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고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심스럽다. 개미 한마리라도 밟을까 살펴 걷는 수행자가 된 기분이다. 도시가 들썩이며 숨을 쉬는 것 같다. 요가라도 하듯 덩달아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다. 『꽃심 전주』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이다.
204페이지밖에 안 되는 책을 읽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왠지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글자 한 자, 사진 한 장까지 꼼꼼히 훑으며 ‘전주’라는 도시를 알아갔다.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착각이었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면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낯설고도 강한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전주는 양파 같은 도시였다.
전주시 홈페이지에서 e-book을 다운받아 출력했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읽고 싶어서였다. 책 제목의 ‘꽃심’은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을 의미한다. 처음에 보기에는 단지 멋진 신조어에 불과했지만 진정한 의미는 책장이 넘어가면서 서서히 피어났다. 전주정신은 이 책을 매개로 깊은 맛을 냈다. 꽃차에 띄운 꽃인 듯 사르르 살아나다 설렁탕 국물처럼 점점 진하게 우러나더니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를 압도했다.
전라북도 행정.교육.문화의 중심지. 수학여행 가서 비빔밥 한 번 먹어보고, 한옥 마을 휘리릭 다녀온 게 전부이던 내게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던 모습은 바다 위로 드러난 빙산의 꼭대기보다도 적었다. 담백한 두부처럼 전주의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한 글을 따라갔다. 마음은 덩달아 '전주'라는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더불어 함께 사는 ‘대동’, 문화예술을 아끼고 즐기는 ‘풍류’, 의로움과 바름을 지키는 ‘올곧음’,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만드는 ‘창신’. 꽃심이 담고 있는 네 가지 특질은 전주의 구석구석에서 구현된다.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은 같은 마음으로 화합하는 대동의 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동학농민혁명, 민주화 열사들, 천주교 순교자들, 촛불의 꿈은 대동 세상을 향한다. 판소리, 전주대사습놀이, 태극선, 합죽선, 한지, 완판본은 멋과 여유를 지닌 책 풍류의 정신으로 춤을 춘다. 『조선왕조실록』을 끝까지 지켜낸 전주사고, 임란과 호란의 영웅들, 일제강점기에서 자존심을 지킨 한옥과 항일 투쟁은 올바른 뜻을 가지고 의로움을 향하는 올곧음이다. 후백제와 조선 왕조가 이어지는 왕도의 역사, 음식과 풍류와 영화에 불어넣은 새로운 숨결이 창신이다.
우리의 것이 많이 담긴 도시라는 점이 정겹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옛 것과 새 것이 어우러지는 적절한 조화로움은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온전한 고을’을 뜻하는 지명대로 전주는 완전히 균형 잡힌 도시이다.
내용면에서 인상적이던 부분은 관련 인물과 역사적 장소에 대한 섬세한 서술이었다. 사상가, 목회자, 교육자, 성자, 명창, 서예가, 유학자, 춤꾼, 문학인, 영웅, 투사, 선비, 법조인, 영화인, 화가, 명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터전을 잡으면서 전주의 역사를 만들었다. 구석구석 이들의 존재를 찾아낸 노력은 감동적인 또 하나의 역사로 펼쳐진다.
여행 관련 TV프로그램에서 유럽의 궁전이나 예전 모습이 남아있는 건물을 보고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을 생각할 때면 용인 민속촌을 떠올렸다. 책을 읽고 놀랐다. 전주는 우리 고유의 건물과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장소들을 생각 이상으로 많이 품고 있었다. 이제는 전주한옥마을을 제일 먼저 꼽으려한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보아도 결코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멋스럽기까지 하다.
장독집, 우물 깊은 집, 문이 많은 집 등 집의 이름에도 정감이 듬뿍 묻어난다. 과학계에서는 흔히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단위를 정한다. 전압의 단위인 V(볼트)나 힘의 단위인 N(뉴턴)은 모두 과학자의 이름을 뜻하는 맨 앞 글자이다. 단위의 형태로 자주 부르며 이들의 업적을 기리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견훤로, 태조로, 최명희길 등 길에 붙은 이름을 보면서 전주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조만간 한옥마을을 가보려 한다. 한복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겉에서 본 한국적인 건축물, 길거리에 늘어선 먹거리, 이번에는 이것만 보고 오지는 않으리라. 전주를 거쳐 간 인물들의 발자취와 우리의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며칠간을 머물게 될 지도 모르겠다.
담고 있는 내용만큼이나 구성 방식도 감동적이다. 전체적으로는 시의 운율처럼 느껴지는 형식이다. ‘꽃심’이 의미하는 네 가지 특질을 대등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적절하다. 맛깔난 전주비빔밥을 먹은 듯하다. 나물 본연의 맛이 독특하게 살아나면서도 잘 어우러지듯이 ‘대동, 풍류, 올곧음, 창신’은 책 안에서 고유한 빛을 발한다. ‘꽃심’을 중심으로 정성스럽게 입혀진 옷에는 전주만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중간 중간에 시처럼 삽입된 문구들은 소금처럼 녹아들어 문학적인 맛을 낸다.
특히 시선을 끈 부분은 소주제의 첫 페이지이다. 두 가지가 마음에 든다. 첫째, 단어 연상 퀴즈처럼 관련된 낱말들로 그려진 그림이다. ‘꽃심’에는 꽃 한 송이가, ‘대동’에는 촛불 두 개가, ‘풍류’에는 부채를 들고 판소리 하는 명창이, ‘올곧음’에는 선비의 모습이, ‘창신’에는 호남제일문이 형상화되었다. 이로 인해 그 안에 담긴 단어들의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둘째, ‘전주 중학생들’이 떠올린 낱말을 적었다는 점이다. 10대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과도기를 지나는 중학생들. 아이들의 꿈틀대는 마음은 전주의 정신과 만나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다음 페이지도 좋았다. 다양한 세대와 각계 각 층의 전주 사람들이 연상한 단어들이 마인드맵처럼 나열되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민들레를 연상시켰다. 꽃의 마음에서 출발해서일까. 연약해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하나의 중심을 향해 힘을 합치는, 바람을 따라 날아가며 온 공간을 가볍게 메우는 홀씨가 생각났다. 나열된 단어들을 하나하나 실로 꿰면서 전주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글을 쓴 사람이 궁금했다. 맨 뒤에 적힌 저자 이름 ‘최기우’를 검색했다. 극작가이면서 전주대 겸임 교수이다. 올해 8월 31일 자 전북일보 기사 한 자락에도 작가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2017 대한민국 독서대전 기획 전시의 일환이던 ‘한 권의 책, 마음에 담다’의 총괄기획자였다. 전주한옥마을에는 볼거리가 많은 다양한 체험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한 권의 책으로만 감히 짐작해보건대, 작가는 전주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전주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고서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문장마다 전주를 아끼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었으니까.
묘하다. 소설도, 시도 아닌 책이 이런 뭉클함을 주게 될 줄이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한 수제 퀼트 가방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도시가 아닌 ‘전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한편을 읽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문 공기는 거대한 기단을 형성하면서 그 지역의 온도와 습도를 닮는다. 전주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몸과 마음에는 모르는 사이 전주가 뿜어내는 숨결과 향기가 배어있을 것이다. 책 속의 전주는 전주사람들을 푸근하게 감싸는 꽃이었다. 사람들 역시 ‘꽃심’ 자체였다. 문득 ‘거시기’란 말이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책을 읽은 내게도 참 거시기하게 ‘꽃심’이 흘러들어왔을까.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자신을 딛고 서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길은 다 안다. 엉거주춤 인지 제자리걸음인지 뒷걸음인지도 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주위 환경이 바뀌어도 길은 아득하게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길을 걸으면 옛 정신이 스며든다. 우리가 걸음걸음을 더 똑바로 해야 하는 이유다.(p178)’사진을 설명하는 작은 글씨로 된 이 문장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았다. 읽는 순간 뭉클했다. 소중히 옮겨 적어 사무실 책꽂이 앞에 붙여놓았다. 두고두고 바라보며 음미하고 싶었다.
전주의 구석구석을 알고 나니,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도시명의 유래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얼과 정신이 무언지, 어떤 이들이 이 땅을 밟으면서 살아왔는지, 이곳을 거쳐 간 피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기에 귀 기울이며 제대로 걷고 싶어졌다. 천천히 숨을 쉬며 걷는다. 한 걸음, 툭, 두 걸음, 툭. 길이 내 발바닥을 툭툭 치며 말을 건다. 이봐! 내가 궁금하지 않나? 함께 걸어가려는 내게 도시의 숨결이 조금씩 스며든다.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 2017. 9. K 독후감 경진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