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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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하이드레이트. 낮은 온도와 높은 압력에서 메테인, 이산화 탄소, 염소 기체 등이 물 분자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면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얼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불을 붙이면 메테인이 타기 때문에 불타는 얼음이라 불린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이 물질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뜨거우면서도 담담하고 냉철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닮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과정이 심장으로 흘러들면서 계속 불이 붙는 듯 화끈거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뭉클한 실 뭉치 하나가 심장 한가운데로 툭 떨어졌다.

작가는 자문한다. ‘이 책도 눈물일까.(p371)’ 웃음이 담긴 책을 높이 평가하는 평소의 관점으로 판단해도 나의 답은 Yes!이다. 결코 칙칙하거나 암울하지 않은 눈물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맑음을 품은,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눈물이랄까. 나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한 것뿐인 장금에 빙의한 양,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 없이 그저 좋았다.

 

책속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집에 있던 살구를 딴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의 작가에게 상처를 준, 세월이 흘러서는 치매에 걸려 그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아픈 이야기가 되는 대상이다. 작가는 그런 당신을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마지막까지 겪어내는 과정을 덤덤하게 그린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중략) 우리는 침대 옆에 함께 누운 사람과 수천 마일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세상 반대편에 있는 낯선 이들의 삶에 깊이 마음을 둘 수도 있다.(p160)’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가 일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많은 경우 두 종류의 거리는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떠올려본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지만 정신적인 거리가 먼 경우는 아픔, 물리적인 거리는 멀지만 정신적인 거리가 가까운 경우는 위안 정도 될까.

거리를 두고 보면 어떤 법칙이나 관련성을 보게 되고, 대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p251)’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전체적으로 본다. 여기에 작가에 대한 놀라움이 있다. 부모와 자식사이, 그토록 가까운 관계에서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변변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자석으로 끌려들어가는 철가루의 입장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거리감을 유지한 이성이, 더군다나 그것이 뾰족한 증오나 비뚤어진 저항으로 변모하지 않았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버지니아 울프가 했다는 말에 힘을 실어주는 책이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중략)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p350)’라는. 리베카 솔닛은 울프의 문장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어머니를 이야기 안에 배치하고 글로 새김으로써 자신을 다치게 할 힘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봉인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감정이입이란 말에서 그 원동력을 찾는다.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p286)’ 상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 작가는, 마냥 울거나 외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어머니를 향해 걸어들어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한다. 넘어지고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다 굳어지기까지 감당했을 가시 같은 아픔을 상상한다. 피부가 따끔거린다.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면 찡한 느낌도 함께 오는가.

 

<살구>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살구>로 매듭을 짓는다. 13가지의 소주제가 7번째 이야기인 <매듭>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가운데 7에서 중성을 나타내는 pH가 생각난다. 적정 농도의 산과 염기가 어우러져 중성의 염이 만들어지듯 대칭을 이루는 주제들이 조화로운 쌍을 이룬다. 물질과 다른 점은 이들의 쌍이 동일한 제목으로 펼쳐진다는 점이다. 같은 제목 아래의 다른 이야기들이 독특하다.

각 장의 제목이 실린 사진 역시 의미심장하다. 1장의 갓 딴 <살구> 사진이 13장에서는 <살구> 청이 담긴 병으로 바뀐 것도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살구를 따고 그냥 오래 두면 썩는다. 살구가 무르익어 버릴 것 없는 쓰임새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살구를 앞에 둔 이의 몫이다. 이를테면 오래 두고 먹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는 살구 청으로 만드는 것 같은 일 말이다. 2장에 나오는 인공의 <거울>12장에서 거대한 <거울>이 되는 강물이 된다. 3장에서 <얼음>은 빙산의 새하얀 앞면을, 11장은 빛을 받는 이면의 <얼음>을 보여준다. 4장은 함께 가는 새들의 <비행>, 10장은 홀로 기구에 떠있는 <비행>을 보여준다. 5장의 <>은 기포 안에 갇힌 모습을, 9장은 그 <>을 뱉어내는 물속의 인간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차이가 나는 제목은 6장과 8장인데, 매듭을 중심으로 <감다><풀다>가 배치되어 절묘한 대구를 이룬다.

나방이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신다.(p31)’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 각 장의 말미에 간지처럼 끼워진 회색 바탕의 이야기는 별도로 찾아 읽어도 독립된 하나의 이야기로 기능한다.

글의 구성과 수록된 사진이 이야기를 극대화하는데 한 몫을 한다. 연극에 비한다면 무대장치와 소품까지 완벽한 작품이랄까.

 

넌 글 친구 있어서 좋겠다.” 며칠 전, 친구가 보낸 메시지에 글이 친구가 되지.” 웃으며 답을 했다. ‘작가가 홀로 들어가 자신이 마주친 미지의 영역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책이라는 신기한 삶이다.(p85-86)’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의미를 곱씹어보면 새삼스럽다. 글을 쓰는 순간, 작가는 고독안에 자리한다. 글을 마주하는 독자 역시 책을 읽는 순간은 고독안에 있다. 고독과 고독이 만나는 시너지란!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느낌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p100)’ 그래서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거야.(p101)’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누가 당신의 눈물을 마시는 걸까. 누가 당신의 날개를 가지고,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걸까.(p371)’ 아직도 불붙은 얼음이 심장 안에서 타고 있는 듯하다. 여운이 오래가는 책이다. 나의 눈물을 마실 누군가가 나타날 수 있을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심장이 뛸 수 있을까. 나는, 뜨거운 심장과 냉철한 이성으로 내 심장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어서 이 공간에 새길 수 있을까.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p211)’라는 질문이 가시처럼 나를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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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5-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 안녕하셨어요. 여전히 멋진 리뷰를 쓰고 계시네요! 이 리뷰도 마침 어머니에 관한 것이네요. 어머님 수술에 관해 보고를 드리러 왔어요. 수술은 잘 됐고요, 다만 소화기관을 많이 잘라내서서 ㅜㅜ 식사가 조금 힘드시긴 한가봐요. 다행히 췌장이 일부 살아남아서 인슐린을 따로 맞을 필요는 없답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요. 어머니가 아버님 당뇨 땜시 인슐린에 학을 떼셨거든요. 근데 안그래도 된다니 너무 좋지요. 항암은 해야 하지만, 잘 이겨내실 걸로 믿습니다. 어머니 의지도 있으셨고 수술진도 좋은 분들이었지만, 나비종님의 멋진 시가 곁들여진 응원도 큰 도움이 됐어요 감사드립니다

나비종 2019-05-06 20:11   좋아요 0 | URL
멋진 리뷰라 해주셔서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여전히‘에 글자 크기 256의 의미를 부여하며 히죽거리며 웃고 있습니다.^^;;
마태우스님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어머님 수술이 잘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친정 부모님께서 두 분 다 각각 다른 부위의 암이셨는데, 지금은 잘 이겨내시고 지내십니다. 특히 어머니는 한쪽 유방을 도려내셨거든요. 처음에는 많이 불편하셨던 모양인데 불편한 대로 적응을 하시더군요. 그나마 다행인 점을 찾아가며, 소소한 행복을 발견해내는 인간이란 존재의 의지는 매번 물컹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제 시가 마태우스님의 마음에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몇 줄의 문장이 무슨 힘이 될까 싶다가도 다만 조금의 응원이라도 되고 싶은 욕심도 있었거든요.^^

마태우스 2019-05-06 21:01   좋아요 0 | URL
어머나 두분이 다 암이셨군요. 가슴은 여성에게 의미가 커서 어머니의 상실감이 크셨겠어요 맞아요 인간이란 적응의 존재지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잘 이겨낼 수 있는 건 그 덕분인가봐요. 하지만 혼자서 이겨내기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라, 나비종님같은 좋은 친구가 필요하죠. 이번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비종 2019-05-06 22:45   좋아요 0 | URL
오히려 당사자이셨던 당신은 무심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어깨에 가방을 멜 때 균형이 안 맞아 기울어지는 것 빼고는 그런대로 괜찮으시다구요. 당시, 인공으로 넣는 방법에 대해 논의가 되었었는데 이 나이에 뭐 쓸데없는 데 돈 쓰냐며 사양하셨더랬죠. 종종 그 때를 생각한답니다. 정말 괜찮으셨던 걸까, 나도 그 나이에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하구요.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를 제일 존경하거든요.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들수록 알게 되더라구요. 당신의 치명적인 매력을요.ㅎㅎ
좋은 친구라 표현해주셔서 기분이 업그레이드되었답니다. 음, 그럼, 좋은 친구가 된 기념으로 한 가지 부탁 좀 들어주실래요? 꽤 오래 전에 마태우스님께 친구 신청을 했는데, 계속 수.락.을. 안.해.주.셔.서 ‘나, 까인 거임?‘하며 살짝 상처받고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