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빈손과 위험한 기생충 연구소 노빈손이 알려 주는 전문가의 세계 1
서민 지음, 이우일 그림 / 뜨인돌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문지를 바닥에 펼쳤다.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저녁도 잔뜩 먹었으니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힘을 모은다. 1차 시기, 실패다. ! 좀 더 집중해서 다시! 역시 실패다. 식은땀이 흐른다. 중력 방향으로 배를 문지르며 간절히 주문을 왼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나마 저밖에 없단 말이예요. 나무아미타불!’순간 뱃속을 내려가는 묵직한 느낌. 올레~ 미션 클리어! 콧등에 송송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쓰윽 닦고, 섬세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다. 왼손으로는 비닐봉투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벌리고, 오른손으로는 정교하게 한 점 찍어 주변에 묻지 않도록 집어넣는 기술이다. 마침 배탈이 나 고체 상태의 그것을 확보할 수 없었던 언니, 변비 때문에 도무지 작은 덩어리로의 해체가 어려웠던 동생 것까지 무사히 성공했다. 그렇게 변까지 나눈 우애는 끈끈하게 지속되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 부르는 사람은 나와서 약 먹으세요.’얼마 후 학교에서 구충제를 먹게 된 나는 집에 돌아와서 언니와 동생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지!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조금만 나눠달랄 때는 언제고!’변 한 번 나눴다가 변변한 소리도 못 들었다. 이 책의 에필로그 뒤에 나온 채변봉투 사진(p189)을 보니 예전 생각이 스물 스물 났다. 당시 기생충 이름이라고는 회충밖에 몰랐던 나는 괜히 회충을 원망했는데, 가끔 항문이 가려워서 긁었던 기억으로 유추해 보건데, 서민 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건 요충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눈 화장을 한 여자를 보면 나는 회충을 떠올리곤 했다. 그 생각은 순전히 중학교 때 들었던 괴담 비슷한 이야기에서 기인한 건데, 미술 재료로 신문지를 가져왔을 때였다. 전면 광고로 나온 여자 사진을 보고 어떤 친구가 그러는 거다.

“얘들아! 어떤 사람이 눈이 계속 꺼끌거리고 쌍꺼풀이 짙어졌는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눈꺼풀 사이로 뭔가 희미한 실 같은 것이 나와 있더래. 그래서 그걸 잡아당겼더니 30cm 정도의 회충이 쭈욱 나왔단다!”꺄악! 주변에 있던 우리는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쳤고, 한동안 등하교 길에서 눈 화장한 여자를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설명으로 판단한다면 회충이 아니라 눈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동양안충(p164)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통-치통-생리통세트처럼 흔히기생충하면 회충-편충-십이지장충세트로 불리는 바람에 선두에 선 회충이 억울한 오해의 화살을 맞았던 거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연상되었다. 보통 재미있는 책은 내용이 헐렁하고, 지식이 많은 책은 설명문처럼 지루하기 마련이건만, 치밀한 구성은 영화처럼 이미지화되어 박진감 넘치게 그려졌다. 무심코 읽다 빵 터지는 유머는 덤이었다. 길이로 보았을 때 기생충도 결코 공룡의 스케일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파라지 파크>로 영화화되어도 재미있겠다 싶다.

깨알같이 소개된 박사님의 멘트는 어린이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생충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에 광절열두조충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에는 지어낸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박사님의 멘트를 읽고 실존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몇 번에 걸친 인터넷 검색 끝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많구나, 기생충이! 연가시, 편충, 십이지장충, 디스토마 등 어렴풋이 들어본 기생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었고, 몰랐던 기생충까지 알고 나니 상식의 세계가 넓어진 듯 뿌듯함이 일었다. 책 내용이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공간적 배경인 홍합도까지 검색해 보았다는 건, ! 비밀이다.

 

한 땀 한 땀 이태리 장인이 떴다는 현빈의 츄리닝을 보는 것처럼, 기생충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의 애정이 느껴졌다. 멧돼지의 기생충을 연구하기 위해 120여 마리의 근육을 일일이 현미경으로 검사했다는 일화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열정을 느끼게 했다. 나도 무언가에 저런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애정을 가지고 공부하면 저토록 쉽게 설명도 할 수 있을까. 부럽기도 하고 나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생충에 대한 편견이 깨져 버렸다. 생존을 위해 제각각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남아 온 그들의 삶은 놀라움을 넘어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생충 때문에 감동받는 순간이 올 줄이야! 가장 바뀌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생각이라지만, 바뀌기 쉬운 것도 생각이었다. 다만 그 계기가 99를 넘어가는 강렬함이라면, 발화점에 도달한 듯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번 추석에 친정 식구들 모였을 때, ‘그 때 걔가 회충이 아니었어~’라며 듬뿍 얻게 된 나의 지식을 뽐낼 수 있었을 것을. 더불어 채변봉투에 대한 추억도 나누었을 텐데. 밥상머리에서 얘기하기에는 좀 거시기한가? , 기생충에 대한 애정이 좀 더 필요하다. <서민의 기생충열전>으로 충전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작은 밋밋했다. 줄어드는 핸드폰 배터리인양 여름 끝자락으로부터 가을을 향해 가는 마음이 점점 가라앉던 시기였다. 간신히 이 책의 글자를 매달고 느린 시간을 걸었다. 낙엽처럼 바삭거리던 마음이 점점 따뜻해졌고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는 코끝이 찡해졌다.

누군가 돌아가셨다거나 말기 암에 걸렸다더라는 소식을 자주 접했던 9월이었다.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아 간단한 글조차 끄적일 수 없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아님 계절이나 중년을 지나고 있는 나이 탓인지도 몰랐다.

책이란 참 묘한 존재다. 그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되어있는 무생물인걸, 종종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으니. 따뜻한 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식어가는 마음을 데우는 듯한 느낌이랄까.

 

 

흥미로운 통계가 첫 화면에 떠있었다. 오랜만에 접속해본 SNS. 내가 올렸던 글과 사진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words...‘사람, 마음, 시간, 생각, 그대’. 이런 단어를 주로 썼던가. 살짝 전율이 일었다. 어쩌면 이리 마음이 가는 단어들만 찾아냈는지. 나도 모르게 내가 읽히고 있었다.

수많은 데이터를 토대로 숨겨진 패턴을 발견하고 새로운 정보를 알아낸다는 빅데이터 마이닝이란 게 있다고 한다. 데이터가 세상을 읽는 시대가 되었다. 질병의 확산 시나리오를 쓰고, 태풍의 경로를 예측하고, 이제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읽히는 세상이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마음에 와 닿던 문장을 정리해보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소설가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진짜 주제는 삶이다.’(p86)

너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느냐고’(p97)

살아가는 것에 정답이란 없다. 인생은 언제까지나 진행형일 뿐이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빛나는 가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p113)

사람의 인생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작은 별빛으로 가득한 캄캄한 밤하늘이다’(p128)

그들의 인생은 모두 정답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답이라기보다도, 이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떤 사람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p219)

서로 다른 23편의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제각각일 텐데, 내가 그은 밑줄에 가장 많이 올라온 단어는 인생이었다. 마음 한 구석,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을 심어두면서도 눈은 삶을 좇고 있었던 거다.

 

어떤 문장은 나를 토닥이며 강해져야함을 말해주기도 했다.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서 있는 발아래, 거친 땅바닥을 파헤치고 그곳에 나무를 세울 수 있는 작은 용기와 결단이다.’(p81)

선택은 곧 행동이다.’(p187)

선하다는 건 자신의 자아와 조화를 이룰 때 가치가 있다’(p201)

그래서 따뜻했다. 표지에 나와 있는 글처럼, ‘천천히 소리 내어 당신과 함께 읽고 싶다는 문장을 따라 3주에 걸쳐 느리게 읽었던 내내. 가끔은 한 호흡 크게 내쉬고, 글쓴이의 이야기도 들어가며, 그가 해석한 소설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기도 하며 산책하듯 책을 읽었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헤밍웨이가 썼다는 여섯 단어로 된 소설이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안 신었음)(p73)

이 짧은 문장에서는 음미할수록 깊고도 슬픈 이야기가 우러나왔다.

학창시절 억지로 읽었던 책 <노인과 바다>. 그의 일화가 얽힌 문장 하나로 새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결국 어르신은 내일 택배로 도착하게 되었다.

첫 문장으로 문학 작품에 접근한 저자의 시각도 신선했다. 평소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신경을 쓰는 편이긴 하지만, 이 리뷰는 특히 첫 문장을 쓸 때 좀 더 고민을 했다. 결과물이 썩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카페에 앉아 무심코 흘려들었던 노래 가사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들렸다.

도대체 인생이란 놈은 대체 뭔데 뭐길래/ 얼마나 만만찮은 거길래/ 왜 늘 헉헉대게 하나

대체 세상이란 놈은 뭔데 뭐길래/ 왜 매번 뒤통수만 치는 건지

매일 사는 게 참 팍팍하고/ 모진 현실 앞에 막막할 땐

눈감고 그려봐요/ 야자수 그늘아래/ 보석 빛 푸른 물결/달콤한 칵테일

다 함께 저 바다로 가요/ 탁 트인 해변으로 가요/ 열심히 수고한 그대여 오늘을 누려봐요/ 신나는 여름이잖아요/ 지친 마음 멀리 던져버리고/ 우리 지금 함께 떠나요

I say 라라라라라 오 라라라라라

대체 행복이란 놈은 뭔데 뭐길래/ 왜 나만 비껴가고 있는 건지

같은 하루하루 갑갑하고/ 왠지 가슴속이 답답할 땐

눈 감고 들어봐요/ 숲 속의 바람소리/ 초록빛 나무 사이/ 별들의 속삭임

다 함께 저 산으로 가요/ 시원한 계곡으로 가요/열심히 수고한 그대여 오늘을 누려봐요/ 신나는 여름이잖아요/ 지친 마음 멀리 던져버리고/ 우리 지금 함께 떠나요

그대여 어디로든 가요/ 원하는 그곳으로 가요/ 열심히 수고한 그대여 오늘을 누려봐요/ 신나는 여름이잖아요/ 지친 마음 멀리 던져버리고/ 우리 지금 함께 떠나요

I say 라라라라라 오 라라라라라

지금껏 잘 견딘 그대/ 오늘도 사느라 애쓴 그대/ 떠나요’... 2BiC<여름이잖아요>

 

 

이미 읽은 한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책을 소개해주는 책은 이런 점에서 매력적이다. , 읽을 때의 기분에 따라 마음으로 들어오는 문장들이 달라진다는 점도.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다른 문장들이 나를 두드리게 될 것이다.

아직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여름은 아니지만, 마지막 문장에 울컥했던 순간, 마음속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 속의 나를 용서하고 부둥켜 안아주는 일, 나는 그것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믿는다.’(p369)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냥 눈에 띄었다..

p77, 인용문, 내가 할 수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p80, 더 컬러 퍼플에 각주2 표시 없음

p220, 태양계 8개 행성 외에 발견된 외계 행성은 많아야 2,000개 정도라 들은 것 같은데, 2,817번째라는 것이 혹시 소행성아닐까? 소행성의 이름은 발견자가 부여하는 경우가 많으니...

p260, 인용문, 마날 수 만날 수

p295, 인용문, 맨 앞 따옴표 빠졌음

p324, 각주번호 05 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59.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제 1분만 버티면 된다.

충전하던 2G폰을 켰다. 메뉴-5번 버튼-1-4. ‘주인님! 반가워요~’ 뛰쳐나온 개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든다. 오늘의 행운은 깊은 생각과 사고가 필요한 때입니다.’ ~ 지금 고민하는 일은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주변 상황에 행운의 말을 대입해본다. 0시를 넘겨 요즘 반복하는 일. 스마트폰으로 바꾼 이후에도 쓰던 2G폰을 가끔씩 충전하며 끊임없이 되살리는 이유이다. 이게 은근히 궁금하고 기대되는 게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는 거다. 어차피 취침 시간도 대부분 0시 이후이니까. 처음에는 장난삼아, 신기하게 맞아 들어간 어느 날은 감탄하며, 이제는 피곤한 날에도 기다리게 된 시간. 짤막한 운세를 보는 것은 그렇게 나만의 특별한 패턴이 되었다.

‘2015910. 빨래, 빨래접기, 아침, 토마토, 키위, 설거지, 미니 마중, 군만두, 슈퍼, 알라딘 주문, 메일, 응장군 톡,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 밤선비님 20ㅠㅠ’. 이불 속에 엎드려 미니 다이어리에 하루의 흔적을 기록했다. 가끔 내가 적고서도 이건 뭥미?’ 그날 그 자리에 그 단어가 적혀있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대학 다닐 때 잠시 썼던 일기 형식을 올해부터 부활시켰다.

? 이 사람도 이렇게 기록을 하는구나! ‘수상 소감에 반해 주문한 책은 단어로 된 목차에서 친숙한 공감대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모든 장마다 소제목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세 도막의 이야기. 전체 분량의 1/3 지점에서 담배를 읽다가 구성이 빚어내는 패턴을 깨닫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커다란 자루가 픽 쓰러져있었다. 옆구리 터진 만두 속처럼 뒹구는 화장지 몇 뭉치. 화장실 앞 복도를 지나칠 때였다. 안쪽에서 청소하시는 분이 처리하시겠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가던 길을 갔다. 순간 누군가 쓰러진 봉지를 일으켜 세웠다. 아까 지각했다고 혼냈던 아이다.

!!! 보통 때였으면 참 착한 아이로군!’ 하며 상점이라도 줄까 고민했을 터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상황이 한 아이의 행동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을 때,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 봉지도 일으켜 세우는 마음인데 쓰러진 사람을 본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불현듯 궁금해졌다.

달라졌다. 좀 더 확장되고 깊어졌다. 상황을 바라볼 때마다 불쑥불쑥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란 제목의 일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다양한 주어와 서술어로 변용되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당신이 삶을 기억하는 방식은? 당신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은? 당신이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당신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당신이, 당신이……?

 

그믐이다. 그믐에 그믐,…』 리뷰를 마무리하네. 패턴과 제목을 생각하니 그냥 웃겼다. 그믐달의 오른편처럼 가려진, 책 표지의 사람을 보았다. 윗부분이 궁금했고, 아랫부분은 왠지 찡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날 것 그대로의 사람과 삶을 생각했다.

초승과 그믐은 하늘에 나타나는 달과 태양의 순서 차이이다. 보고 싶은 달을 보려면 아침이냐, 저녁이냐, 동쪽이냐, 서쪽이냐 선택을 하면 된다. 하루가 불연속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채워지듯이 이 책의 서술 방식처럼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보고 싶은 세상에 대한 선택인거다. 저자가 묘사했던 세상이란 의미로 다가왔다.

남자, 여자, 아주머니, 죽음, 학교 폭력, 감옥, . 생선살을 발라내듯 내용을 걷어보았다. 두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패턴으로 반복되는 세상을 어떤 빛깔로 바라보느냐는 선택의 문제였다.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하는 틀을 쥐게 된 느낌이 들었고, 안쪽을 바라보느냐 바깥쪽을 바라보느냐 세상을 바라보는 틀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확장할 것인가는 온전한 선택의 몫으로 마음에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착, 그리고 내가 기대평을 쓰는 방식> 제가 100자평을 쓰는 첫번째 이유는 `추천도서증정`인 것이 맞습니다. 수상작인건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진솔한 수상소감에 반했습니다. 그래서,궁금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추천도서는 어떨까 하구요. 이젠 글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려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말이든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묘하다. 몽환적인 미소를 본 것처럼 설명하기 애매한 여운이 손끝에 맴돈다.

표현의 폭이 다양한 소설이다. 15층 건물 벽을 올라가는가 하면, 입에서 꽃이나 벌레가 튀어나오고, 그림 속으로 엄마가 들어간다. 몸을 녹일 만큼 지독한 산성비가 내리고, 괴상한 생명체가 집안에 말없이 앉아있기도 하며, 덩굴식물로 변해버린 사람이 건물 벽을 감싼다. 잠자리에 무릎을 베고 누운 손주에게 토닥토닥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듯 전달 방식이 독특하다.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다음 작품이 궁금해질 만큼.

 

 

얼마 전에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밝히는 뉴스 기사가 나왔다. 스프에 토마토가 합쳐진 퓨전 요리 이름 같은 느낌을 주는, 아직도 발음이 생소한 스푸마토’. 윤곽선을 번지듯이 그려서 연기에 싸인 것처럼 경계를 애매하게 하는 미술 기법이라는. 다빈치는 입 주위를 30번 이상 덧칠을 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정면에서 봤을 때는 입술 모양이 아래로 처지게 보이나 입술 이외의 다른 곳을 볼 때는 미소를 짓는 것처럼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유명하다는 그 미소가 도무지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여야만 해, 보여야만 해자기 암시를 걸며 책에 실린 그림을 바라보면 이 인간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고. 몇 번을 그렇게 바라보다 결론을 내린다. 저런 희한한 무표정이 15세기 미소의 정의였으리라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모나리자>를 떠올렸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기본적으로 허구가 바탕이 되는 소설이지만, 담겨있는 내용은 지극히 다큐적이고, 신화적인 독특한 구성이 감싸고 있는 내용이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듯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던 거다.

 

소설집을 접할 때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생각한다. 일곱 개의 별을 여행하면서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들처럼, 소설집 안에 실린 다양한 소설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 삶에 투영해보고, 제본으로 연결되어있는 책처럼 소설들을 이어붙일 수 있는 하나의 주제어를 나만의 시각에서 정해보기도 한다.

 

삶이란 참 무겁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이야기를 한 꺼풀 걷어내고 바라보는 현실은 너무나 선명하다.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너무나 쉽게 했고, 종종 재단에까지 이르렀다.’(p11~12)

주인공 하이가 몸이 당겨지는 방향을 거슬러서까지 기를 쓰고 오르려 했던 대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파트 벽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아니었을까.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는 이것으로 보이던 게 실은 저것이었음을 알게 되지. 반대로 저것으로 보이는 게 실은 코앞에 닥친 이것일지도 모른다는.’(p27)

충분히 조심만 하면 대상과의 올바른 거리를 가늠하여 가장 바람직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으며.’(p28)

이 문장들을 읽으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의 영역은 이쯤이면 되겠다 싶으면 그게 아닌 경우가 다반사다. 얼마만큼 손을 뻗어야 정확히 닿을지, 어디를 향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바람직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매순간 노력을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속죄양을 뜻한다는 파르마코스. <콩쥐, 팥쥐><신데렐라>가 연상되는 우화적인 이 소설은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마녀사냥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벌레들을 토해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 희생양이 된 그녀는 결국 마을을 물속에 잠기게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게 정말로 물 자체였는지, 물 너머로 비치는 미워할 만한 누군가인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p68)

보석과 꽃을 입에서 토해내는 를 데려간 의원은 더 많은 보석을 얻기 위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그녀의 배를 가른다.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인간의 속성. 이따금 뉴스에서 비춰지는 모습을 보면 현실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돈을 향한 어떤 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힘든 순간이 오면 마법처럼 어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관통은 이루어지지 못해 그림처럼 박제되어버린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p94)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남루한 세계, 거기에 수만 분의 하나만큼 생물학적 온기와 진동을 보탤 뿐인 자기 자신. 언제고 일상에의 대항과 반항이란 이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시켜주는.’(p95~96)

유모차에 두고 온 아이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그림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거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릿하다.

 

앞집 사람들과 친밀감 있는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직장 때문에 마주치는 시간대가 다르다는 소심한 핑계를 대보지만 마음 한 구석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이창은 저마다 마음 안에 있는 창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을 통해 타인의 모습을 보지만 결코 다가가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동정은 시간과 비용 낭비에 불과하고 정의라곤 깨금발로 서 있을 자리조차 잃은 때 나는 보기 드문 오지라퍼일지 모른다.’(p103~104) 아동 학대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칭 오지라퍼.

그녀를 향해 혼자 깨어 있는 척 치열한 척하지 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까.’(p124)라 말하는 남편은 주변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겨울철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며.

 

우산에 구멍이 뚫리고 사람의 몸이 녹아버릴 정도의 산성비라니. 식우의 내용을 접한 순간,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쉬었더랬다. 하지만 며칠 후 인터넷에서 중국 텐진의 폭발 사고 기사를 본 순간, 이 소설이 오버랩 되었다. 빗물과 반응하면 신경성 독가스를 발생시킨다는 시안화나트륨. 소름이 돋았다. 소설 속 이야기도 가능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저 내가 아니면 너도 안 되기 때문이다.’(p164)

TV프로그램에서 우스갯소리로 등장하는 나만 아니면 돼!’처럼 삭막한 느낌을 주는 말이다. 표현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 G시는 국가의 중심이었고 G가 곧 국가였으며 국가가 G였다. (중략)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O의 사람들이었다.’(p171)

오리들의 전염병이 돌았을 때 O시의 사람들을 대했던 정부의 태도와 식우를 피해 이동해온 G시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대조적이다. 강자의 편에 서는 권력의 이면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 날 방 안에 이물이 등장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인데, (중략)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p210)

여비서나 사회복지사로서 살아가면서 주변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삶의 모습은 점점 칙칙해져가는 무채색을 닮아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덩굴 식물로 변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다.

당신은 들리지 않아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척할 뿐입니까?’(p217~218)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 만은 합니다.’(p238)

먹을 것을 몰래 먹다 들킨 것처럼 순간적으로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던 문장이다.

단지 사람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리로 손을 들어 올리는’(p240) U의 모습에서는 <여기, 사람이 있다>와 함께 용산이 떠올랐다.

그들이 건네고 싶어 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 같다.’(p240)

곳곳에 있는 문장들이 마음 한가운데로 쏟아졌다.

 

소설 표류에서는 인생을 표류로 정의한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표류죠. 스스로 항로를 개척해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항구에 닿아 닻을 내리는 것! 그게 인생인 거죠.’(p144, 김해원 소설집 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사계절, 2015)

표류에서 희망과 의지가 묻어나왔다면,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절망적인 주인공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p270)

푸념하듯 넋두리하는 주인공의 말 속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똑같은 그림이라도 감상하는 이에 따라 느낌과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별점 5점과 4점 사이에서 갈등한다. 뭔가 모자라거나 부실한 것이 아니라 TV 프로그램<복면가왕>에서 패널들이 자주 말하듯이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가래떡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숨이 차기 때문에, 별 하나를 슬그머니 내려 본다.

8편의 소설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소설집의 제목에서 나는 공통적으로 건조한 이물질을 보았다. 사람들로부터 제외되는 삶 안에서. 이들 사이에서도 또 다시 일어나고 있는 균열을 통해. 그것은 겉표지에 그어진 틈처럼 선명했고 갈라진 논바닥처럼 푸석푸석했다.

<모나리자>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던 이 책은, 일주일 동안 손 안에 머물렀고, 다시 일주일을 머릿속에서 맴돌더니, 느낌을 적어보는 마음 끝자락으로 내려와서는 아픈 그림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