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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많은 작가들이 작품 시작 전에 ‘이 책을 누군가에게’를 언급한다. 그 누군가는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일터이다. 앤디 위어는 소설 『아르테미스』에서 어떠한 찬사를 보내도 부족한 이들이라며 달 사령선 조종사 7명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 독자는 작가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소설 『팔코너』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 ‘페데리코 치버에게’가 궁금했다. 작가 이름이 존 치버이니 가족의 일원이리라. 작가는 누구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었을까. 맨 뒤의 작가 연보를 먼저 보게 된 이유이다.
페데리코는 작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형과의 애착 관계, 양성애 스캔들, 알코올중독, 우울증. 연보 속에서 작가의 삶은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해도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듯했다. 더 궁금해졌다. 그는 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며칠에 걸쳐 이 책을 읽은 나는 도돌이표를 찍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었건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몹시 애매하다. 어어어 하다 벌써 마지막까지 와버린 기분이랄까. 도대체 존 치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지.
두 번을 읽고 나서야 다가오는 메시지가 몇 개 있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니 작가의 의도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책을 통해 무언가를 붙잡게 되었다는 것이니.
‘팔코너’는 교도소 이름이다. 소설『팔코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불안정하다. 교수였던 주인공 패러것은 형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온 마약중독자이다. 그는 독방동에서 수표 위조범, 비행기 납치범의 공범, 보석 강도, 아내살해범, 부친살해범, 누명을 쓰고 들어온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 책은 감옥 안에서의 일상과 인물들과의 관계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메시지는 세 가지이다.
첫째, 삶과 사람의 속성이다.
이토록 지질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존재라니! 시작은 사소했다.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은 격변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의 동료인 치킨 넘버 투는 모든 게 실수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살인도 끔찍한 실수가 된다. 작가는 아무렇게나 떨어지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건조기 속 빨래들에게서 영혼이나 천사의 부주의한 추락을 발견한다. 우연과 불확실한 사건에 지배되는 삶의 본질을 통찰한다. 다음의 위치를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양자역학의 세계처럼 말이다.
둘째, 삶과 사람의 경계이다. 이성애와 동성애, 수감자와 교도관, 교도소 안과 밖의 삶,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 중독과 중독에서의 해방을 정의하는 경계가 허물어진다.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했던 주인공이 동성애에 빠지는가 하면 교도관들은 수감자들보다 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살인자라고 해서 교도관들과 별반 다르게 묘사되지 않는다. 작가가 그리는 감옥 안에서의 삶은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들의 대화와 사연과 일상을 따라가 보면 교도소 밖에서의 삶이 과연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에 틈이 생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마약 중독으로 정기적으로 지급받던 약이 어느 순간부터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과연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물질인가 정신인가 생각이 깊어진다.
팔코너 교도소 이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데이브레이크 하우스’는 새벽을 여는 집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기관을 의미한다. 밤과 낮의 경계. 새벽은 아직 본격적인 하루를 출발하기 전이다. 가시적인 하늘만을 생각한다 해도 그날 하루가 맑을지 흐릴지 예측하기 난감한 시각이다. 천사와 악마적인 면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 같다. 좋다 나쁘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삶과도 닮아있다. 이 소설의 정체성은 이런 모습일까.
셋째, 해피엔딩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 속의 엔딩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소설 『팔코너』의 엔딩 장면을 보니 불현 듯 유은실의 동화『마지막 이벤트』가 생각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매번 울컥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작품이다. 동화 속 할아버지는 당신의 장례식을 위해 유쾌한 마지막 이벤트를 준비한다. ‘마지막 이벤트의 장소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고인을 편안히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면, 그 삶은 완벽한 해피엔딩이지 않을까.’그때 썼던 내 리뷰의 마지막 문장이다.
삶에 있어 해피엔딩이란 어떤 모습일까. 왕자의 키스로 잠에서 깨어난 공주, 환하게 마주 본 두 사람의 모습이 완벽한 클로즈업으로 마무리되는 애니메이션. 깔끔한 해피엔딩이란 멋진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까지 마신 어떤 날의 저녁 식사 같은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예전의 나는 딱 보여주는 것까지만 바라보았다. 삶이란 실제로도 그런 모습이기를, 해피엔딩의 매순간이 일상으로 이어지리라 착각했던 것 같다.
이게 뭐야! 거창한 것을 기대한 채 부라리던 두 눈은 읽어가는 책이 늘어날수록 종종 갈 곳을 잃었다. 뭔가 나오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문학작품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점점 엔딩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다. 왕자와 공주가 서로를 바라보던 그 이후에도 그들의 삶이 해피엔딩만큼의 기쁨으로 쭉 이어졌을까. 정답은 ‘알 수 없다’일 것이다. 열린 결말로 끝난『팔코너』의 주인공 패러것의 엔딩 그 후가 궁금했다.
존재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물체의 움직임이든 인간의 삶이든 관계이든 많은 대상은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다. 물체의 운동만으로 범위를 한정지어 속력을 측정한다면 매순간 들쑥날쑥일터이다. 빠르다가 느리다가 멈췄다가 다시 되돌아갔다가 일정하다가 다시 나아가기도 하리라. 삶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당장 1초 앞도 모르는 상황이 매순간 펼쳐지니까. 확실한 속성을 정의하기도, 경계를 세우기도, 엔딩을 말하기도 모호하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예전에 기대했던 해피엔딩이란 완벽한 등속직선운동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어떤 구간에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순간 말이다.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같은 패턴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삶을 인지하는 마지막까지 우리가 맞이하는 크고 작은 엔딩은 그 후의 삶을 짐작하지 못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어떤 순간도 아직은 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이런 게 삶이고 관계의 속성이라면 끝이라고 생각해왔던 절망적인 관계에서도,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바닥이라는 생각이 드는 삶에서도 조금은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엔딩, 그 후가 삶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정의되지 않을 것이니.
※ p155, 8~9째줄: 패러것으도 → 패러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