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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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계란 한 판을 득템한 지난 주 화요일에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던 지지난 주 화요일, 퇴근 후 서둘러갔건만 아파트 장터 계란 아주머니는 이미 철수하신 후였다. 절망 후에 얻은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계란. 이토록 다양한 버전의 음식으로 변모하는 재료가 있을까. 계란프라이, 계란찜, 계란말이, 계란조림, 계란탕에 이르기까지 단품으로도 손색없는 반찬이 되는데다 평범한 라면에 영양가를 더해 레벨 업 시켜줄뿐더러 떡국에서는 화룡점정이 되는, 반찬 계를 드넓게 섭렵하는 존재이다.

삐까! 드디어 계란을 득템하였어!”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엄마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고3. 벌써부터 미래가 그려진다는 표정이다. 계란의, 계란에 의한, 계란을 위한 요리. 계란에서 시작해서 계란으로 마무리될 요리의 향연이다.

 

계란 같은 책이다. 제목처럼 설득의, 설득에 의한, 설득을 위한 책이다. 설득의 모든 버전이 총망라되어 있다. 책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설득과 연관이 된다. 확고한 가치관을 지녀 설득되지 않는 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이, 그에 의해 설득이 되는 이들이 존재한다. 설득의 소재도 다양하다. 사랑과 결혼의 조건, 남성과 여성의 사고방식의 차이, 문학에 대한 관점, 지위와 외모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 등이 제시되어 서로가 서로를 설득한다. 다른 이의 설득으로 남자와 이별을 한 여자가 팔 년 후에 그와 다시 만나 서로의 진심을 알고 결국 결혼한다는 내용.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책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펼쳐놓고 독자들에게 묻는다. ! 당신들이 그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인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오시나요? 등장인물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설득의 과정을 통해 설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작가에 의한 설득의 시작이다.

 

지위와 외모 등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월터 경과 엘리자베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속적인 조건들을 고수한다. 당신 같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작가는 이 두 명의 캐릭터를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외적인 조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갈등을 유발한다. 오히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기준이 명확하므로 행동이 쉽다. 문제는 어정쩡한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조건들은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혼란을 안겨주며 주춤거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여주인공 앤에게 어머니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는 레이디 러셀조차 재산이 변변치 않은 남주인공 웬트워스와의 이별을 설득한다. ‘모험 보다는 안전이 설득의 무기로 사용된다. 열아홉 살 앤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설득이 되었을까. 나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을 넘어서는 선택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누구든 어느 정도는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하빌 대령과 앤의 대화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사랑을 대하는 가치관의 차이에 대한 설득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탁구공을 주고받는 듯 대화에서는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증거로 판가름할 수 없는 견해의 차이니까요. 어쩌면 남녀 모두 처음부터 각자의 성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p310)’ 남성과 여성의 본성과 사회적 장치까지 언급이 되는 대화에서 합의점은 없어 보인다. 대화를 따라가면서 궁금했다. 논쟁에 가까운 이 대화를 작가는 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이 모든 것, 남자가 자기 삶의 보배인 존재를 위해 견뎌낼 수 있는 모든 일들, 성취해낼 수 있는 모든 위업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전 다만 심장을 가진 남자들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p311)’, ‘당신이, 그리고 당신 같은 남자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온당하게 대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중략) 제가 여자들을 위해 주장하는 특권이란 (중략) 더 이상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희망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여자는 남자보다 더 오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p311~312)’ 결국 대화는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며 서로의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진정한 토론의 정석이 아닐까. 참 현명한 작가이구나 싶었다.

 

설득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적어도 시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공간적인 상황이 달라져 웬트워스가 다시 앤의 삶 속에 배치되자 예전의 감정이 다시 새록새록 살아나는 상황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 나는 어느 것에 의지하며 삶을 견디고 있는 걸까. 이건 인간 본성의 문제인 걸까.

앤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인간의 본성을 생각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굳은 심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p119)’ 앤이야말로 굳은 심지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끄트머리에서는 앤을 지칭하며 선한 영혼(p312)’이란 말이 등장한다. ‘흔쾌히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서 자신을 잊게 해줄 일거리를 찾는 힘은 오로지 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었다.(p205)’ 앤의 친구 스미스 부인을 묘사한 문장이지만, 앤에게도 적용되는 문장이라고.

서로의 진심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주인공들의 대화에서는 설득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다. ‘그분보다 더 큰 적이 한 명 있었던 게 아닐까 하구요. 바로 저 자신이지요.(p327)’ 자기검열이란 말이 떠오른다. 어찌 보면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과정 아닌가. 삶은 수많은 설득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설득을 당하거나 설득을 하거나. 이런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일 것이다.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관점이 다른 독자들에게 각각 다른 색깔의 느낌표를 찍어준다는 점이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이 책의 경우, 품고 있는 메시지에 방점이 찍히는 부류이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 있겠지만, 설득에 대한 다양한 버전 중 무엇을 중점적으로 요리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사랑도, 결혼이나 삶,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벤윅 대령과 앤이 주고받은 대화의 시간들이 나는 가장 좋았다. 시에 대해, 시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현 시대에 대해, 자신이 좋아하는 시의 구절에 대해, 시를 음미하는 방식에 대해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은 부럽기까지 했다. 누군가와 시나 책에 대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어떤 시가 좋았다든지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좋았다든지 나는 이 구절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든지. 누군가와 공유하는 시간들이 이런 대화들로 채워진다면 얼마나 벅찬 기분으로 행복할까.

 

음악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 ‘소음에도 사람마다 나름의 취향이 있게 마련이다. 소리는 크기보다도 종류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도 들리고 아주 거슬리게도 들리니 말이다.(p178)’ 피아노 전주가 유난히 좋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글쓰기를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인다. 리듬만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노래가 있다. 음의 높낮이는 확실히 심장 박동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글이야말로 대단한 예술이다. 리듬의 입장에서 글은 음의 높낮이가 없는 밋밋한 흑백의 컬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한 가지 음을 지닌 글에 리듬감을 주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일 터이다. 글이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드는 음악이다. 독자가 부여하는 리듬에 따라 글은 매번 다른 음으로 다가올 것이니. 이런 면에서 모든 작가는 뛰어난 설득가인지도 모른다. 글을 통해 독자의 심장을 설득하는. 글의 힘은 그 시너지의 합력으로 정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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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5-07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올렸습니다. 나비종님과 달리 전 많이 힘든 작품이었네요^^;
확실히 같은 책인데 느낀바가 달라서 신기하고 그걸 공유할 수 있다는게 너무 좋습니다ㅎㅎ

나비종 2019-05-07 14:10   좋아요 1 | URL
미투입니다.ㅎㅎ 하얀 쌀밥만 꾸역꾸역 먹는 기분이었달까. 드.럽.게. 재미없었습니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의 후손 아니냐며 제 자신을 설득하면서 읽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며 나름 책을 뒤적이며 애써 분석한 결과물이랍니다. 이토록 기특한 캐릭터가 어디 있냐며 스스로 쓰담쓰담했다는ㅋㅋ
답답했던 심정을 공유할 수 있어서 저도 너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