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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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그리고 내가 기대평을 쓰는 방식> 제가 100자평을 쓰는 첫번째 이유는 `추천도서증정`인 것이 맞습니다. 수상작인건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진솔한 수상소감에 반했습니다. 그래서,궁금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추천도서는 어떨까 하구요. 이젠 글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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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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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이든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묘하다. 몽환적인 미소를 본 것처럼 설명하기 애매한 여운이 손끝에 맴돈다.

표현의 폭이 다양한 소설이다. 15층 건물 벽을 올라가는가 하면, 입에서 꽃이나 벌레가 튀어나오고, 그림 속으로 엄마가 들어간다. 몸을 녹일 만큼 지독한 산성비가 내리고, 괴상한 생명체가 집안에 말없이 앉아있기도 하며, 덩굴식물로 변해버린 사람이 건물 벽을 감싼다. 잠자리에 무릎을 베고 누운 손주에게 토닥토닥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듯 전달 방식이 독특하다.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다음 작품이 궁금해질 만큼.

 

 

얼마 전에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밝히는 뉴스 기사가 나왔다. 스프에 토마토가 합쳐진 퓨전 요리 이름 같은 느낌을 주는, 아직도 발음이 생소한 스푸마토’. 윤곽선을 번지듯이 그려서 연기에 싸인 것처럼 경계를 애매하게 하는 미술 기법이라는. 다빈치는 입 주위를 30번 이상 덧칠을 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정면에서 봤을 때는 입술 모양이 아래로 처지게 보이나 입술 이외의 다른 곳을 볼 때는 미소를 짓는 것처럼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유명하다는 그 미소가 도무지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여야만 해, 보여야만 해자기 암시를 걸며 책에 실린 그림을 바라보면 이 인간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고. 몇 번을 그렇게 바라보다 결론을 내린다. 저런 희한한 무표정이 15세기 미소의 정의였으리라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모나리자>를 떠올렸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기본적으로 허구가 바탕이 되는 소설이지만, 담겨있는 내용은 지극히 다큐적이고, 신화적인 독특한 구성이 감싸고 있는 내용이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듯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던 거다.

 

소설집을 접할 때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생각한다. 일곱 개의 별을 여행하면서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들처럼, 소설집 안에 실린 다양한 소설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 삶에 투영해보고, 제본으로 연결되어있는 책처럼 소설들을 이어붙일 수 있는 하나의 주제어를 나만의 시각에서 정해보기도 한다.

 

삶이란 참 무겁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이야기를 한 꺼풀 걷어내고 바라보는 현실은 너무나 선명하다.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너무나 쉽게 했고, 종종 재단에까지 이르렀다.’(p11~12)

주인공 하이가 몸이 당겨지는 방향을 거슬러서까지 기를 쓰고 오르려 했던 대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파트 벽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아니었을까.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는 이것으로 보이던 게 실은 저것이었음을 알게 되지. 반대로 저것으로 보이는 게 실은 코앞에 닥친 이것일지도 모른다는.’(p27)

충분히 조심만 하면 대상과의 올바른 거리를 가늠하여 가장 바람직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으며.’(p28)

이 문장들을 읽으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의 영역은 이쯤이면 되겠다 싶으면 그게 아닌 경우가 다반사다. 얼마만큼 손을 뻗어야 정확히 닿을지, 어디를 향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바람직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매순간 노력을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속죄양을 뜻한다는 파르마코스. <콩쥐, 팥쥐><신데렐라>가 연상되는 우화적인 이 소설은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마녀사냥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벌레들을 토해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 희생양이 된 그녀는 결국 마을을 물속에 잠기게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게 정말로 물 자체였는지, 물 너머로 비치는 미워할 만한 누군가인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p68)

보석과 꽃을 입에서 토해내는 를 데려간 의원은 더 많은 보석을 얻기 위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그녀의 배를 가른다.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인간의 속성. 이따금 뉴스에서 비춰지는 모습을 보면 현실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돈을 향한 어떤 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힘든 순간이 오면 마법처럼 어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관통은 이루어지지 못해 그림처럼 박제되어버린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p94)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남루한 세계, 거기에 수만 분의 하나만큼 생물학적 온기와 진동을 보탤 뿐인 자기 자신. 언제고 일상에의 대항과 반항이란 이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시켜주는.’(p95~96)

유모차에 두고 온 아이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그림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거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릿하다.

 

앞집 사람들과 친밀감 있는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직장 때문에 마주치는 시간대가 다르다는 소심한 핑계를 대보지만 마음 한 구석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이창은 저마다 마음 안에 있는 창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을 통해 타인의 모습을 보지만 결코 다가가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동정은 시간과 비용 낭비에 불과하고 정의라곤 깨금발로 서 있을 자리조차 잃은 때 나는 보기 드문 오지라퍼일지 모른다.’(p103~104) 아동 학대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칭 오지라퍼.

그녀를 향해 혼자 깨어 있는 척 치열한 척하지 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까.’(p124)라 말하는 남편은 주변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겨울철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며.

 

우산에 구멍이 뚫리고 사람의 몸이 녹아버릴 정도의 산성비라니. 식우의 내용을 접한 순간,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쉬었더랬다. 하지만 며칠 후 인터넷에서 중국 텐진의 폭발 사고 기사를 본 순간, 이 소설이 오버랩 되었다. 빗물과 반응하면 신경성 독가스를 발생시킨다는 시안화나트륨. 소름이 돋았다. 소설 속 이야기도 가능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저 내가 아니면 너도 안 되기 때문이다.’(p164)

TV프로그램에서 우스갯소리로 등장하는 나만 아니면 돼!’처럼 삭막한 느낌을 주는 말이다. 표현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 G시는 국가의 중심이었고 G가 곧 국가였으며 국가가 G였다. (중략)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O의 사람들이었다.’(p171)

오리들의 전염병이 돌았을 때 O시의 사람들을 대했던 정부의 태도와 식우를 피해 이동해온 G시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대조적이다. 강자의 편에 서는 권력의 이면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 날 방 안에 이물이 등장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인데, (중략)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p210)

여비서나 사회복지사로서 살아가면서 주변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삶의 모습은 점점 칙칙해져가는 무채색을 닮아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덩굴 식물로 변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다.

당신은 들리지 않아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척할 뿐입니까?’(p217~218)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 만은 합니다.’(p238)

먹을 것을 몰래 먹다 들킨 것처럼 순간적으로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던 문장이다.

단지 사람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리로 손을 들어 올리는’(p240) U의 모습에서는 <여기, 사람이 있다>와 함께 용산이 떠올랐다.

그들이 건네고 싶어 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 같다.’(p240)

곳곳에 있는 문장들이 마음 한가운데로 쏟아졌다.

 

소설 표류에서는 인생을 표류로 정의한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표류죠. 스스로 항로를 개척해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항구에 닿아 닻을 내리는 것! 그게 인생인 거죠.’(p144, 김해원 소설집 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사계절, 2015)

표류에서 희망과 의지가 묻어나왔다면,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절망적인 주인공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p270)

푸념하듯 넋두리하는 주인공의 말 속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똑같은 그림이라도 감상하는 이에 따라 느낌과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별점 5점과 4점 사이에서 갈등한다. 뭔가 모자라거나 부실한 것이 아니라 TV 프로그램<복면가왕>에서 패널들이 자주 말하듯이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가래떡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숨이 차기 때문에, 별 하나를 슬그머니 내려 본다.

8편의 소설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소설집의 제목에서 나는 공통적으로 건조한 이물질을 보았다. 사람들로부터 제외되는 삶 안에서. 이들 사이에서도 또 다시 일어나고 있는 균열을 통해. 그것은 겉표지에 그어진 틈처럼 선명했고 갈라진 논바닥처럼 푸석푸석했다.

<모나리자>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던 이 책은, 일주일 동안 손 안에 머물렀고, 다시 일주일을 머릿속에서 맴돌더니, 느낌을 적어보는 마음 끝자락으로 내려와서는 아픈 그림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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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달고 살아남기 - 제8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65
최영희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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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은 길을 떠나기에 적절한 나이’(책 뒷 표지, 정이현 소설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흔 일곱은 무엇을 하기에 적절한 나이일까. 아님 이미 무언가를 하기에 늦어버린 나이인 걸까. 열여덟 살 주인공 진아는 꽃을 달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는데,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선 나는 무엇을 달고 살아남을까.

 

책이란 참 묘하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청소년만 읽는 것도 아니고, 동화나 그림책이라고 어린이들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읽을 때마다 인상 깊게 들어오는 느낌이 달라지는 점이 매력적이다.

초등학교 때 생텍쥐페리의어린 왕자가 나에게 남긴 것은 모자 모양의 보아뱀과 바오밥 나무였다. 중학교 때에는 여러 별을 여행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인식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여우와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가 자리하다가, 대학생이 되니 여러 행성들에서 만난 독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읽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마음을 울릴까.

어린이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동화나 청소년 소설을 접하는데, 어른의 시각에서 본 책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이 짧은 동화에 담겨있다니! 어른들을 위한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동화를 섞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주인공의 어릴 적 자아의 환상이 등장한다. 그는 이 자아를 늘 주변에 두면서 대화를 한다. 이 책에서 진아가 신우의 존재를 만들어 수시로 마음의 짐을 덜어내었듯이. 이들에게는 단순히 헛것을 보는 정신 분열로 테두리 지워지면 안 되는 뭔가가 자리한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과 스스로 자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학창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면 내 슬픔과 외로움과 사소한 마음의 갈등조차 완벽하게 이해받을 수 있을 텐데하는. 답답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올 때면 지금도 가끔 드는 생각이다.‘정신 분열이라는 병도 어쩌면 너무나 간절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진아에게 꽃이 되어준 것은 무엇일까. 절친 인애, 물리 교사, 투명 인간 신우이거나 주변에 있는 동네 어른들, 길러준 엄마, 친엄마 꽃년이가 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우주에 있는 이름 모를 별빛이거나.

한 톨의 쌀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그리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다. 한 알의 씨앗은 햇살, , 바람, , 공기, 농부의 손길, 수없이 많은 시간이 담겨있는 결과물이니.

어쩌면 한 사람의 꽃이 되어주는 것은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닐까. 사람뿐 아니라 확장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우주 너머의 무엇까지.

 

중간 중간 등장했던 우주에 대한 묘사가 참 좋았다. 작가가 의도했던 주제와 연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국어책을 공부하듯 분석하며 읽어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 권의 책이 읽는 이의 어느 부분을 건드리느냐는 같은 이에게도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니. 예전의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우주에 대한 문장을 읽다보면 나를 둘러싼 크고 작은 고민들이 별 거 아닌 듯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은 내 자신이 우주가 되어버린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의 몸 속에 사는 박테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도 하나의 커다란 우주가 되는 거라고.

 

짧은 인생의 깨달음을 전해 주었다는 찰흙 인간에 대한 묘사도 좋았다.

인생 잠깐이다. 언제까지 네가 말랑말랑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중략)..내게 찰흙 인형이란 내가 그 무른 흙덩이를 떠나보낼 결심을 해야만 환성할 수 있는 존재였다.’(p58)

안타깝게도 나는 찰흙 인간의 말로를 알고 있다. 그들은 바싹 마르고 굳어서 바스러진다. 결국 모든 건 내 몫이다.’(p60)

그래, 결국 모든 건 스스로 감당하고 헤쳐 나가야 할 나의 몫인 거다.

 

물리 교사의 존재는 사람을 피상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은 본질적인 모습을 너무나 쉽게 발견해낸다.

이건 미제로 남길 사건이 아니다. 답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하필 그게 나니까.’(p231)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진아의 모습은 후련함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을 가져다준다.‘좋게 좋게로 대부분의 일들을 덮어버리려는 동네 어르신들과는 대조적이다. 사회적 사건에 대한 어른들의 대처 방식은 포장을 벗겨보면 너무나 찌질할 때가 많으니까.‘416을 언급한 <작가의 말>에서 나 역시 부끄러운 어른의 일부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진실을 마주했다. 이제 남은 건 생존의 문제다.’(p234)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는 가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다..(중략)..나는 이 여름의 끝이 어떨지 모르지만 뚜벅뚜벅 걸어서 갈 데까지 가 볼 참이다.’(p236)

살아가면서 제일 앞세워야 할 마음은 용기가 아닐까. 어두컴컴한 우주 안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지구의 용기에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을 향해 스스로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 말이다.

답을 얻었다. 그래, 나는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용기를 달고 살아남을 것이다. 무엇을 할까는 차츰 생각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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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5-08-09 15:40   좋아요 0 | URL
좋은 글로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글의 문체가 남성스럽다는 얘기를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는 그냥 웃으면서 넘겼는데, 정말 그런 분위기가 나나 봅니다.ㅎㅎ 알라딘 서재에 리뷰나 글을 올리면서 남녀노소를 구분하지않고 책과 글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점이 가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죠.
동화 중에는 정말 심오한 동화가 많습니다. 말씀대로 웬만한 성인도서보다 더 나을 때도 있구요^^
 
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 사계절 1318 문고 98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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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모든 대상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보이는 중력도 존재한다고 감히 말해보려 한다. 사람을 강력하게 당기는 힘. 그것은 자본이거나, 돈을 매개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극소수의 사람이 될 수도, 약자 위에 군림하는 비열한 영혼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힘. 그 아래에 있는 어떤 이들을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힘없이 쓰러진다.

 

이 소설집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땅을 딛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없겠냐마는 이들이 절감하는 무게는 상대적으로 너무 크기만 하다.

도망간 어머니와 사기꾼 아버지, 패거리들의 라면 상납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던 소년의 이야기 <가방에>,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소녀의 <최후 진술>, 왕따가 겪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 <구토>, 학교 내 무림 서열 1위였던 소년의 추락사 <추락하는 것은 복근이 없다>, 인생의 의미를 말해주는 <표류>, 가정폭력에 방치된 남매 이야기 <붉은 브래지어>, 버마에서 온 이주민 소년의 이야기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7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로 살아간다.

 

김해원의 글을 접할 때마다 문장이 가진 매력에 푸욱 빠져버린다. 심각한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주제임에도 중간 중간 예상치 못한 웃음이 유발된다. 유머러스함은 주제의 무거움을 가볍게 희석시킨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개그맨 고수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랄까. 그 자신 전혀 웃지 않으면서 담담하고 적나라하게 장면을 묘사하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매번 예상을 여지없이 깨어버리는 주인공들의 반응. 심리 묘사가 감탄스럽다. <열일곱 살의 털>을 읽고 느꼈던 카타르시스가 다른 이야기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소재의 범위는 사회를 향해 조금 더 확장되어 업그레이드되었다.

 

정말 위험한 건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세상에 부유하고 있는 거지요.’(p143)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또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가.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표류죠. 스스로 항로를 개척해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항구에 닿아 닻을 내리는 것!’(p144)

지금 내가 있는 자리는 내가 원했던 곳인가, 아님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우연히 정박하게 된 장소인가.

나를 당기는 중력을 생각한다. 나는 사회적 약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강자도 아니다. 만일 중력이 나를 잡아당긴다면 적어도 힘없이 주저앉아 꺼져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럼 중간자쯤 되는 건가.

 

사실 지중해든 대서양이든 태평양이든 상관없어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한다는 게 중요하니까요.’(p145)

우선 스스로 단단해지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그래야 넘어진 이들을 보았을 때 손이라도 내밀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한다.

누군가는우리 비록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얼굴만은 하늘을 향하자라 말했다고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작용하는 중력을 생각한다. 영혼만은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기를, 그런 세상이 오기를,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내 것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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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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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이라고 생각했다. 벽지나 무늬가 있는 건물 벽에서 보이는 것처럼 몇 가지 유형의 복사본이라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멍하니 책을 바라본다. ! 이건 뭐야? Ctrl + C, Ctrl + V 가 아니잖아. 미니어쳐처럼 나열된 남자, 여자, 남자와 여자의 표지 그림. 미세한 차이를 두고 조금씩 다르다. 뒷면도, 단편이 구분되어 있는 여덟 장의 속지도 어느 것 하나 같지 않다. ! 표지에서부터 작가가 표현하려 했던 주제가 묻어있던 거다. 우리 모두의 사랑은 다르다.

 

연애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등장한 단어, ..! 으흣~세다! 나의 동공은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와 함께 커진다. 조용히 삼켜지는 침과 함께 속독을 하듯 바빠지는 눈동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예상은 점점 빗나가고, 이제 막 시작하나 했더니 벌써 마지막 마침표에 도달한다.

이게 무슨 연애 소설이야? 당최 뭔 얘긴지, ‘소매치기라는 뜻을 가진 두 번째 소설픽포켓은 더 황당하다. 단단한 줄 알고 막상 머리를 뉘었는데, 푹 꺼져버린 베개를 베고 난 듯한 느낌은 여덟 편을 글을 다 읽을 때까지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며 뒤틀린다.

 

일요일마다 본방 사수하는 <복면가왕>이 불현듯 떠올랐다. 편견을 깨고 노래를 부르는 이의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하는, 그동안 노래를 눈으로도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프로그램이. 문학작품이든 그 무엇이든 편견을 버려야 본질이 보인다.

주인공 남녀의 뜨거운 사랑, 안타까운 인연의 고리, 아름답게 그려지는 무지갯빛이거나 폭풍우 몰아치듯 처절하거나. 연애 소설하면 으레 이런 상상을 했더랬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예상을 깨는 파격적인 전개는 이제껏 글로 그려지는 사랑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가차 없이 깨뜨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하고 접할 수 있는 연애의 모습이 아닌가. 키 크고, 인간성 완벽하고, 능력 출중하고, 잘생기고, 매너 좋고, 노래 잘하고, 동굴 목소리를 가진 재벌 남은 TV에 박제되어 길거리를 다닐 수 없는 드라마 인간인 것을.

실제 연애는 허탈하고 시시하고 무모하고 시작과 끝이 애매할 때가 많다. 놀라운 것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슷한 사랑을 꿈꾸며 상대방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럴 때는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해,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착각하며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소설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들어온다. 등장인물들 의 다양한 대화 속에서 섬세한 감정이 모습을 드러내며 흘러나온다.

 

상황과 비율에 나타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모든 상황엔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엔 의미가 있습니다.’(p22)

소설에서 그려지는 상황을 그대로 음미해본다. 여주인공의 입장에서 묘사되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데이터가 필요한 거죠..(중략)..다들 외로운 거예요, 그렇죠? 외로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다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거겠죠. 외로운 걸 거예요.’(p41)

포르노와 관련된 상황들을 걷어내고 나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새하얀 탁구공과 아릿하게 닮아있는 사랑의 시작이 보인다.

 

소설 속에 ‘feat. 찰스 디킨스라니. 노래에나 등장하는 용어가 왜? 이 문구가 찰스 디킨스의 문장을 인용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픽포켓이라는 제목처럼 독특한 접근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사랑이 보이는 걸까? , 제목과 내용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훔침과 연관된 상황들이 깨알 같다. 엄마의 돈을 훔쳐 부산으로 가는 고등학생이 있고, 가방을 소매치기당하는 상황은 주인공 여가수를 동네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심지어 곡명조차 <안녕을 훔치다>이다. 훔치다, 훔치다, 무엇을? 한참을 뒤적이며 담겨있는 사랑을 찾아본다.

여주인공이 사귀고 있는 남자, 스캔들 대상이 된 남자는 모두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 그녀는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고 있는 남자를 모른 척하기도 하고, 창문을 통해 나타난 실루엣을 보고 별 감정이 없던 남자에게는 근원 모를 질투를 강렬하게 느낀다. ‘창문은 질투의 시작이었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갖고 싶었다.’(p86)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p87)

보여 지는 사랑과 실제 사랑은 다르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일 듯 말 듯한 상황은 더 큰 상상력을 부른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만든 창문을 세워두고 비춰지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사랑을 지레 상상하고 쉽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라는 제목에는 슬픔이 있다. 서로를 안는다는 것은 따스함을 공유하는 일인데, 가짜 팔이라니.

사랑에도 소설처럼 완결이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결혼이거나 환하게 웃는 모습들이지만, 결혼 이후에도 삶은 지속되는 거니까. 이별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사랑의 완결은 이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다만 시기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지그소 퍼즐을 보면 아주 신물이 난다는 규호는 2천 조각짜리 퍼즐을 맞추고도 오히려 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림을 다 맞추고 나면 새로운 걸 완성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고, 그냥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제자리에 놓아둔 기분이야.’(p93)

완벽하게 결합된 지그소 퍼즐에서 나는 이별을 연상했다. 나만의 시각이지만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퍼즐 조각처럼 잠시 내게서 떨어져 나온 감정의 조각들이 다른 조각들과 마주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라고. 사랑에서 이별까지의 과정도 이런 것이 아닐까?

6월에 지었던 이별이란 시가 떠오른다.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각자 다른 공간을 바라보고/ 다른 꿈을 꾸게 되었을 뿐입니다// 나의 기쁨이 더 이상 그에겐/ 아무 상관없어졌을 뿐입니다/ 아프고 시린 순간을 기대며/ 나눌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들을/ 더 많이 공유했을 지 모른다며/ 아쉬워하지 말기로 합니다// 단지 여기까지였을 뿐입니다/ 처음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시선이 고정되었던 장면은 이별의 고통을 외치는 부분이다. ‘이별에 관한 것이라 정확히 지칭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러리라 짐작해본다.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p117)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중략)..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p117)

주인공 규호는 이미 헤어졌던 여자 친구를 향해 이야기들을 읊조리며 한 번만 안아주고 가라는 말을 반복한다.

안는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은 적이 있다.

하루를 지내는 동안/ 몇 명이나 안아보았던가// 몸과 몸이 닿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전해지는 온기를 넘어/ 마음과 마음이 닿는다는 것// 나를 향해 열려있는 가슴/ 그거 하나면 충분한 날에/ 먹먹하게 퍼지는 영혼의 전율/ 따스하게 담기는 편안한 위로// 안는다는 것은 사실/ 이런 의미인지도 모르지// 시린 가슴 몇이 만나/ 위로해주고 기대어가며/ 서로의 눈물을 덜어내는 건지도// 버거워지는 시간의 귀퉁이를/ 잠시나마 가벼이 들어주는 것/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안고 있는지도

가짜 팔은 애정 없이 안는 팔이다. 그래도 그것조차 의미 있는 포옹이라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p96)

 

뱀들이 있어는 좋아하던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해버린 상황에 있는 남자의 질투어린 심리에 관한 소설이다. 그는 구슬점으로 운세를 점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프로그램의 선택 상황처럼 끊임없이 모순된 감정의 갈등을 경험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 기분이었다..(중략)..때로는 폭력이 구원이 되기도 하고 실수가 정답이 되기도 하며 우연이 지름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p139)

어느 날 그는 지진으로 친구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평화로운 풍경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그 풍경이란 얼마나 연약한 고요함인지..(중략)..현재의 시간을 유심히 보았다.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다.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현재의 시간이 비웃는 것 같았다.’(p140)

좋아했던 여자를 찾아간다. 그들의 대화에서 게임 프로그램은 다시 등장한다. 여자는 선택할 수 있는 구슬의 수가 줄어드는 게임 방식을 남은 구슬로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얼마나 기습적인가. 그런 상황을 맞게 되는 우리는 끊임없는 갈림길에서 고민을 한다. 사랑과는 별개로 나의 눈길은 선택에 관한 서술에 오래 머무른다.

새로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운세대로 행동할 것인지, 운세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p137)

 

종이 위의 욕조에서는 화가와 큐레이터 사이에 막 움트려고 하는 사랑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들의 공감은명사 분실증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결정적이고 자극적인 문장이 서술되어 있지도 않고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화체의 문장은 지극히 단답형이다. 그런데도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면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슬금슬금 타고 가다보니 어느 순간 정상에 도달해버린 케이블카에 있던 것처럼. 딱히 어느 부분부터라 지칭하기 애매하지만 그라데이션처럼 서서히 변해가는 감정의 흐름이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평면은 무한한 입체이다.’(p192)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끊임없이 이어진 면을 따라가다 보면 경계가 하나 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 되어버리는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었다.

 

보트가 가는 곳은 사랑의 시작과 죽음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참 묘한 것이 사랑의 시작은 대부분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확실하지 못할 때도 많고, 이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며 막연한 추측으로 어림잡아질 뿐이다.

주인공은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 1년 단위의 같은 날을 보여주는 앱을 개발한다.

시간을 다른 식으로 엮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을 붙잡는 것 같아서 좋았다. 매년 11일이 되면 몇 년 동안의 11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p220)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중략)..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p222)

검은 구멍으로 한순간 빨려 들어가버린 그녀의 죽음은 사랑의 시작에 대한 남자의 고찰을 만들어낸다. 끝에서 바라보는 시작이라니.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p228)라 되뇌는 남자의 말은 죽음 앞에서 허무하기만 하다.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는 실연당한 남자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인스턴트식품처럼 빨리 시작되고 가볍게 끝나버리는 요즘 사랑과 대조적이다. 자동차에 뛰어들기 직전까지의 상황은 엑셀을 밟아 점점 빨라지는 자동차처럼 긴장된 속도감을 안겨준다. ! 힘과 가속도의 법칙이라니! 제목 한 번 기가 막히다. 고통에 대한 마지막 부분의 서술은 점묘화를 보듯 세밀하다.

현수는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모조리 분리시키고 싶었다..(중략)..다시 짜맞출 수 없대도 일단 해체하고 싶었다. 삐걱거리는 육체를,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진 심장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고통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중략)..모든 게 텅 비길 원했다..(중략)..거대한 얼음판 한구석에서 작은 금이 시작되듯 자동차와 충돌한 몸의 부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p261)

 

요요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관계의 시작, 그것이 이어지는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소설 속에는 시간시계라는 말이 수시로 등장하는데, 어쩐지 그 말들은 내 눈에 관계라는 말과 겹쳐져 보인다. 독립시계제작자가 된 남자가 첫 번째로 만든 작품 <시간은 흐른다><관계는 흐른다>, ‘시간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p286)라는 문장도 관계는 어디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로 해석되는 식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시계 <Station> 속에서 거꾸로 움직이며 흘러가는 기차마저 과거를 거슬러 추억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Station>에 끝내 시간을 불어넣지 못한 것은 과거에 붙잡고 싶었던 그녀와의 관계가 그대로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

선택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결과를 되짚어 선택을 선택할 수는 없다.’(p295)는 문장은 선택을 후회하며 만약에를 반복하게 되는 순간으로 냉철하게 다가간다.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난 생각했어. 나쁘지 않아. 그래, 나쁘지 않아.’(p300)

그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그녀와의 시간에 원을 그려 넣으며 <요요>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중략)..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p300)

 

처음으로 접하게 된 김중혁 작가의 글은 상식을 파괴하는 전개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주었다. 첫 번째 읽었을 때 2점과 3점 사이를 오갔던 나의 별점은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는 마음과 함께 4점과 5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 허무한 결말은 도대체 뭐야 라며 황당해했던 처음의 기억은 잘 짜인 옷감을 본 것 같은 느낌에 덮여버리고 만다.

이 책은 연애 소설이 맞다. 관계가 Ctrl + C, Ctrl + V 가 될 수 없듯이 표지에 그려진 제각각의 사람들처럼 어느 것 하나 똑같을 수 없는 연애에 관한 글이다.

치밀하고 치열하기까지 한 8편의 작품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했던 시간’. 그것은 관계라는 실을 꽁무니에 매단 채 작품들을 묘하게 이어붙이는 바늘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관계에 대한 소설이라 이름 붙여 본다. <작가의 말>에 나열된 수많은 등장인물들에서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엿보인다. 제목을 바꾸어 읽어본다. <작가의 마음>이라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다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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