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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가지 소원
브랜던 로브쇼 지음, 강미경 옮김 / 두레아이들 / 2016년 5월
평점 :
음, 좀 많다. 소시지 붙였다 떼어버린 것으로 허무하게 소원이 날아가 버린 그림형제의 동화에서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이야기 속에서도 대부분 소원은 세 가지였다. 주인공들은 무엇을 원할지 고뇌하지만 대부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결론은 ‘욕심 부리지 마라’이다. 그런데, 100만 가지 소원이라니. 뒤표지에 나온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만약 100만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 소원으로 무엇을 하고 싶나요?’머리 속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너무 많다.
숫자마다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3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8은 따뜻하다. 9는 설레고 1은 외롭다. 그리고 100만은 크다. 어렸을 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돈은 백만 원이었다. 이 다음에 크면 백만 원도 넘게 돈을 벌고 싶다 바랬던 기억이 있다. 100만이 물론 큰 숫자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천만이나 억이나 조보다 큰 느낌으로 다가온다. 100만이 커다란 이미지로 다가오기는 다들 비슷한가 보다. 백만장자, 6백만 달러의 사나이, 100만 가지 소원이란 말들이 나오니 말이다.
결말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짧은 동화 안에 어쩌자고. 보나마나 몇 가지 들어주다 욕심 부리면 안돼요, 어린이 여러분!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책 선정을 할 때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100만인데, 뭔가 특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이끌렸던 것 같다.
주인공 샘은 100만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소원을 빌어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커졌다 작아졌다 걸리버 아저씨 코스프레부터 헐크, 슈퍼맨, 배트맨 콜라보 등 다양한 모험에 뛰어든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예상할 수 있는 전개이다.
하지만, 소원을 이루어가면서 주인공이 깨닫는 점이 상당히 심오하다. 가족들이나 친구의 고민을 해결하였을 때는 뿌듯해하지만, 스스로를 위한 모험은 곧 시들해져 식상함을 느끼는 샘.
‘노력 한 번 기울이지 않고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면 실제로 뭘 한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p80) ‘삶은 고생을, 배움을, 향상을, 연습을, 그 끝에 마침내 얻는 성취를 의미한다. 하지만 뭐든 빌기만 하면 이루어진다면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p179) |
어린이 독서모임을 위해 책을 선정하고 읽지만, 읽고 나서는 종종 어른인 내가 더 많은 깨달음을 얻는 기분이다. 독특한 이야기 전개와 기발한 결론의 도입도 그렇지만, 짧은 이야기에 담긴 촌철살인의 메시지에 깜짝 놀란다.
‘나만 아니면 돼!’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려운 미션을 부여받았을 때, 출연진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역으로 ‘나만 그런 건 아니야!’라는 말은 어려운 순간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위안을 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삶에는 늘 문제가 있다는 거야.'(p172) |
고등학교 때 지각을 한 적이 있다. 만원버스를 한 대 놓치고 학교까지 그 다음 버스를 타고 가면서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교문을 들어섰을 때, 나와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대거 포진한 모습을 본 순간, 어찌나 마음이 편안해지던지. 동병상련을 체험한 기분이랄까. 동병상련이란 생각보다 따뜻한 의미를 지닌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몰려온다. 이 순간만 지나면 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문제없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런 사실이 까마득할 때도 있지만, 바꿔 생각하면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이 책 속의 상황처럼 문제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위로가 된다.
그래, 아마도 살아있는 한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내게 다가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넘어서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삶의 폭이 더욱 넓어지기도 하고 깊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삶을 생각해보면 벅찬 기쁨을 느꼈던 순간에는 늘 과정들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좋아하던 사람과 처음으로 안아본 순간을 기억한다. 그를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생각했던 수많은 낮과 밤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설렘으로 두근댔다. 시험에 합격했던 순간도 생각난다. 눈이 시뻘개지도록 책을 들여다보던 시간들과 이 시험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빛이 났다.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열 달 동안 삐질 삐질 땀 흘리고 뒤뚱거리고 조심하며 견뎌온 시간들이 있었기에 울컥했다.
하늘거리는 광섬유가 아름다운 이유는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빛 때문이다. 그 빛은 가느다란 길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다. 기다란 광섬유는 삶에서 경험하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떻게 그 길을 지나야 하는가의 문제만 남았다. 나는 빛나는 나의 삶을 위해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이다.
100만 가지 소원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야할 것 같다. 만약 100만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