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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아이러니한 건 삶의 대한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죽음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마지막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까. 보드 게임 ‘젠가’를 할 때,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가 있다. 하나씩 하나씩 나무도막을 빼는 게임 방식에서 겹쳐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하나를 택한다면 죽음에 가깝다. 예정된 무너짐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전체는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삶과 닮아있다. 게임이 끝나기 직전, 결정적인 나무도막의 역할을 하는 삶의 요소는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요소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과녁은 분명하다. 삶이다. 작가는 판타지적 요소로 둘러싸인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화살을 의미심장하게 날린다. 짧지만 숭고한 감동을 안겨주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가 천사를 보여준다면 졸라가 보여주는 대상은 악마에 가깝다. 졸라의 작품은 그림자를 연상케 한다. 톨스토이의 빛과 정반대편에 서있다. 이보다 더 칙칙할 수 없는 죽음을 작정한 듯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라의 작품에서 보이는 과녁 역시 삶이라는 점이 묘하다. 다만 이 경우,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인간 자체이다. 날렵한 우아미를 뿜어내며 날아가는 화살을 좇아 직접 달려가는 사람은 일견 무모해 보인다. 허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 도구도 없는 그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화살로 삼아 있는 힘껏 과녁을 향한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도 단지 나아갈 수밖에 없다.
『목로주점』은 파리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졸라가 기획한 스무 권의 연작소설 ‘루공마카르 총서’중 일곱 번째 작품이다. 세탁소 주인으로서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던 여주인공의 삶이 차츰 몰락하다 파국에 이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삶의 몰락에는 여러 계기들이 있으리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술이다. 소설의 제목『목로주점』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싸구려 독주를 파는 주점을 의미한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돌발 사건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복합성을 띠는 제목이다. 주점을 들락거리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스며드는 알코올의 농도는 점점 짙어진다. 기분을 살짝 들뜨게 하는 가뿐함에서 출발해서 중독에 이른다. 그러데이션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초 단위를 묘사한 듯 디테일하다.
주관적으로 판단한 이 작품의 주제는 ‘죽음’이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다.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상황이나 사랑의 실패 혹은 무기력, 불가항력적인 사건, 추위, 배고픔 등 다양하리라. 졸라는 여주인공에게 다양한 시련을 투척한다. 불륜, 알코올 중독, 구타, 가정폭력, 추위, 배신, 절망, 야유, 기아 등이 번갈아가며 그녀를 덮친다. 여주인공은 심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적어도 소설 초반에는. 어떤 시련이 와도 긍정 마인드로 소화하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삶이 잠식되는 과정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돈이 곤궁해지면서 살림살이를 하나 둘씩 떼어 전당포에 맡기는 과정처럼 그녀를 둘러싼 보호막은 점점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다. 작가는 시련이 묻은 나무도막을 주도면밀하게 하나씩 빼나간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작정한 졸라는 주인공의 삶을 서서히 졸라간다.
이보다 더 운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이다. 세간을 몽땅 들고 날랐다가 뻔뻔한 아일비백으로 컴백하여 기생충 모드로 승승장구하는 교활 끝판왕이 남편 1. 더없이 건실했건만 초심을 잃고 끝내 알코올 중독으로 구타를 일삼다 삶을 마감하니 남편 1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인간이 남편 2이다. 두 명의 인간이 그녀 삶을 쌍으로 둘러싼 양대 산맥이다. 주인공의 불운을 조롱과 희열의 대상으로 삼는 주변인들의 말빨은 어지간해서는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 창녀로 전락한 딸은 인과관계의 결과물로 생각될 정도이다.
멀쩡한 등장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순결한 사랑의 결정체인 최후의 보루 대장장이, 알코올 중독자인 아비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맑은 영혼을 고수하는 모습이 성당의 촛불 같던 여덟 살 엄마 아이, 출연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아들,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 나비 신을 연상케 하면서 그녀의 시신을 거둔 장의사 영감 정도랄까.
차라리 날 죽여랏! 제발 깨작깨작 괴롭히지 말고! 사극에서 형틀에 묶인 죄수는 부르짖는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은 죽음의 경계선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치사한 고문이라 했던가. 고통은 실제로 느리게 지나간다고 한다. 인간의 뇌가 고통이 또 다시 올 경우를 대비하여 초단위로 이를 새기기 때문이라나. 주인공의 배고픈 하루가 유난히 더디게 흘렀던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도 있었던 거다. 물의 온도를 서서히 높여갈 때, 냄비에 넣은 개구리는 스스로 죽는 것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다지. 주인공의 삶 역시 조금씩 이어지는 상실로 인해 서서히 식어갔던 걸까. 상실이 지속되면 무기력으로 변모하는가. 주인공의 박탈을 좇아가며 생각한다. 무엇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가. 무엇이 인간을 무너뜨리는가.
졸라의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의 문체에 있다. 디테일한 묘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추적하는 영상을 보는 듯하다. 어설프거나 어정쩡하거나 어수선하지 않으면서 거침없이 대담하다. 글로 그려진 흑백의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기분이다.
한 때 여주인공의 자아실현의 정수였던 세탁장을 묘사한 장면은 영상 뿐 아니라 음성 지원이 되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생하다. 시끌벅적한 장소에서 책장을 펼쳐도 금세 몰입하게 된다. 흡인력이 크다.『인간 짐승』에서는 거대한 짐승처럼 헐떡이는 기차가 그토록 나를 숨차게 하더니. 졸라는 활유법의 연금술사인가 지존인가. 기계들을 커다란 짐승으로 묘사하면서 피부에 닿을 정도로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의 작품을 고작 두 번째로 접하지만 장마철스러운 묘사는 이제껏 읽어보았던 타작가의 도서들을 통틀어 원탑이다. 후텁지근한 표현들이 예술이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코앞에서 증기가 훅훅 뿜어지는 듯하다. 한겨울의 매서운 냉기를 묘사할 때도 여전히 증기가 등장하니 대비 효과로 더욱 에이는 온도가 된다.
이미지 효과는 특히 소설 초반에서 등장인물들이 열을 지어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장면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작가가 소설에서 소개해주는 미술작품들을 검색하면서 읽었는데 하나의 작품이 시선을 붙든다. 프랑스 낭만파 화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이라는 그림이다. 소설을 다 읽은 다음, 그림을 한 번 더 찾아본다. 전율이 인다. 졸라가 소설 『목로주점』을 통해 묘사하고 싶었을 메시지를 시각화한다면 이 작품이 아닐까. 그림이 주는 느낌과 소설의 그것이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전체적인 색감과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라든지 그림의 탄생 배경이 된 실화라든지 그림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라든지. <메두사 호의 뗏목>의 문학 버전이 이 소설이라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는 정치적 인물과 사건과 시대적 상황이 등장한다. 은근히 촌철살인이다. 이를테면 하루에 5프랑씩 벌어서 지금처럼 먹고 자게만 해준다면, 누가 왕이나 황제가 되는지 아무 상관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극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왕의 이름도 비밀인 마당에 용안을 쳐다보는 행위는 언감생심이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왕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았다지. 누군가 역모를 꾀하여 왕이 바뀐다 해도 그들만의 리그였으리라. 하층민의 삶에는 동서양 구분이 별 의미가 없는 걸까. 언젠가는 기계가 노동자들을 모두 죽이고 말거라는 내용도 등장한다. 팍팍해지는 그들의 삶은 조금씩 줄어들어가는 임금의 액수나 고용인들의 감소로 대변된다.
화려한 파리의 모습도 대조적으로 하층민들을 그림자 속으로 몰아넣으며 극대화시킨다. 주인공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실은 절망으로 빠져드는 중에도 동네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창 속에 빠져있을 때는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이 달갑지 않다며 작가는 독백처럼 담담하게 그들의 상황을 표현한다. 삶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묘사되는 문장이다.
부자의 삶에서 지폐가 오간다면 서민의 그것에는 동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다. 이거 사는 데 얼마, 저거 사는 데 얼마, 숫자가 붙은 장면들은 인물들의 손가락을 따라 동전을 세며 계산을 맞춰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동전의 수치는 하층민의 삶을 보다 선명하게 묘사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부자는 지갑 속 돈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집요하리만치 동전 몇 개에 집중한다. 치사하다는 생각에 차라리 대신 던져버려 주고 싶을 정도로 동전을 사이에 둔 실랑이가 벌어진다. 인간이란 이토록 원초적인 존재인가. 자본주의의 밑바닥에서는 인간 존재 대신 동전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나. 인간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느냐며 거세게 항변해야할 존재들이 동전을 중심으로 삶을 움직인다. 각자에게 할당된 빈곤의 몫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문장이 유난히 아프다.
어떤 이에게는 당연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꿈이 될 수 있다. 지하에 사는 이에게 1층에서 사는 것이 꿈인 것처럼. 별 탈 없이 일하면서 언제나 배불리 빵을 먹고 지친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 칸을 갖는 것, 침대, 식탁과 의자 두 개면 충분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 맞지 않고 사는 것. 주인공이 말하는 문장 속에서의 삶이 지금의 나에게는 당연한 모습이다. 소설 초반에 서술되는 꿈은 얼핏 소박하고 평범해 보인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평범한 일상이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대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점 깨달아간다. 평범한 삶이란 인간의 염원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BGM처럼 늘 곁에 맴돌기를 원하지만 중심에 있는 우리는 결코 포함될 수 없는 여집합 같은 대상 말이다. 주인공이 말한 대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 잠깐 있기는 했다. 몰락을 상상조차 못하던 삶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서 깨닫는다. 삶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함을. 현실 세계에서도 전혀 불가능한 장면이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이 무너지는가.『목로주점』을 읽다 보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탐구 장면이 연상된다. 꿈을 실현하거나 사랑을 하는 것도 삶에서 중요한 요소일 터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결국 이런 것들은 인간이 걸치고 다니는 옷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중요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생존의 필수요소는 아닌 것 말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홀딱 벗고 다녀도 살아지기는 하니까.
어디까지 내려가 봤니. 엑스트라와 조연 사이의 비중으로 등장하는 노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인지한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이는 주인공. 몸뚱어리만 남게 된 존재는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요건을 갈구한다. ‘먹을 것’이다. 삶의 외피를 한 꺼풀씩 벗겨낸 작가를 따라 인간 존재의 민낯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인간 말종들은 멀쩡히 활개치고 다니는데 죽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저항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대상이다. 졸라가 묘사한 죽음의 유형은 각기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면밀히 분석하면 죽음의 이유가 근본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첫째, 남편2 어머니의 죽음이다.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신 어르신들이 우스갯소리로 밤새 안녕이라 하시던가. 건강하게 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건 인간이라면 대부분 바라는 순간이리라. 소설 속 노인은 병이 들기는 했지만 생로병사의 수순을 따랐다고 보면 넓은 의미에서 자연사에 가깝다. 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다.
둘째, 아비에게 맞아죽는 아이의 죽음이다. 주변인에 의한 사건과도 같은 죽음이다. 이 또한 아이의 입장에서는 저항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경우 확실히 나쁜 인간이 존재한다. 설령 의도치 않았대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죽음. 잘못의 비율을 따진다면 100% 아비의 탓이다.
셋째, 공동주택 계단 밑 방에 거주하던 노인의 죽음이다. 굶어죽는 삶은 일종의 복선이다. 구석으로 쫓기듯 삶의 무대에서 내몰린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존재했던 장소가 이 노인의 방이다. 현실이라 해도 거지의 삶으로 설정되었을 때부터 그의 죽음은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삶은 이변이 일어나는 소설이 아니니까.
넷째, 여주인공의 죽음이다. 이게 좀 애매하다. 음습한 환경 속에서 그녀의 주변에는 나쁜 인간들이 득시글댄다. 파멸의 구덩이로 유혹하는 놈들, 흡혈귀처럼 등쳐먹는 놈들, 불행을 관람하며 희열을 느끼는 주변인들이 파리 꼬이듯 번갈아 왔다간다. 한데 그녀가 걸어간 길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일까. 냉정하게 판단하면 최후의 선택은 주인공이 한 거 아닌가. 다른 선택으로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나.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변곡점들은 분명 존재했으니까.
나름 행복한 삶을 맛보았던 인물이 소설 속 거지 노인과 같은 장소에서 비슷해 보이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녀의 삶이 먹먹한 이유는 처음에 보였던 태도와 종말을 향해 치달으면서 변화해가는 모습에서 비쳐지는 온도차가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박한 꿈을 꾸며 자아성취를 하고 주변인들을 넓게 포용하던 인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한때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꽃과 같던 그녀. 점점 수분을 잃어가면서 마른 꽃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관찰카메라로 따라가듯 그리는 작가. 서술이 담담해서 더욱 묵직하다. 생명이지만 과연 생명일까 싶은 단계. 훅 자그마한 바람임에도 한순간에 우수수 부스러진 꽃잎의 잔해를 보는 것 같은 마음에 먹먹한 여운으로 맴돈다.
삶이 무겁고도 무서운 이유는 서서히 진행되는 속도에 있다. 사소한 사건들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변해가는 과정에는 스스로도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담긴다. 차갑게 느껴지던 물체도 오래 잡고 있으면 열적 평형이 이루어진다. 그 속도는 의외로 느리다. 이게 아니다 싶어 움찔하던 대상도 인간에게 녹아들면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소설 속에서 내내 많은 인물들을 천천히 허물어뜨리던 알코올 중독처럼 말이다. 그들의 첫 잔도 포도주 한 잔처럼 가뿐했으리라. 졸라는 사소한 시작이 습관이 되다 일상으로 흡수되기까지의 과정을 촘촘한 시각으로 조명한다. 삶을 좀먹고 파멸시키는 요소도 출발은 사소했음을 보여주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건 삶의 극한으로 내몰린 여주인공이 최후에 했던 선택이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대장장이가 내미는 손을 끝내 잡지 않은 것. 꺼져가는 삶을 인지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고갱이와 같은 자존감 혹은 존엄성이라 불러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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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p254, 밑에서 3째줄: 그네→그녀
(덧붙임) 소설에 몰입하는 데 잠시 방해를 받은 부분이 있다. 남편 2의 엄마로 언급된 작품 속 노인은 1권 252쪽에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고 묘사된다. 이 문장을 눈이 멀었다는 의미로 해석한 나는 이후의 문장들에서 노인이 멀쩡하게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면을 읽고 혼란에 빠진다. 살짝 헷갈린다. 한쪽 눈인가. 되돌아가서 해당 페이지를 확인한다. 문장 어디에도 한쪽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2권 102쪽에서 한 눈이 이미 죽어 있었다는 문장이 나올 때까지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옥의 티처럼 끼어있는 한 문장이 몹시 껄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