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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평점 :
사탕이었던 것 같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반야심경>의 무려 260개의 글자를 외우도록 끌어당기던 막강한 힘은. 아이에게 사탕은 돌멩이계의 다이아몬드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나. 몇 살 때인지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워낙 달달 외웠던 탓에 아직도 익숙한 유행가 후렴구처럼 툭 치면 '고득아뇩다라~'가 바로 튀어나올 정도이다. 어머니께서 공양주로 일하시던 동네 절에서는 주말마다 어린이 법회를 열었다. 언니, 동생들과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고 밥을 먹고 스님의 말씀도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난다. 딱히 작정하고 불교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신 거기, 절이 있었고 학교 가듯 친숙한 장소였던 까닭이다.
코를 막고 양파를 먹으면 달짝지근하고 사각거리는 그것이 양파인지 사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는 냄새와 함께 맛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코를 틀어쥔 손을 떼어내는 순간 매콤한 냄새가 훅 스치며 “이런! 양!파!” 임을 깨닫는다. 반가웠다. 이제 양파 맛이 나는 양파가 양파임을 알게 될 거라서. 단지 글자의 배열에 지나지 않던 글귀의 뜻을 알려줄 책이라는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단순한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의 이름을 불러 꽃으로 피어나기 직전의 두근거림이랄까.
후아! 그래서 대체 ‘반야바라밀다심경’이 무슨 뜻이냐고요! 제목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광활했다. 불교의 4법인, 연기, 동양 문명의 테마, 3학, 팔정도, 사성제, 계정혜, 슐로카, 3품, 금강경, 선불교, 대승불교, 삼승, 비구, 아라한, 6바라밀, 오온, 육불, 이런 십.팔.계! 영화 <알라딘>에 나올 법한 양탄자를 타고 마음은 슝 날아갈 준비를 마쳤건만 푸르르 고장 나서 불시착한 채로 비포장도로를 꿀렁거리며 지나온 기분이다. 멀미, 멀미, 이건 멀미였다. 거침없이 밀려드는 불교 지식의 쓰나미를 감당하지 못한 나는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유혹을 ‘언젠간 가겠지,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이제껏 없던 불심으로 뿌리쳤다. 여러 스님들과 싯달타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제법 여유가 있었단 말이다. 145쪽에 와서야 ‘반야’가 지혜 혜(慧)의 음역임을 알았다. 숨이 찼다.
TV 속에서 클립 영상으로 보던 저자는 거침없는 인물의 표상이었다. 그의 책은 처음 접한다. 강연 투로 서술된 책속의 문장들은 거침이 없었지만 혼자만 거침없고 장황하다는 느낌이다.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보유하신 분이라는 것은 잘 알겠는데 그 서술방식이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기를 원하는데 저자는 한달음에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서 설명하고 다시 불쑥 올라가는 방식이다. 다소 어수선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저자의 걸음을 따라가다 지쳐버린다.
기다리던 부분은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가 시작되는 201쪽부터 등장하였다. 하아! 이 스무 장을 보기위해 200쪽의 걸음을 동동거리며 기어왔던가. 막상 해설은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그것도 배경지식이라고 꾸역꾸역 종이에 메모하면서 공부한 효과가 마지막 장에 와서 효과를 발휘했다. 이러려고 그렇게나 열심히 불교의 흐름과 용어를 펼쳐놓으셨던가. 머쓱해졌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의 핵심을 260개의 문자로 요약한 단행본이다. ‘심경’은 핵심을 요약한 경전이란 뜻이다. 이 책에 나온 것은 삼장법사 현장이 저술한 것이다. ‘반야’는 ‘지혜’를 의미하는 음역이며, ‘바라밀다’는 ‘극치, 완성’을 의미한다. 합치면 ‘지혜의 완성’이다. 반야경은 대승불교의 출발이다. ‘대승’은 ‘큰 수레’로 대중을 향해 열려있는 불교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다. 지혜와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리’와 본질, 실체를 의미하는 ‘살타’가 합쳐진 말로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이다. 이는 수행자에 국한된 소승불교가 대중에게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당신도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반야심경>의 지향점은 무(無)이다.
책속에 언급된 일화와 이론들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일상에 바로 적용하여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얻었다.
첫째, 경허 스님의 이야기를 통한 ‘방하착(放下着)’이다. 정작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넌 스님은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이를 지켜본 사미승은 그 생각을 계속 내려놓지 못하며 생각으로 여인을 업고 가는 셈이 되었다는 메시지이다.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종일 실험 평가를 하느라 5분도 쉬어보지 못했다. 화학 실험이라 안전사고가 일어날까 예민했고 빈 시간이면 다음 반 실험을 위한 준비에 분주했다. 피곤의 극치는 마지막 반에서 터졌다. 평소 수업 태도가 그지 같아서 들어가기 전에 몇 번 릴렉스를 한 다음 들어가는 반이다. 역시나 나머지 반들에게서는 일어나지 않던 일이 발생한다. 지금 생각하면 사고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단지 내말대로 실험하지 않은 것뿐인데. 순회하는 내 눈에 띤 장면은 지시약을 1방울 넣으라는 나의 주의사항을 깔끔하게 저버리고 뚝뚝 떨어지는 방울들과 보란 듯이 보라색과 진청색으로 그득 채워진 홈판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희미한 파스텔 톤으로 눈물 몇 방울 정도의 양이 들어있어야 할 그곳이, 보여서는 안 되는 색깔을 띤 단청 색 찰랑거리는 오줌단지가 되어버린 거다. 이거 누가 그랬어! 늘 그렇듯 결과는 있으나 원인 제공자는 밝혀지지 않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누가 그랬다고 말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조원 전체를 태도에서 감점을 한다고 버럭 하니 몇 마디씩 변명이 쏟아진다. 심증 가던 그 아이는 바로 옆의 조였다. 아이의 문장 하나가 마음에 꽂힌다. 아이들이 방해된다고 만져보지 못하게 해서 떨어뜨려보고 싶어서 한 방울 넣어본 거예요. 족히 10방울은 넘어 보이는 색깔을 현미경 수준으로 축소한 아이의 마음이 순간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깔 확인은 다 한 거야? 예. 얼른 뒷정리 해.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아까의 버럭이가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경허 스님의 ‘내려놓음’이 생각났다. 그 순간까지 버럭이를 놓지 못하고 업고 왔구나. 뭐 좋은 거라고 붙들고 있나, 얼른 내려놓아야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둘째,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싯달타 깨달음의 핵심이다. ‘어떠한 사물도 그것 자체로 단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변화가 오면 결과는 반드시 변하게 마련입니다.(p123)’ 사랑이나 사람이 변하는 것도 연기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던 거다.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없는 것이었던 거다. 의식하지 못한 원인들이 계속 쌓이고 쌓인 것이 갑작스럽다고 느껴지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조금 더 세심하게 잘 바라봐야함을 깨달았다. 분명 최초의 한 방울이 있었을 거다. 그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셋째,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나는 좆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비하와는 전혀 다른 의미일 터이다. 나를 바라보며 겸손해지고 욕심을 버리라는 의미라 해석한다.
<반야심경> 해설을 음미해보니 나의 생활 패턴에 대한 학문적인 지지 기반이라도 얻은 듯 뿌듯하다. 어렴풋이 해답을 얻었다. 비행기를 타고 뿌연 구름 속을 지나며 여기로 가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이며 맑아진 공간으로 들어와 버린 느낌이랄까.
260개의 문자 중 자주 등장하는 한자는 공(空)과 무(無)이다. 몇 번이나 나올까 헤아려본다. 공은 7번, 무는 21번이다. 흥미로운 점은 초반에는 공이 계속 등장하다 무가 나타나면서 릴레이 바턴을 이어받은 듯 공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무소유와도 연결이 되는 없을 無. 글자의 의미와 느낌이 참 좋다.
어느 순간부터 갖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심장 언저리를 맴도는 생각이다. 물건을 볼 때면 이것도 결국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무소유를 지향하기로 했어. 나를 위한 물건을 사는 일이 줄었다. 지금 가진 옷, 구멍 날 때까지 입을 거야. 주변인들에게 웃으며 말하는 나. 옷을 사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나마 소비하는 분야가 책인데 지금 책장에 꽂힌 책이라도 다 읽자 하니 현저하게 구입량이 줄었다. 허무함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섞여 점점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사물에도 기가 있어 색으로 표현된다면 어떨까. 손길이 닿은 횟수만큼 다른 색으로 진화하는 거다. 손이 많이 닿은 물건일수록 찬란하고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전혀 닿지 않는 것은 흑백으로 음영 처리되어 콕콕 집어내어 버릴 수 있도록. 무소유의 관점에서 집안을 바라보니 버릴 것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몇 년 간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을 찾으면 되는 거다. 서른 한 가지도 넘게 골라내는 재미가 붙는 중이다. 버리니까 공간이 생기고 공간이 생기니까 숨통이 트인다. 물건 대신 공간을 얻는다. 새로운 공간이 신선한 공기로 채워져 덩달아 가벼워진다.
삶은 수학이 아니다. 3-3=0 이라는 수식의 수학적 결론은 0이지만 삶에서는 + 와 – 가 제로로 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는 까닭이다.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이란 이런 걸까. 매순간 변화하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더하거나 덜어내면서 0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 말이다. 감당하기에 버거운 물건들을 소유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은 물건을 덜어낼 시기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버릴 생각이다. 감정이 될 수도 있고 관계이거나 사물이 될 수도 있는 무언가를 향한 치열한 영점 조절을 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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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 8째줄 : 못했다는데 → 못했다는 데
p130, 밑에서 3째줄 : 영예 → 명예
p169, 2째줄 : 있어났는데 → 일어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