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숲 - 신영복의 세계기행, 개정판
신영복 글.그림 / 돌베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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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나는 책이 있다. 천천히 읽다보면 향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흠뻑 젖는 책.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일상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코끝으로 깊숙이 스며들던 향기가 오래 맴 도는 책이다. 그의 책에서는 나무 향이 난다.

그의 책들은 매번 읽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때론 불편하고 가슴 아프지만 잊은 듯이 그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본다. 일상의 관성에 마음을 내맡긴 채 심장이 굳어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종종거리다 이 책을 만났다. 심장이 차츰 몰랑거린다. 분명 달달한 문장들은 아니다. 나를 들썩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여행 관련 콘텐츠들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요즘 TV에서 나오는 예능프로그램은 크게 세 가지 부류라던가. ‘여행하기, 먹기, 여행가서 먹기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불과 몇 년 전보다 여행을 향한 관심들이 부쩍 높아졌다. 여행에 대한 책들도 많이 등장했다. 여행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부터 여행지에서의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가 듬뿍 담겼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담론>, <강의>, <처음처럼>으로부터 얻은 작가의 이미지에서 여행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그의 책은 여행의 무엇을 소개해줄까.

책날개를 넘기니 세계지도가 펼쳐진다. 각 대륙에 분포한 54개의 장소들이 빨강, 초록, 파랑, 보라, 회색빛 LED전구를 심어놓은 듯 점점 박혀있다. 우와! 참 많은 곳을 기행 하셨구나. 위키 백과적인 지식만이 실려 있지는 않을 텐데. 맛 집이나 여행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 등을 소개하실 리도 만무하다. 이 많은 장소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점점 더 궁금해진다.

 

1부는 콜럼버스의 우엘바 항구에서 출발한다. 원주민과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역사의 서술은 강자의 논리를 숙고하게 만든다. 땅을 소유하고자하는 인간의 욕심은 집착에 가까우리만큼 집요하다. ‘대륙의 발견이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원래부터 그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의 존재를 투명하게 만드는 잔인한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 바꾸기를 말하는 것부터 그의 세계여행은 시작된다.

그의 여행지를 따라가며 세계사에 등장하는 전쟁들을 새삼 들추어본다. 스페인 내전,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30년 전쟁, 베트남 전쟁, 2차 세계대전, 프랑스 혁명, 피의 강 전투 등 전쟁의 현장들이 다른 의미로 자리한다. 전쟁으로 스러져 흙이 된 사람들의 존재가, 무심코 잊혀져있던 과거의 그들이 저자의 발밑에서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유럽 여행을 그려볼 때면 알프스 산맥의 광활한 순백, 에펠탑의 화려한 조명,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지의 찬란함,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을 압도적인 미술품 등이 궁금했다. 그는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했던, 앞으로 존재할 인간을 본다. 성채와 신전들 아래 묻힌 수많은 주검들을, 콜로세움에서 혈투하던 동물과 사람들을 떠올린다. 만리장성의 거대함을 보고 감탄하기보다 건축물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속에 담긴 무수한 인간의 희생을 본다. ‘건물을 바라볼 때는 크기를 보기 전에 먼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건물인가, 누구를 위한, 누구의 건물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p148)’ 건물 이전에 그 건물을 세운 사람들과 그 안에 존재했을 사람들을 망각한 채 껍데기만 보려한 거다, 나는.

 

2부에서 저자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을 읽으며 스타의 꿈이 좌절된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이며 어떤 가능성을 열어 주는 꿈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214)’, ‘꿈보다 깸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p218)’ 꿈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해야하는지 곰곰 생각해본다.

마야, 아스텍, 잉카 문명의 고대인들이 인간을 희생으로 치른 의식들은 무엇을 위한희생이었을까. 인간의 구원이 오로지 인간의 희생으로서만 가능하다던 그들의 믿음은 맹목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행해지는 그보다 더한 세상의 모습들을 보면 과거의 그들이 마냥 미련했다 치부하기는 어렵다.

건물을 지탱하는 힘은 보이지 않게 묻혀있는 기초공사의 탄탄함에서 온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진정한 변화는 지상의 변화가 아니라 지하의 변화라야 합니다.(p253)’ 지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중이라 불리는 집단일 터이다. 먹이피라미드로 보면 생산자인 식물이 같은 맥락일까. 나무 한 그루는 힘이 없는 듯 보이지만 나무와 나무가 더불어 모인 숲은 막강한 존재가 된다. <더불어 숲>이라는 책의 제목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울창한 숲이 되려면 나무와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숲을 연상하며 손과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작가의 글에 BGM처럼 흐르는 인간이라는 음악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예전에는 빠른 게 좋았다. 이제는 느린 게, 기계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대상들이 좋다. 그의 문장은 느림의 미학을 구체적인 비유로 보여준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p370)’ 느리고 향긋한 가을 길의 풍경을 상상한다. 천천히 호흡을 한다. 마음이 화해지면서 평온해진다.

 

차례 자체가 화두이면서 한 줄의 경구 같다. 차례만 따로 천천히 읽어보아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1부와 2부는 어찌 보면 대조적이다. 1부가 서사시라면 2부는 서정시의 색채가 짙다. 1부는 땅, 전쟁, 역사, 과거를, 2부는 하늘, 관계, 문화,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지마다 이러한 요소를 중심으로 이야기와 생각이 펼쳐진다. 1부를 지나 2부까지 모두 건너니 오롯이 현재가 남는다.

꽉 차지 않은 여백이 좋다. 그의 글이 건네는 여백은 깊고 넓다. 엽서 그림들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 안으로 포옥 들어간 나는 문장 사이사이에 나의 생각을 채우며 그를 따라 걸었다.

여행은 돌아옴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p14)’ 막연하게 꿈꾸던 여행에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준 책이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지, 가슴에 신선한 공기를 품고 돌아와 어떻게 현재를 걸어가야 할지 이끌어주었다.

2020일의 시간과 함께 흘러들어왔을 방대한 지식을 그는 결코 앞세우지 않았다. 담담하게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며 스스로의 울림을 지닌 내용은 편지글 형식의 친근함과 함께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그게 공명이 되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걸까. 흔들리는 나무가 된 나. 이 글을 읽고 그의 책을 펼칠 당신 역시 흔들리는 나무가 된다면. 이렇게 흔들리는 나무들이 어느 순간 더불어 숲을 이루는 걸까.

그의 여행기는 달랐다. 그는 여행지와 사람을, 역사와 문화를, 개별적인 존재와 관계를 연결하여 나에게 목적어를 넘겨주었다. 현재에 있는 나는 무엇을 볼 것인가. 목적어를 안게 된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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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9-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지내시나요, 나비종님?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감성이 한층 더 깊어진 리뷰로 잠시 마음에 쉼을 얻고 갑니다.

저도 이제는 신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날로그가 더 그립고 클래식한게 저랑 맞더라고요. 젊은 나이지만 마음은 아재가 되었나봅니다ㅎㅎ

요즘에 도통 독서를 못했는데 그나마 나물모임덕에 끈을 놓지는 않았어요.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래서 나비종님과 빨리 책 수다를 떨고 싶어지네요^^

나비종 2019-09-28 01:24   좋아요 1 | URL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부드러운 휴식처럼 읽는 이를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죠. 그런 글의 향기가 제 리뷰에 조금 묻어나왔나 봅니다.^^

아날로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이메일이란 게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0.1초만에 상대에게 전달되는 그 스피드함에 감탄을 한 기억이 납니다. 한데 요즘에는 어쩌다 천연기념물 보듯 드물게 눈에 띄는 빨간 우체통을 보게 되면 누군가에게 손편지를 쓰고픈 생각이 들곤 해요. 상대에게 전달될 순간을 상상하며, 다시 상대의 마음이 전해져오는 시간까지의 기다림이 정말 행복하고 설렜거든요.ㅎㅎ

저역시 요즘 이래저래 좀 바빴는데 나물과의 소박한 약속 덕분에 무사히 읽어냈어요. 이 댓글 달고 얼른 물감님 방으로 놀러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