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혐오 - 공쿠르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
파스칼 키냐르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드럼과 베이스 기타 소리를 좋아한다. 커다란 울림으로 오롯이 하나의 감각만을 향하는 규칙적인 두드림에 내 심장도 덩달아 두근거린다. 심장 박동이 피부로 느껴진다. 어두운 곳에서 이어폰을 끼고 듣다 보면 머리 뒤편에서 울리는 소리가 밖에서 온 건지 안에서 온 건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음악에 취한 듯 강하게 끌려들어간다.

어릴 적에는 타악기의 매력을 몰랐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넘나드는 맑은 가락의 피리나 하모니카가 멋져보였지, 큰 북은 그저 기악 합주의 맨 뒤에서 밋밋하게 둥둥거리는 재미없는 악기에 불과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깊은 진동이 피부를 뚫고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한 순간, 그 울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책을 왜 샀을까. 과속방지턱을 만난 듯 옮긴이의 각주를 볼 때마다, 각주를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접할 때마다, 무한한 무지가 피부로 으스스 스며들 때마다, 짧은 문장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 달리기를 하며 멘붕이 올 정도로 시간을 흘려보낼 때마다, 이노무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불쑥 불쑥 일었다. 어느 정도 읽다보면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부분도 나오겠지 싶던 기대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힘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리 한결같은 난이도를 유지하는지, 어쩌면 이리 한결같게 모를 수가 있는지. 듣도 보도 못한 신화 속 인물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시로 등장했고, 철학가와 문학가, 발음도 잘 되지 않는 종교적인 캐릭터까지 이 작은 책을 비집고 북적댔다.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 표지 색깔처럼 암담함이 엄습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세 글자가 떠올랐다. ...

 

이상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분명 제대로 이해한 내용이 없었는데 따뜻한 물에 푹 담근 몸으로 온기가 스며드는 것처럼 무언가가 내 안에 들어온 듯했다. 다 읽고 나니까 책의 맛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음악 안에서 어떤 요소가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는지 알게 되었다.

화려한 외피를 걷어내고 알맹이를 보려는 사람처럼, 음악의 본질을 향해 조금씩 거슬러 올라갔다. 아름다운 선율의 옷을 벗은 날 것 그대로의 음악에는 짐승들의 울음과 질척이는 생명의 떨림이 존재했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들썩이는 호흡의 규칙적인 리듬이 이 모든 것의 기원이었다. 음악이란 결국 생명에서 뿜어져 나온 울림을 모방하면서 이어져왔던 소리였다. 다양한 각도에서 음악의 본질을 파헤치는 저자의 사유에 절로 경외감이 느껴졌다.

 

음악(音樂)에서 (樂)’이란 한자에는 노래라는 뜻 이외에도 즐기다란 의미가 있다. 독음은 다르지만 좋아할 요도 같은 한자를 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음악은 음향(音響)에 가까워 보인다. ‘(響)’이란 한자는 고향 향아래에 소리 음자가 합쳐진다. '울린다'는 뜻이다. 음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좀 더 본질적인 소리의 고향을 찾고자 하는 사유가 엿보인다는 면에서 음향을 떠올린다. 그 본질은 즐겁지도 맑지도 않고 비릿한 눈물의 맛을 닮았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볼 때의 느낌처럼 찡함과 기쁨을 동시에 품는다.

 

피아노 계단이 발명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참 대단하다 감탄했다. 그러다 몇 년 뒤비트 박스계단이 소개된 동영상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한 사람이 올라설 때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만, 여러 명이 오르내릴 때는 잡스럽게 섞이는 소음이 되는 피아노 계단의 단점을 보완했다고 했다. 음의 고저가 없는 비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있었다. 여러 비트가 섞여 조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묘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흥겨워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MSG를 첨가하지 않은 콩나물국인 듯 깔끔하고 개운한 소리였다.

 

주변 사람들이 뒤척이는 소리에 오늘따라 민감해진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p104)’는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는 소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소리가 외피를 뚫는 송곳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절로 공감이 된다. 책에 등장한 묵음침묵의 의미를 곰곰 생각한다.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즐겨찾기로 등록한 음악들을 민감하게 듣다 보니 강하게 끌리는 노래의 공통점이 보인다. 내게 있어 노래 한 곡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드물다. 1초 혹은 한 소절의 포인트에 반하면 스킬 자수를 하는 바늘에 꿰어진 듯 훅 끌려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 다시 분석해보니 좋아하는 노래들 안에서 드럼과 베이스 기타 소리가 두드러진다. 내가 그리워하는 소리는 심장 소리였을까.

백예린의 <아주 오래된 기억>이 흘러나온다. ‘어떤 날은 소리로부터 아주 오래된 기억을 느껴음악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가사도 사라지고 리듬도 사라지고 심장의 떨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미묘한 떨림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낱말 지음(知音)’의 의미를 새삼 생각한다. 내 심장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의 떨림을 인지하고 뛰어왔던 걸까.

 

음악에는 마냥 아름답다고 하기엔 훨씬 묵직하고도 깊은 무게감이 있다. 그 울림이 생명을 흔드는 방향으로 접근했을 때, 이 책의 제목처럼혐오라는 말이 나란히 붙을 정도로 처절할 수도 있겠다 싶다. 수용소에 있던 프리모 레비가 음악을 가리켜 지옥 같다라는 표현을 했듯이.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캐러멜 마키아토만 마시던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게 된 후 나타난 변화이다. 우유도 첨가하고 캐러멜도 첨가한 음료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이 것 저 것 다 걷어낸 커피 고유의 매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본질에 접근한 음악은 생명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훨씬 오래전부터 울리던 깊은 소리였다. 동물의 울음으로, 인간의 언어로, 악기의 울림으로, 누군가의 목소리에 실린 음악은 우리의 심장처럼 항상 뛰고 있었다. 생명의 떨림과 같은 파장으로 진동하는 공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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