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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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많이 왔는데 거긴 괜찮아, 엄마?

우리는 집에만 있는데 뭘. 넌 출근하는데 어렵지 않았어?

지난주 금요일에 방학식 해서 오늘은 집이야.

다행이네. 요즘에도 바쁘냐?

일이 끊이지 않네. 그래도 틈틈이 책 읽으며 쉬고 있어.

지난번에 아팠던 건?

많이 나아졌어. 이제는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어.

엊그제는 **이가 다녀갔어. 출장 왔다가 잠시 들른 거라고.

걔네도 빨리 이사해야 할 텐데. 거긴 워낙 집값이 비싸서.

둘이 살아도 화장실 하나면 불편한데 넷이서 얼마나 불편할까. 예전엔 푸세식 화장실 하나를 몇 집이서 어떻게 이용했나 몰라.

오늘처럼 비 많이 오면 넘칠 것처럼 출렁거렸잖아. ~~

부모님과 함께 지나온 가난은 예전에 보았던 영화 속 장면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머님이 자장면을 싫다고 하신 건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그래서 가난에 대한 문학 작품을 접할 때면 유난히 예민해졌다. 조금 더 기대하게 되거나 조금 더 실망하곤 했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가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예 의미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소설 자체로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부와 가난의 차이는 뭘까. 예전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지금, 소모하는 물질만을 따진다면 그리 많은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손안에 빵이 없는 건 같은데 안 사는 경우와 못 사는 경우의 차이.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분명 다르다. 전자에는 여유가, 후자에는 박탈감이 흐른다. 생활의 많은 면에서 이런 경우의 수가 적용된다면 영혼이 잠식되어 빈곤감을 느끼게 될 소지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릴 적의 나에게는 매사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으로 나타나곤 했다. 가능성의 수의 차이. 가난과 부의 결정적인 차이에 대한 나름의 결론이었다.

 

거지 소녀는 주인공 로즈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10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소주제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가난을 무대로 다양한 상황들이 픽션과 다큐를 넘나들듯 펼쳐진다.

뒷면의 겉표지에 쏟아지는 각종 찬사의 글은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니! 한데 다 읽고 나니 힘이 빠졌다. 재미도 없었고 단편도 어미가 불분명한 말을 들은 듯 결말이 어정쩡했다. 장편으로 보았을 때도 도무지 어느 부분에서 감탄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났다. 남들 다 입었다고 외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달까. 나와는 맞지 않는 소설이라고 굳이 고상하게 포장한다.

가정폭력, 계모, 학교 내 성폭력, 성추행, 불륜. 분명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가 넘치는 소재로 가득했건만.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문체 때문일까.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장마철에 사회면이 빽빽한 신문지를 씹어먹은 기분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표제작 <거지 소녀>에 등장하는 번 존스의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그림은 가난에 관한 많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가난에 잠긴 소녀는 왕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를 응시하는 걸까. 가난 밖에 있는 왕은 어느 정도까지 소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왕관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왕과 거지 소녀의 이야기.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필로그도 동화같이 그려질 수 있을까.

코페투아왕이나 소설 속 패트릭은 모두 가난 밖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었다. 부유하기 때문에 가능했다.(p145)’,‘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p147~148)’ 그들이 가난한 그녀들 안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과는 무관한 감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한 이는 물리량에 주눅이 든다. 물질 자체의 값어치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디를 가나 크기가 눈에 띄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께였다. 수건과 러그, 나이프와 포크 손잡이의 두께, 그리고 침묵의 두께.(p157)’,‘장소가 사람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p157)’ 소매가 짧아진 길이의 옷이라든지 코끝 시린 방 안의 온도라든지. 그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서 종종 울컥함과 함께 떠올랐다.

정규직으로 28년을 넘게 일해온 나는 엄청난 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는 만큼은 되었다. ‘왜 자신은 항상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 같은지 의문이 들었다.(p237)’,‘떠나온 삶과의 간극(p334)’이 커서 한동안은 남의 자리에 앉은 듯 어색했다. 지금은 편안하다. 가난으로부터 떠나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판단 지표를 나는 물리량에 대한 느낌에서 찾는다. 옷을 전혀 사지 않는 지금, 15년이 지나 목이 다소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다녀도 전혀 서글프지 않다. 구멍 난 양말을 통해 드러나는 엄지발가락에서 수치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던 순간, 나는 가난으로부터 빠져나왔음을 느꼈다.

 

가난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을 꺼내어본다. 소설 속 상황들이 비빌 번호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내가 겪었던 갈등, 눈물, 슬픔, 좌절, 선택의 봉인이 풀린다. 그런 순간들이 지금은 감사하다. 굳은살처럼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으니. 그 이전에는 상처가 있고 이는 아픔을 전제로 하니 굳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10여 년 이어지던 아버지의 실직,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던 어머니,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단칸방, 방문을 열면 훅 들어오던 바깥 공기, 밖과 별반 온도 차이가 없던 방에서 얼어버린 걸레, 천장에서 떨어지던 빗물을 받기 위해 놓였던 방안의 그릇,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나만의 방, 실업계 진학을 고민했던 중학교 3학년, 과외 아르바이트로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했던 대학 때의 주말들을. 그 중심에 자리한 부모님을 떠올렸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형제들에게 끈끈한 유대감을 품게 해주셨고, 물리량에 압도당하지 않는 유머 감각으로 자식들을 놓지 않으셨던 당신들로 인해 나는 웬만한 시련에는 비틀거리지 않고 가난의 비를 맞고 있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심장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는 52년간 읽어온 나의 부모님이 가난에 관한 최고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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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7-31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생각한 ‘가난‘소재의 줄거리가 아니어서 좀 실망했어요. 게다가 연작소설이라 시간과 배경이 그냥 휙휙 점프해버려서 곳곳의 구멍들이 되게 아쉽더라고요. 역시 저는 장편이 더 잘맞다는걸 또한번 느꼈습니다ㅎㅎ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이 말에 너무 공감합니다. 하나 더 붙이면 ‘하고 싶고 할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이 저의 모습이랄까요. 뭘 선택하든 단가를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비용, 시간, 에너지, 리스크, 영양가, 이득 등등. 그러다보니 손해를 안보려고 선뜻 나서질 못해요. 포기하면서 나름의 타협을 한달까요. 어쩌면 저는 이런 내용들을 작품에 기대했었나 봅니다.

말씀하신 가난의 물리량이 참 흥미로워요. 낡은 옷만 걸쳐입어도 수치스럽지 않다는 건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때문이라 보여집니다. 어릴때 늘 유행만 쫓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는 너무 한심해했었거든요. 무조건 비싼 걸 사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여기는 부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개성도 전혀 없고요. 어린 나이에 저도 나비종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거 같아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이전에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니 자존감이 생기더라고요. 제 인생에서 값진 교훈 중 하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책리뷰도 쓰고 나비종님과도 알게되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

작품성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완성도면에서는 영 거시기했던 책이었는데 무사히 완독하셔서 축하드립니다. 다음에는 더 괜찮은 작품을 선정해볼게요! 7월도 이제 몇시간 안남았는데 마무리 잘 하시고 좀더 나은 8월을 맞이하시길 바랄게요! 고생하셨습니다^^

나비종 2020-07-31 10:45   좋아요 1 | URL
서술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같기도 해요. 제가 원한 건 하늘에서 땅까지 강하게 내리꽂는 소나기 내지는 가느다랗더라도 한 줄로 이어지는 빗줄기 같은 거였나 봅니다. 작가는 천천히 내리는 눈발처럼 하늘하늘 담담하게 글을 써내려갔는데 말이죠.
무언가를 하기까지는 한 사람의 온 에너지가 간절하게 모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고 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이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덜해서가 아닐까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로 사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자존감.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리더라구요.^^

어떤 작품을 선정하셔도 최상의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의 소유자라 작품 선정은 필꽂히시는대로 하셔도 아~~~무 상관없습니다만ㅋㅋ
물감님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맞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