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혐오 - 공쿠르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
파스칼 키냐르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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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과 베이스 기타 소리를 좋아한다. 커다란 울림으로 오롯이 하나의 감각만을 향하는 규칙적인 두드림에 내 심장도 덩달아 두근거린다. 심장 박동이 피부로 느껴진다. 어두운 곳에서 이어폰을 끼고 듣다 보면 머리 뒤편에서 울리는 소리가 밖에서 온 건지 안에서 온 건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음악에 취한 듯 강하게 끌려들어간다.

어릴 적에는 타악기의 매력을 몰랐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넘나드는 맑은 가락의 피리나 하모니카가 멋져보였지, 큰 북은 그저 기악 합주의 맨 뒤에서 밋밋하게 둥둥거리는 재미없는 악기에 불과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깊은 진동이 피부를 뚫고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한 순간, 그 울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책을 왜 샀을까. 과속방지턱을 만난 듯 옮긴이의 각주를 볼 때마다, 각주를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접할 때마다, 무한한 무지가 피부로 으스스 스며들 때마다, 짧은 문장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 달리기를 하며 멘붕이 올 정도로 시간을 흘려보낼 때마다, 이노무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불쑥 불쑥 일었다. 어느 정도 읽다보면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부분도 나오겠지 싶던 기대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힘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리 한결같은 난이도를 유지하는지, 어쩌면 이리 한결같게 모를 수가 있는지. 듣도 보도 못한 신화 속 인물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시로 등장했고, 철학가와 문학가, 발음도 잘 되지 않는 종교적인 캐릭터까지 이 작은 책을 비집고 북적댔다.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 표지 색깔처럼 암담함이 엄습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세 글자가 떠올랐다. ...

 

이상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분명 제대로 이해한 내용이 없었는데 따뜻한 물에 푹 담근 몸으로 온기가 스며드는 것처럼 무언가가 내 안에 들어온 듯했다. 다 읽고 나니까 책의 맛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음악 안에서 어떤 요소가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는지 알게 되었다.

화려한 외피를 걷어내고 알맹이를 보려는 사람처럼, 음악의 본질을 향해 조금씩 거슬러 올라갔다. 아름다운 선율의 옷을 벗은 날 것 그대로의 음악에는 짐승들의 울음과 질척이는 생명의 떨림이 존재했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들썩이는 호흡의 규칙적인 리듬이 이 모든 것의 기원이었다. 음악이란 결국 생명에서 뿜어져 나온 울림을 모방하면서 이어져왔던 소리였다. 다양한 각도에서 음악의 본질을 파헤치는 저자의 사유에 절로 경외감이 느껴졌다.

 

음악(音樂)에서 (樂)’이란 한자에는 노래라는 뜻 이외에도 즐기다란 의미가 있다. 독음은 다르지만 좋아할 요도 같은 한자를 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음악은 음향(音響)에 가까워 보인다. ‘(響)’이란 한자는 고향 향아래에 소리 음자가 합쳐진다. '울린다'는 뜻이다. 음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좀 더 본질적인 소리의 고향을 찾고자 하는 사유가 엿보인다는 면에서 음향을 떠올린다. 그 본질은 즐겁지도 맑지도 않고 비릿한 눈물의 맛을 닮았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볼 때의 느낌처럼 찡함과 기쁨을 동시에 품는다.

 

피아노 계단이 발명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참 대단하다 감탄했다. 그러다 몇 년 뒤비트 박스계단이 소개된 동영상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한 사람이 올라설 때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만, 여러 명이 오르내릴 때는 잡스럽게 섞이는 소음이 되는 피아노 계단의 단점을 보완했다고 했다. 음의 고저가 없는 비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있었다. 여러 비트가 섞여 조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묘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흥겨워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MSG를 첨가하지 않은 콩나물국인 듯 깔끔하고 개운한 소리였다.

 

주변 사람들이 뒤척이는 소리에 오늘따라 민감해진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p104)’는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는 소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소리가 외피를 뚫는 송곳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절로 공감이 된다. 책에 등장한 묵음침묵의 의미를 곰곰 생각한다.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즐겨찾기로 등록한 음악들을 민감하게 듣다 보니 강하게 끌리는 노래의 공통점이 보인다. 내게 있어 노래 한 곡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드물다. 1초 혹은 한 소절의 포인트에 반하면 스킬 자수를 하는 바늘에 꿰어진 듯 훅 끌려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 다시 분석해보니 좋아하는 노래들 안에서 드럼과 베이스 기타 소리가 두드러진다. 내가 그리워하는 소리는 심장 소리였을까.

백예린의 <아주 오래된 기억>이 흘러나온다. ‘어떤 날은 소리로부터 아주 오래된 기억을 느껴음악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가사도 사라지고 리듬도 사라지고 심장의 떨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미묘한 떨림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낱말 지음(知音)’의 의미를 새삼 생각한다. 내 심장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의 떨림을 인지하고 뛰어왔던 걸까.

 

음악에는 마냥 아름답다고 하기엔 훨씬 묵직하고도 깊은 무게감이 있다. 그 울림이 생명을 흔드는 방향으로 접근했을 때, 이 책의 제목처럼혐오라는 말이 나란히 붙을 정도로 처절할 수도 있겠다 싶다. 수용소에 있던 프리모 레비가 음악을 가리켜 지옥 같다라는 표현을 했듯이.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캐러멜 마키아토만 마시던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게 된 후 나타난 변화이다. 우유도 첨가하고 캐러멜도 첨가한 음료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이 것 저 것 다 걷어낸 커피 고유의 매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본질에 접근한 음악은 생명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훨씬 오래전부터 울리던 깊은 소리였다. 동물의 울음으로, 인간의 언어로, 악기의 울림으로, 누군가의 목소리에 실린 음악은 우리의 심장처럼 항상 뛰고 있었다. 생명의 떨림과 같은 파장으로 진동하는 공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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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사람 공부 공부의 시대
정혜신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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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과정은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마주치는 일이다. 나를 끌어내고 덜어내면서 복잡하게 응어리져 깊이 쌓여있던 고통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아픈 이유이다. 리뷰나 시가 완성될 즈음에는 대부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실컷 울고 난 것처럼 후련하다.

독서의 끝은 글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고 나서는 꾸역꾸역 노트북 앞에 앉는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처럼 퇴근 후의 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낸다. 쏟아지는 직장일로 눈이 뻑뻑한 날에도 피곤한 몸을 끌고 커피숍에 가서 글을 쓴다. 노트북을 통해 내가 쓴 글을 객관적으로 마주 보며 나를 다독인다. 글과 함께 하는 시간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이다.

 

늘 마음에 걸렸다. 연애를 글로 배운다는 느낌이랄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머리로 인식하거나 가슴까지는 겨우 도달했으나 발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책을 읽고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독후감을 썼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행동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행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과격한 시위였다. 그런 낯설음이 두려워서 걸음을 쉽게 뗄 수가 없었다. 말이나 글은 행동으로 옮길 때 생명력을 갖건만 대부분 말과 글에서 그치는 자신을 돌아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내 글이 더없이 가볍다는 생각이 행동하지 못한 무거움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생명력을 가지며 살아있는 책을 만났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이 사람 공부라는 주제로 한 강연을 엮은 책이다. 정신 분석 이론이나 심리학적 치료 기법을 말했다면 실망을 느끼며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을 터이다. 이 책은 달랐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 끌어올린 말은 지하 몇 백 미터에서 올라온 암반수였다. 작가는 거리의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 했다.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작가의 태도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객관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노력까지 열심히 하니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서 나는 속으로만 고민하던 고구마 같은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액체 소화제를 먹은 듯 속이 뻥 뚫렸다.

 

반복되는 우울함으로 지쳐가던 때가 있었다. 결혼으로 새롭게 맺어진 인간관계 앞에서 한없이 서툴렀던 시기였다. 관계가 맺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감당하지 못했다. 많은 시간을 식탁 끝에 걸려있는 유리컵처럼 지냈다. 언제 깨질지 모를 불안함이 공기처럼 흘렀다. 내게 가장 추운 장소는 집이었다. 사회에서의 얼굴은 더없이 즐거웠으나 퇴근 후에 체감하는 온도는 낮고 공허했다. 그 온도차가 마음에 균열을 내며 딱딱하고 건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갔다. 길을 가다 갑자기 죽는다 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전원이 꺼진 채 멀티탭에 연결된 전기기구처럼 어두운 시간의 흐름을 근근이 유지하던 날들이 흘러갔다.

 

20144월의 그날도 시린 나를 견뎌야 했던 하루일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아파했지만 내 마음은 화석처럼 굳어버린 듯 했다. 안쓰러운 마음은 들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TV를 통해 가라앉는 배를 바라보았다. 나는 점점 무감각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행동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렸다. 모든 일은 하기에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인데 팽목항에도 안산에도 가보지 못했다. 남들 다 달고 다니던 리본도 옷에 매단 적이 없고 핸드폰 뒤에 노란 스티커를 붙여본 적도 없다. 마음에 담긴 차가운 어둠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까지 얼려버린 것 같았다.

 

3년이 지난 후에야 뒷북을 치고 있다. 마음 속 얼음이 점점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끼면서였다. 고등학생이 된 둘째에게 감정이입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비 크래커 절반만한 크기의 노란색 금속 열쇠고리가 자동차 키에 매달렸다. 출퇴근 때마다 시동을 걸면서 흔들리는 노란 영혼을 생각한다. 내 아이에게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제대로 견딜 수 있을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먹먹한 마음으로 한 번도 본적 없는 아이들의 부모님을 생각한다.

3년이나 지나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차 키에 열쇠고리를 매달고 그들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점점 따뜻한 사람이 되고는 있었지만 한편으로 한없이 느린 나를 돌아보며 쪼그라들었다. 내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것도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작은 행동에 대한 의미를 드디어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 그런데 괜찮아.(p70)’ 동생의 죽음을 한참 후에야 받아들였던 형을 상담하면서 했다는 말이다. ‘괜찮아라는 세 글자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조금 늦게 아파해도 괜찮아, 괜찮아 하며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글이 지닌 힘이었다. 강의 후 이어진 Q&A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만났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당신의 고통을 나도 알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은 어떤 방식이든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p114)’이라는 작가의 답변은 소심했던 나를 가만히 토닥였다.

 

올 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겨울의 입김이 남아있던 3월 아침, 패딩에 털모자에 목도리까지 두른 채 교문 앞에 서 계시는 배움터지킴이 선생님을 보았다. 그 모습이 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내 느낌을 시로 지었다. 다음 날 오전, 시를 출력한 종이를 드리러 지킴이실을 찾아갔다. 마침 교내 순찰 중이시라 자리를 비우셨길래 다른 분께 전달을 부탁드렸다.

그분은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두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내 시를 읽고 우셨다며 살짝 붉어진 눈으로 고운 편지봉투에 담긴 답장을 건네주셨다.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정갈하고 빽빽한 글씨로 채워진 편지지에는 표정에 담겨있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신의 마음을 선생님이 알아주시는 것 같아 피곤함이 싹 가시고 많은 힘을 얻었다고 하셨다. 학생들을 더욱 잘 보살피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하셨다. 다른 두 분께도 시를 지어 드렸다. 세 분의 지킴이 선생님은 내가 지나가면 멀리서도 반갑게 다가오시며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소설 <삼총사>에는 ‘One for all, All for one’이란 구호가 등장한다. 멋진 리듬감을 주는 문구만큼이나 깊은 의미를 지닌 문장이다. 19세기의 뒤마도 인간의 개별성이 나타내는 심오한 의미를 깨달았던 것일까. 작가 기타노 다케시는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와 관련해서 이것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이다.”라 말하며 개별적 인간의 중요성을 시사했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정혜신 역시 한 개인에 집중하며 한 명 한 명을 치유해나간다. 강연의 결론은 모든 인간이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치유의 출발점(p150)’이라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이런 마음을 안고 사람들의 고통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다 싶었다. 결국 최종적인 치유자는 자기 자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답을 알고 있으므로. 주변에서는 그가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줄 뿐이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해지지 않을까.

 

나란히 배치된 세 개의 책상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업무적인 일로 지킴이실에 들른 날이었다. 각각의 책상 앞에는 내 시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볼 때마다 힘을 얻는다고 하셨다. 당신들 마음의 온도를 1정도 높여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시를 드린 마음을 깊이 이해받았다는 생각과 감사한 마음까지 뒤엉켜 교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뭉클했다. 나를 치유하는 역할을 넘어 타인을 향한 글이 의미 있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작가는 문학을 가리켜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p144)’라고 말했다. 어쩌면 글로도 행동할 수 있겠다 싶었다. 행동하는 글이란 타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이었다. 그로 인해 누군가는 시린 마음을 녹이고 힘을 얻어 행동할 것이니. 내 글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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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팅 아일랜드 일공일삼 50
김려령 지음, 이주미 그림 / 비룡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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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모른 채 파고들며 질문했다. 인공지능로봇이 발달하면 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 텐데 그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명쾌하게 답변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16세 아이의 시선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답변이 궁금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결국 생산될 물건을 쓰는 소비자가 될 테니까, 그 사람들이 돈을 못 벌면 소비가 줄어들 테니 결국 공장이 문을 닫게 될 거잖아요. 그러니까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고용해야 할 거예요. 이런 내용으로 천천히 흘러나오던 아이의 답변은 질문이 무색하리만큼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고 있었다. 표현은 서툴렀지만 논리적으로 희망을 말하는 아이의 답변에 뿌듯했다. 그 마음은 오후 내내 주변을 맴돌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세상은 특별한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결국 우리 주변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끌어간다는 것을. 특별함과 평범함을 나눈다는 것조차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간을 누가 어떤 잣대로 특별함과 그렇지 않음을 판단합니까?(p183)’책 속의 문장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아까 들었던 아이의 답변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말이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던, 미스터리하면서도 모험을 연상시키는 동화이다. 전체적인 느낌은 동전의 양면 같다. 500원짜리의 동전은 고고한 학이 날아다니는 앞면이 마음에 들지만, 100원짜리 동전은 언제 맞아도 기분 좋은 점수가 떠오른다는 이유로 뒷면이 마음에 든다. 동전의 어떤 면을 좋아하느냐는 온전히 취향의 차이이다. 확률 1/2로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예상되는 책이다. 마음에 드는 점도 있지만, 어떤 시각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으니까.

상징성이 크다는 점은 다소 허술하거나 불친절한 구성으로 비춰진다. 쓰레기가 쌓인 산, 하리 마을 아이들의 삶, 사원의 존재, 섬을 소개해준 아빠 회사 직원 등 등장 요소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생략되어있다. 결과만 제시하고 원인을 감춘 모습이랄까. 따라서 독자는 이야기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유추하면서 내용을 채워가야 한다. 서툰 솜씨로 끓인 김치찌개를 맛본 듯 맛이 충분히 우러나지 않고 겉도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작가의 잘못은 아니다. 김려령의 이전 작품들을 토대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이것은 충분히 의도된 내용일 것이다. 김치찌개의 맛을 놓고 재료 탓만 할 수 없는 것처럼 책을 해석하는 독자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작용으로 보인다. 수학처럼 답이 똑 떨어지거나 과학적으로 인과 관계를 치밀하게 증명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면에서 내 성향과 맞지는 않는다.

이 책이 드러내는 상징성은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장점으로도 작용한다. 책이 하는 근본적인 역할을 생각한다면 독자는 여러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니까, 이런 점에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동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과 사람들의 존재를 깊숙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몇 시간 만에 후다닥 읽게 되지만, 읽는 데에 걸린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어느새 내용 자체보다 내용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더 깊게 빠졌다. 세 가지 생각을 했다. 특별함과 평범함, 쓰레기 섬, 아이에 관한 것이다.

 

섬의 안과 밖의 사람들은 특별함과 평범함, 대단함과 하찮음이란 개념으로 대비된다.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의 빛과 그림자처럼 전혀 대조적인 삶을 살아간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경계를 나누는 모습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몇 년 전, 뉴스에서 들었던 기사이다. 부유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인접해 있는 임대 아파트 아이들이 아파트 앞을 지나다니는 것을 꺼려해 통학로를 막아 멀리 돌아가게 했다는 내용이다. 특권 의식을 가진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과 임대 아파트의 아이들이 어울리지 못하게 통제까지 한다는 보도내용에 씁쓸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의 잣대에서는 돈의 소유 정도가 특별함과 하찮음을 판단하는 기준인 듯하다. 그 옛날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던데. 황금은 땅에서 나는 광물이다. 광물은 암석을 구성하는 성분이니 황금은 돌 맞다. 돌멩이 몇 개 더 소유했다고 특별한 인간이 되는가. 정신적 가치의 소유 정도를 기준으로 해도 그들이 특별할까.

시야를 넓혀 지구 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비만으로 인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과 바싹 말라 굶어 죽는 사람들, 한쪽에서는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로 골치를 썩는데 다른 쪽에서는 음식물 찌꺼기조차 구하지 못해 주린 배를 움켜쥔다. 지구라는 동그란 섬 안에서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이다. 플로팅 아일랜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쓰레기 산이 상징하는 의미와는 다르지만, 여러 번 언급되는 쓰레기 산을 보면서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쓰레기 섬을 떠올린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다는 2개의 섬이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조각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에 의해 모이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과학 교과서에서는 환경오염 문제를 언급하면서 쓰레기 섬의 몇몇 풍경들을 보여준다.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컹 내려앉던 사진이 있다. 죽은 새의 배를 갈라 뱃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함께 보여준 사진이다. 새의 위 속에 든 것이 소화되고 남은 물고기나 다른 생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각종 플라스틱과 스타이로폼 같은 것을 잔뜩 먹고 죽은 새. 먹을 것인 줄 알고 먹었다가 영양부족으로 죽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인간이 생태계의 자연스런 리듬을 깨뜨리고 있다.

 

동화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아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체념하며 살아가던 하리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강주가 하리 마을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달라져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결국 아이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세상이 갈수록 삭막해진다고들 한다. 희망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마냥 놓아버릴 수도 없는 삶이다. 이런 세상 안에서조차 아이들은 명쾌하고 과감하다. 작가의 말에서 그려진 세상을 공감하며 바란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다 같이 행복하고 즐거운 세상은 언제쯤 가능할까.

 

우리는 각자 섬을 품고 살아간다. <플로팅 아일랜드>라는 섬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뿌리가 없이 둥둥 떠다니는 부유도이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며 사람들 사이의 단절을 얘기했다. 내 안 어딘가에 존재할 나만의 섬은 주변의 섬들과 얼마나 이어져있을까. 책에서 등장하는 섬은 뿌리 없이 떠다니지만, 내게 있을 섬은 지형적인 섬의 존재와 닮았으면 한다. 바닷물을 거대한 빨대로 모두 빨아들인다면 육지와 바다 밑은 한 겹의 땅 껍질인 지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은 단지 육지와의 사이에 그보다 낮은 바다로 채워져 있는 땅일 뿐, 바다 아래로는 하나로 이어진다.

바람은 공기의 양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불고, 열도 고온의 물체에서 저온의 물체로 이동한다. 자연계에는 양쪽의 상황이 평형을 이룰 때까지 이루어지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섬이 이어진다면, 지금 추운 곳은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 처음은 아이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아이는 희망의 섬을 품고 세상을 향해 힘껏 손을 뻗는 용기 있는 존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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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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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라니! 앞부분에 실린 소말리아 소녀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다. 한 끼를 굶어도 속 쓰림이 못내 괴로워 신경이 날카로워지건만. 소녀의 얼굴과 사진 밑에 있는 작은 글씨를 번갈아 바라본다. 감히 상상할 수도, 공감조차 할 수 없는 먹먹함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날 저녁은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생생하게 떠오른 사진 한 장에 밥알이 까슬까슬했다. 넘기다 사례 들러 켁켁 거리기도 했다. ‘먹는 인간을 읽었는데,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차례를 훑어볼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한국이라는 소제목만 언뜻 보고 내용을 엉뚱하게 재단해버렸다. 세상의 다양한 음식들을 소개하는 책이구나, 독특한 음식을 소개받으면 혹시 여행갈 일이 있을 때 한 번 먹어보자.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표지를 보고 의아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먹는인간에 대한 책인데, 세상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데 왜 잿빛 숟가락 하나만 덩그러니 그렸을까. 더 컬러풀하고 입맛 당기는 먹거리가 떠억 하니 표지에 등장해야 맞지 않나. 책을 다 읽고서야 표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숟가락 하나가 상징하는 것은 수많은 삶 속에서 묵직하게 매달려있었다. 그 무게는 생각보다 징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언젠가부터 습관적으로 먹어왔고, 곁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주변의 풍경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어떤 얼굴로 먹고 있을까(p21)’잊고 있었다. ‘먹는인간보다 먹지 못하는인간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메뉴의 선택지를 고르는 5지선다보다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를 선택 당하는 O, X 문제가 훨씬 많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러시아를 지나 한국에 이르기까지 쭉 펼쳐지던 (食)’의 이야기는 음식이라는 포장지 안에 둘러싸인 삶이었고 사람이었다.

 

먹다 남은 음식을 파는 나라, 사람이 먹는 음식이 짐승이 먹는 먹이와 다를 바 없는 나라, 인육을 먹던 군인, 고양이를 위해 통조림을 만드는 노동자. 방글라데시, 필리핀, 타이, 베트남 등 가난한 아시아의 음식 이야기 앞에서 사람과 동물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콜라를 마시며 해맑게 미소 짓던 북극곰이 다큐멘터리에서 지상 최대의 포식자로 등극하며 반달무늬물범을 잡아 두개골을 이빨로 뽀개는 장면에 전율이 일던 기억이 생생하다. 먹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므로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먹이사슬의 장면이다. 생태계는 냉정하다. 차별의 실마리가 되는 행위(p118),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꾸역꾸역 위장을 채우는 상황. 독일, 폴란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등 갈등하는 유럽의 이야기에서는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먹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한다. 생태계 이상으로 냉정한 인간계에 화가 난다. 인류가 직면한 식량 문제는 먹거리의 총량이 아니라 적절한 분배의 불균형에서 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속이 상했다.

 

아프리카는 뜨거웠다. ‘먹지 못함이 공기를 호흡하듯 자연스러운 나라, 달리 먹일 게 없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먹일 수밖에 없는 모유는 에이즈를 수직감염 시키는 원인이다.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의 음식 이야기 앞에서 인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는 아프리카를 상상하며 한동안 허탈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박노해, 2007)라는 책의 제목처럼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다. <세계를 보는 새로운 책 W>(MBC W제작팀, 2008)에서 가장 충격적이던 아이티 공화국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먹을 것이 없어 진흙으로 구운 쿠키를 저렴한 가격으로 사먹는 사람들. 땅속에 있던 기생충에 감염된 아이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꿰매고 있는 사람들, 방사능 수치가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리 갈 곳이 없어 다시 돌아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음식 이야기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생명들을 담고 있다.

 

한국이 등장한 것은 의외였다. 외국인들에게서 흔히 언급되는 불고기나 김치, 비빔밥 이야기가 아니라 청학동, 재일 한국인 3세인 2군 투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음식이야기를 끌어낸 저자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한다. 일본인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같은 국민으로서 무덤덤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가는 곳마다 먹는 인간이 있고, 지금 그 음식을 먹는 데는 넘치도록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둘러싸고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진다.(p346, 맺음말)’, ‘국가 단위로 사물을 생각하면 안 된다.(p348~349, 문고판 맺음말)’,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아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어라.(p352, 문고판 맺음말)’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정점을 찍는 장면처럼, 이 책에 적힌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저자의 맺음말이 가장 좋았다. ‘마이크로의 슬픔(p353)’을 보는 섬세함과 낮고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시선에 숙연해졌다.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를 보도한 언론을 향해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기타노 다케시가 했다는 외침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이것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이다.”(p362)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8억 가까이 된다는 생명을, 8억 개의 삶들을 상상하는 순간 무심코 흘린 밥풀조차 조심스러웠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은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순간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노랫말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스러진 수많은 죽음들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15억 명이 비만인 인간들과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하는 8억 명의 인간들이 공존하는 세상. 아이러니와 같은 사실을 되뇌며 영화 속 한 장면과 겹쳐지는 기시감을 느꼈다. 한 번뿐인 삶을 간절하게 붙들고 있는 생명들이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는 커피 한 잔을 편안히 마시는 시간조차 미안해지는 일이었다.

 

 

*p245 : 혼돈의맛혼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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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식당 북멘토 가치동화 23
박현숙 지음, 장서영 그림 / 북멘토(도서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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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먹고 싶다. 비빔밥에 화룡점정처럼 맨 위에 찍히던 노란 동그라미도 사라지고, 노르스름한 옷을 입은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도 급식 메뉴에서 자취를 감췄다. 나야 반백년 가까이 살았으니 슬금슬금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이에게 먹이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다보니 덩달아 못 먹게 되었다. 계란찜,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삶은 계란, 계란 옷 입혀 부치거나 튀기는 무궁무진한 재료들. 몇 안 되는 요리 아이템 중 요직을 차지하던 이 소중한 것들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허탈감이라니!

 

음식을 만드는 이의 양심을 요리사를 꿈꾸는 아이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말하는 동화이다. ‘제대로 된 맛을 찾아라라는 TV프로그램에서 선정한 17호점 식당 금보 일식’. 하지만 이 식당은 유통기한이 지난 밀가루와 간장, 된장, 접촉 불량인 냉장고 안에서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는 고기, MSG가 첨가된 우동 국물 소스를 몰래 쓰고 있다. 친구 아빠가 운영하는 이곳이 비양심적인 비밀을 감춘 채 운영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 여진이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처음으로 접하는 저자의 글이다. 천연재료로 우려낸 따끈따끈한 우동 국물을 마신 것처럼 개운하다.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 이 동화가 지닌 장점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력에 있다. 비양심적으로 음식을 만들었던 식당의 주인조차도 감싸 안는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참 좋다.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전개도 신선하다. 중간 중간 소금처럼 살짝 뿌려지는 약간의 유머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면서 나타내려고 하는 주제 의식이 분명하다.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일식집의 초밥처럼 깔끔한 글이다.

 

어릴 때 가장 맛있게 먹던 음식은 구운 김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반찬 그릇은 분홍색 둥그스름한 김 통이다. 안방에 신문지를 깔고 들기름을 솔로 바른 후 맛소금을 솔솔 뿌리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번갈아가며 미션을 수행하면 엄마는 네모난 석쇠를 정성스레 뒤집어가며 연탄불에 김을 구우셨다. 바삭 구워져 살짝 갈색테두리가 생긴 김은 여덟 등분으로 나뉘어 김 통에 담겼다. 아직도 가끔 입맛을 다시면 그 때 먹던 김 맛이 생각난다. 도시락 김이나 8장 들어있는 A4 김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음식은 어린 내게 그저 허기를 면하는 기능 이외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 습관적으로 하루 세 끼를 먹었다. 엄마가 되어 직접 요리를 하게 된 지금에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내가 먹던 김 맛이 왜 그리 특별했는지를, 나의 세 끼에 들어있던 최고의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를. ‘음식의 최고 재료는 정성스러운 마음이래요.(p64)’ 나는 엄마의 정성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왔던 거다.

 

내가 먹는 것이 내 몸을 만든다. 비슷한 내용의 문장은 많은 책에서 언급된다. 음식의 기능은 에너지를 내고 몸을 구성하고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능을 조절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 영양소를 검출하는 내용을 수업에서 가르치면서 습관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다. 가르칠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말했는데,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보니,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 와 닿았다. 아이가 먹는 것이 아이의 몸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흡입할지언정 아이에게는 어떤 재료든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실전은 달랐지만 정말 마음은 그랬다는 얘기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참치 캔이나 비엔나소시지, 베이컨, 도시락 김을 상습적으로 들이밀었고, 원 푸드 반찬을 제공한 적도 많았다.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준 지가 언제였더라. 둘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저녁까지 학교에서 해결해준다며 좋아라했던 불량 엄마는 최근의 행동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이리라 다짐한다.

 

계란을 사기가 조심스러워지기 몇 달 전, 계란말이를 하다가 처절하게 캬라멜 빛으로 변한 계란을 탄생시켰다. 음식은 할수록 숙련되기 마련이건만 계란말이는 갈수록 실패를 자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먹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했어.(p187)’ 처음으로 계란말이를 해보았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 때는 처음인데 너무 잘했다며 좋아했는데. 뒤집개에 온 에너지를 집중하여 조심스레 말았던 기억이 마음 깊은 곳에 있다. 초심을 잃었던 걸까. 책 속에 나온 문장을 보면서 음식을 향했던 초심을 생각한다.

 

살충제 파동이 일었을 때, 계란에 무슨 벌레가 있길 래 살충제를 뿌릴까 의아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자유롭게 몸을 가눌 수 없는 좁아터진 닭장. 그 안에 갇힌 닭들에게 생기는 진드기를 제거하려고 직접 몸에 뿌린다고 했다. 밤에도 알을 낳게 하려고 조명을 계속 켜놓는다고 들었다. 책 속에 등장한 일식집의 비리도, 살충제 계란도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부른 결과이다. 광우병이 이슈가 되었을 때, 소는 초식 동물인데 왜? 라며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인간의 욕심이 가지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생명을 지닌 존재는 또 다른 생명을 취해 그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이란 한 때 또 다른 생명이었던 존재 아닌가. 어찌할 수 없는 먹이사슬이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최고의 재료를 담아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던 때를 기억하는 마음이라면, 음식과 관련된 사람들도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일을 하지 않을까.

나 역시 초심을 잃지 않고 음식마다 최고의 재료를 담아내리라. 이런 마음이라면 다음에는 노르끼리하고 반들반들한, 예술혼이 담긴 계란말이가 나올 것 같은데, 언제쯤이면 편안하게 뒤집개를 휘두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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