그머니 내려 본다.
8편의 소설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소설집의 제목에서 나는 공통적으로 ‘건조한 이물질’을 보았다. 사람들로부터 제외되는 삶 안에서. 이들 사이에서도 또 다시 일어나고 있는 균열을 통해. 그것은 겉표지에 그어진 틈처럼 선명했고 갈라진 논바닥처럼 푸석푸석했다.
<모나리자>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던 이 책은, 일주일 동안 손 안에 머물렀고, 다시 일주일을 머릿속에서 맴돌더니, 느낌을 적어보는 마음 끝자락으로 내려와서는 아픈 그림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