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

현대와 삼성의 배구 맞대결 기사를 읽다가 손가락 가는 대로 끌려들어가 읽은 기사는 한겨레의 '재모아빠' 혹은 구본준 기자(http://wnetwork.hani.co.kr/bonbon/)가 쓴 '필진네트워크' 기사이다. 지면에 게재되는 기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건축사학자인 임석재 교수의 '거대한 자료실' 탐방기사인데, 얼마간은 부러운 마음으로 죽 둘러보았다(나는 내달 '고아원'에 있는 책들을 근처 다른 '고아원'에다 옮겨놓아야 한다). 저술가가 되면 이런 자료실을 갖게 되는지, 아니면 자료실을 마련해야 저술가가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한 가지 '모델'로 창고에 넣어둔다(하긴 이웃나라엔 '고양이 빌딩'을 갖고 있는 저술가도 있다고 하니 '저술가의 서재'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07. 02. 16)[필진]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

2년쯤 전이었습니다. 모처럼 건축사학자 임석재 교수를 만났는데, 근황을 묻자 “서재를 구해 책들을 옮겼다”고 하더군요. 새로 구한 서재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라고 했습니다. 임교수의 집이 직장인 이화여대 근처 아현동인 것을 알고있던 저는 왜 가까운 집 놔두고 그렇게 멀리 서재를 구했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습니다. 임교수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자료가 너무 많아서 20평짜리 집에서는 불가능한 지경”이란 겁니다. 게다가 자기는 공기 좋은 곳이 좋으니 금상첨화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자료가 얼마나 되기에 집까지 옮겨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임 교수는 집안 전체가 자료로 가득찼다고만 빙긋 웃었습니다. 무척이나 궁금해서 언젠가 한번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5일, 임석재 교수의 광주 아파트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동안 무려 28권의 책을 쓴 우리 시대 대표적인 건축글쟁이, 그 글쟁이의 서재를 찾아가는 제 연재 기사 <한국의 글쟁이> (한겨레 출판섹션 ‘18도’섹션 참조) 열아홉번째 초대손님으로 임 교수를 모시게 된 것이 제가 임교수 댁을 찾아가게 된 경위입니다(*그러니까 다음주 연재가 '임석재 교수' 편이겠다).

임교수의 집은 광주 시내를 살짝 벗어난 언덕 위에 잡은 비교적 대단지 아파트였습니다. 평수는 제법 넓었는데 방이 5개 짜리더군요. “서울에서 드는 비용으로 2배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임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는 곳이 아닌 완전한 집필실로 마련한 공간입니다. 임교수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현관에서 보이는 집안 모습은 이 곳이 ‘거대한 자료의 바다’임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현관에서 마루로 이어지는 짧은 복도 같은 공간부터 철제 책장이 놓여있는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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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조금이라도 빈 공간에는 책장들이 열병하듯 서있었습니다. 마루는 그저 큰 방일뿐이었습니다. 마루 가운데에는 책상이 있고 나머지 모든 벽은 책장을 놓았습니다. 자, 마루 책상 앞에 선 임석재 교수입니다.

임 교수는 마침 슬라이드 필름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임교수는 글쟁이이면서도 사진을 직접 해결합니다. 사진을 거의 전문적으로 찍는데, 내년도 이화여대 다이어리를 임교수가 찍은 우리나라 전통가옥들 사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52주별 그림으로 넣을 52개 전통가옥별로 좋은 사진을 고르던 차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슬라이드보관통과 사진을 살피는 도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5개의 방은 방 하나 하나가 모두 서재였는데, 나름대로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사진 자료를 넣어놓는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별 자료방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가, 미술가, 철학자 등 개인들에 대한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또다른 방 2곳은 시대별 자료방입니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자료방, 그리고 19세기 이후 현대건축까지 자료방 등. 마루는 집필공간 겸 현대건축 자료들 공간입니다. 우선 근대건축 이전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카메라도 모두 이방에 놓았더군요.

조금의 빈 틈에도 책장을 넣을만큼 자료는 많았습니다.

각 자료들에는 찾기 쉽도록 종이로 항목을 붙여놓은 모습입니다. 임교수 자료실의 압권은 바로 슬라이드 사진을 모아놓은 방입니다. 물론 모두 임교수가 직접 찍은 필름들입니다. 부피가 나가는 책도 아니라 조그만 슬라이드 사진필름이 도대체 몇 개나 되기에 방까지 따로 만들었냐구요? 자그마치 20만개라고 합니다. 클리어파일처럼 생긴 두꺼운 파일철에 한 쪽당 20개씩 끼워 보관합니다. 자, 한번 보시죠.

보시면 낯익은 생활용품인 방습제 ‘물먹는 하마’가 있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습기흡수용품을 넣은 것은 슬라이드 필름이 습기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이 필름철 한쪽한쪽 사이에 넣기 위해 신문지를 크기를 맞춰 1만쪽을 잘라놓은 점입니다. 습기 빨아들이는데 신문지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임교수가 신문을 주워다 모은 뒤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종이를 잘랐다고 합니다. 정말 자료 관리가 저술가에겐 생명과도 같구나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진철에는 꼼꼼하게 필름 항목을 적어놓았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이름이 보이네요. ‘English Baroque, Christoper Wren'.

(#크리스토퍼 렌은 영국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갑니다. 원래는 자연과학자로, 뉴튼이 칭찬할 정도의 대단한 양반이었다는데, 옥스퍼드대 천문학과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놔두고 건축가가 되었답니다. 참 재주도 많은 분이죠? 대표작은 영국 세인트폴 대성당입니다. 이만틈 설명하고서 사진도 안보여드릴 순 없으니 세인트폴 성당 사진 첨부합니다.)

학자들의 일상은 자료와의 전쟁이자 동고동락입니다. 스스로 분류한 자료가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드는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게 됩니다. 건축이란 분야 속성상 임교수의 도전은 다른 인문학자들보다 훨씬 돈이 듭니다. 왜냐구요? 건축책들은 비싸거든요. 사진들이 들어가면 책도 크구요. 보통 원서가 권당 10만원 가까이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거대한 자료실 속에서 임교수는 읽고 쓰고 자료를 정리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글쓰는 팔자가 따로 있다 싶습니다. 아니, 글쓰는 기계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본인도 씨익 웃습니다. “참 미련하게 살지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 결과 28권의 책이 독자들과 건축을 이어주었으니, 보람은 클 것입니다.

임 교수는 방학이면 카메라를 짊어지고 해외로 떠납니다. 취재와 자료수집을 위한 출장인데요, 그 중간중간 사서 모은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머그잔’입니다. 나라별 특색있는 기념품으로 하나씩 모은 것이 부엌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선반 위에도 한줄로 머그잔이 서 있네요. 건축학자라서 그런지 건축물 그림이 들어있는 머그잔들을 모아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술가들의 서재가 모두 임석재 교수의 서재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저술가들의 서재는 이렇게 자료실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많은 자료에 투자하고 관리했느냐에 따라 저술의 양과 질이 바뀌기 때문에 오늘도 글쓰는 학자들은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게 저술가의 팔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모으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에 모으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죠.

자, 그러면 퀴즈! 책이 이 정도면 한 몇권이나 될까요?

임석재 교수에 대한 기사는 조만간 <18.0> 섹션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구경 잘 하셨습니까? 다음에는 다른 저술가의 서재를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절들 잘 보내세요.

참, 임교수 댁에 있는 책은, '1만권'입니다.

07. 02. 19.

P.S. 4-5년 뒤면 나도 1만권쯤의 장서를 갖게 될 터인데 이를 어이해야 할 것인지, 미리부터 걱정스럽다. '물먹는 하마' 정도는 미리미리 준비해둘 수 있겠건만...

P.S.2. 한편 아래는 지난 2000년 10월말 한겨레의 '인문학 데이트' 연재란에 실렸던 임석재 교수에 대한 소개이다. 저서가 그간에 훨씬 늘어난 것은 물론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론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 2006)과 '임석재 서양건축사 3'에 해당하는 <하늘과 인간>(북하우스, 2006)이 있다.

임석재는 누구?

△1961년 서울 출생

△1980~1987년:서울대 건축학과 및 같은 대학원

△1989:미국 미시간대 건축학 석사.

△1992: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건축학 박사

△1993년:원도시 근무

△1994년~현재: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저서:<추상과 감흥:비엔나 아르누보 건축>1·2(문예마당, 1995), <장식과 구조미학:불어권 아르누보 건축>1·2(발언, 1997), <형태주의 건축 운동:형태와 조형의지>(시공사, 1999), <생산성과 시지각:뉴 브루털리즘과 대중사회>(시공사, 2000), <한국 현대 건축 비평>(예경, 1998),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임석재 교수의 현대 건축 이야기>(북하우스, 2000), <한국적 추상 논의>(북하우스, 2000) 등 다수.

임석재가 말하는 임석재

철들면서 시작된 사춘기 때 나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조형 환경은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시(詩)였다. 한국 현대시의 고전들을 암송하고 스스로 시작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관심이 합쳐져 나는 지금 건축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아직은 사춘기 때의 감성과 열정이 유지되고 있다고 자평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사람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일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고 책 쓰는 데 보낸다. 건축에 요구되는 실용성과 현실성은 골목길 탐방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얻고 있다. 요즘은 그 동안 공부해온 내용을 응용할 설계 작업도 시작하여 1~2년 후면 처녀작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연구는 20세기 서양 근현대 건축사, 한국 현대 건축사, 서양 건축사의 세 분야로 나뉜다. 각 분야에 대해 방대한 양의 저서 시리즈를 기획하여 매일 열심히 공부하며 집필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최종 목표는 나만의 건축 사상을 세우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끼여 철학 강의를 듣는다.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던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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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

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30809551&code=910100).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편집자 주>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군에 입대하여 해병대로 베트남 전장을 다녀온 뒤에 사회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들에 눈을 돌렸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였는데 의식이 들고 나서 작품을 쓴 내용은 그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도를 떠돌며 겪었던 체험들을 스스로 자각해가는 과정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서구에서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내부에 복지라든가 사회주의적인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냉전 구조를 확정하기 위하여 과거의 종속적인 민간정부를 스스로 훈련, 교육시킨 군사정부로 교체됐다. 군사 쿠데타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지역에서 하나의 일상적 유행이 되었다.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8019.html).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쇄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07.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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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우리시대의 명저 50

연초부터 각 매체마다 책읽기에 유난한 관심들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의 '사회적 독서' 운동에 이어서 한국일보에서는 '우리시대의 명저 50' 시리즈를 연재한다고 한다. '명저'라고는 돼 있지만 목록을 보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들도 많이 망라돼 있다. '명저'라는 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책이란 뜻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 듯싶다. 아무튼 이 50권에 대한 해제가 다 게재되면 올 한해도 다 가는 게 아닌가 싶다(하냥 섭섭할까?). 50권의 면면들을 구경해볼까라는 '무모한' 욕심도 품어봄 직하지만, 이미 펌글에 도서(상품) 이미지를 집어넣지 말도록 재차 당부를 받은 터라 자제하기로 한다(이러한 펌글도 가급적 자제할 예정이다). 맨숭맨숭하긴 하지만, 목록만을 한번 일람해보는 것으로 '책구경'을 대신해야겠다(시간이 남아서 좋긴 하군).  

한국일보(07. 01. 04) 우리시대의 명저 50

우리 저술의 숲은 건강하고 우람했다. 지성의 숲을 거니는 일은, 굳이 한 그루 한 그루의 결을 더듬고 껴안아보지 않고서도, 황홀하고 뿌듯했다. 책의 전문가들이 전해온 목록의 갈피에서 밀려오던 희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또 저자와 책이 갖는 이름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기획팀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고통마저도 행복했다.

추천ㆍ자문단과 기획팀은 선행 연구로 불모의 땅을 일군 선구적 저서와 학문적으로 고전의 무게를 지닌 책, 지식 대중화를 선도한 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또 특정 저서의 가치 못지않게 해당 저자가 우리 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높이 산 경우도 있다. 시대적 담론과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식민지 사관과 실증 사학을 넘어 지배집단의 교체라는 독자적 사관으로 한국사를 정립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고난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양 신학과 전통 종교사상을 대비하며 우리 문화의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한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재야 학자로서 학문적 엄밀성과 함께 역사의 빈틈을 성실히 메워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서양고대철학 연구의 수원지로 여전히 마를 기미 없이 푸르게 출렁이는 박홍규의 <희랍철학논고>, 우리 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학술적 근거를 실증해 그 문제 의식을 지금까지 이어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해당 분야에서 아직도 이들의 업적을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두종, 전상운, 김용준, 유민영 등의 노작들이 그렇게 선정됐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지성의 균형점을 잡아준 리영희, 1980년대의 질곡에 <민중신학>이라는 독보적인 신학적 응답을 제시했던 안병무, <전태일 평전>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변혁운동의 맥을 이어준 조영래,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희의 현대적ㆍ변혁적 연구와 실천으로 당대 문화의 큰 정신을 구축했던 채희완, 억압의 시절을 몸으로 살았고 몸의 고백으로 시대를 움직인 서준식 정수일 홍세화의 저작들도 놓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혔다.

경제학이 강단을 벗어나 어떻게 현실과 만날 수 있는지를 가슴으로 보여준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고도의 과학 전문 연구분야를 대중적 글쓰기로 선도한 최재천의 <개미 제국의 발견>, 20세기 신화 열풍을 주도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동양미술의 오주석, 서양미술의 이주헌, 한시의 정민, 미학의 진중권 등은 인문학 대중화의 전범으로 꼽혔다. 또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학의 오랜 딜레마였던 ‘근대’의 숙제를 성실히 풀고자 한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 등도 목록에 들었다.

기획팀의 어두운 눈과 선택의 편의로 막판에 누락된 소중한 책들도 수두룩하다. 이들 책에 대한 응당한 예우는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 우리는 저자들이 먼저 닦은 저 편한 길을 최대한 힘들여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자 한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지성의 독자들과 함께.

● 추천 위원 기고: 무엇이 책을 숨쉬게 하는가

광복 이후 '나라 세우기'와 상응하는 '학문의 토대 쌓기'는 광복 직후의 혼란상과 한국전쟁의 상흔 탓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김원룡의 <한국미술사>,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등이 대표적이다. 수용자, 즉 독자 측면에서 보면 60년대는 전집 출판의 전성기였다. 외판원에게 구입한 문학이나 사상 전집을 거실에 꽂아두는 허영심이 팽배했으나, 그 허영심이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지적 허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60년대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다.

특기할 만 한 것은 1970, 71년에 나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내발적(內發的) 근대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도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크게 자극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개발 독재와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출판과 책도 그러한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시대로도 불리는 1980년대에는 좌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많은 지식인들이 정당성 없는 권력의 폭압적 전횡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되찾은 우리 글과 말로 토대를 쌓고 틀을 짓는 시기, 어떤 의미에서는 각 분야에서 개척자적 노력이 요구되었던 시기가 1950, 60년대라면 1970, 80년대는 학문과 출판과 책이 시대와 현실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하려 했던 시기다. 무너뜨려야 할 우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이뤄야 할 목표도 분명했던 시대, 그래서 일종의 전선(戰線) 시대라 칭해도 좋을 그런 시대였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전선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잃은 것은 전선이었고 얻은 것은 다양성이었다. 우리 출판과 책의 지형도는 매우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 훨씬 더 독자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개성 넘치는 문장 스타일,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 엄숙한 강의가 아니라 정겨운 수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자들이 부각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미학 오디세이>의 진중권이 그러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윤기가 그러했다.

최근 들어와 많은 이들이 책을 걱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더 이상 책의 존엄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의 얼개와 뜻을 깊이 파고드는 책은 좀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 책의 위기, 책의 죽음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출판과 책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책은 위기였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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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12/h2006122517053985140.htm

[가상 인터뷰] <42·끝> 수전 손택
"사상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라"
경영진이 입맛대로 기업 기사 빼고 기자 징계 '시사저널' 사태에 쉬쉬
편집권 독립 지켜야 할 언론사들도 소극적 보도, 침묵의 카르텔이라니…


미국의 에세이스트, 소설가, 액티비스트, 문화비평가. 에세이집으로는 <해석에 반대한다>(1966) <사진에 관하여>(1977) 등이 있고, 소설로는 <미국에서>(1999) 등이 있다. 친아버지는 중국에서 모피상을 했었는데 손택이 다섯 살 때 죽었다. 손택의 원래 성은 로젠블라트(Rosenblatt)였고, 손택이란 이름은 법적으로 자신을 입양하지는 않은 의붓아버지의 성을 딴 것이다. 대학 생활의 출발은 버클리대학이었고, 시카고대학으로 옮겨 가서 문학비평가 케네스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학자 레오 쉬트라우스 등에게서 배우며 석사를 마친 뒤, 하바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소르본느대학 등에서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17살 때, 열 살 연상의 대학 선생과 만난 지 열 며칠 만에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며, 8년 뒤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편과 이혼하고 그 때부터 아들을 홀로 키웠다. 1963년부터 서평 등을 쓰기 시작한 손택이 최초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게이 감수성에 관한 에세이인 <캠프(camp)에 관하여>(1964)였다. 나중에 이 글은 정치적 관점을 강조하는 동성애 진영, 즉 ‘퀴어(queer) 정치학’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지만, 당시에는 대중문화와 관련해서 대안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선구적이고 충격적인 글이었다.

손택은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등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지식인들과 이오네스크, 아르토, 브레송, 고다르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1960년대의 뉴욕 지식인 사회 및 문화예술계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미국에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1967년 <파르티잔 리뷰>에 쓴 글에서 “백인종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나중에 가서 자신의 발언이 암 환자들의 고통을 무시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베트남전 반대 행동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하기도 했고 1993년에는 내전 중에 포위된 사라예보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바 있다. 2001년 9ㆍ11 사태가 터진 직후 발표한 글에서 손택은 당시 미국 주류의 정치적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그렇지만, 미국은 강하다”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허풍을 떨던 부시를 ‘로봇과 같은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대놓고 반박함으로써 또 다시 충격을 준 바 있다.

손택의 사인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이었는데 이 백혈병은 30대 중반에 생긴 유방암과 60대에 생긴 자궁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1978)과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2003)는 바로 자신의 병 체험에 바탕을 두고 저술된 것들이다. 죽기 몇 년 전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손택은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밝혔는데, 평생 “실제로 아홉 번, 다섯 명의 여자와 네 명의 남자”와 사랑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손택의 좌우명은 “늙은이처럼 행동하지 마라, 바로 그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우정이란 다른 사람들 안에서 기뻐하기 위한 욕망이다” “작가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을 당신 안에 가두지 마라” “변화는 나의 장기이다” 등이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무덤 안은 어떠세요? 죽으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나요?

수전 손택(이하 수전) 그냥, 수전이라고 불러, 동업자끼린데 뭘. 죽어서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이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거야.

현 선생님은 평소에 “난 시골에서 살지 못한다, 도시가 좋다”고 말씀하신 전형적인 뉴요커인데다 워낙 명망가이셨으니까 다른 뉴요커들이 커피숍이나 술집에서 선생님의 사생활을 가십 거리로 삼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가장 궁금한 건데요, 성을 왜 스스로 바꾸셨지요?

수전 ‘장미꽃잎(Rosenblatt)’이란 말이 간지러워서 그랬어. 손택이란 이름이 더 단순한 게 맘에 들었지. 내 의붓아버지는 장교 출신의 참전 영웅이었지만 사춘기의 내가 보기에 지적으로는 정말 바보 같았거든.

현 독일어의 일요일(Sonntag)은 n이 두 개인데요. 손택이란 이름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수전 난 그런 데 관심 없어. 이번 기회에 분명히 말하건대, 한국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둘 다 붙여쓰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건 머저리같은 짓이야. 정확히 따지자면, 어머니 성이 아니라 외할아버지 성이잖아. 페미니스트가 그렇게 의식이 없어서 뭐가 되겠니? 차라리 성,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없애자고 해야지.

현 역시, 선생님은 거침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답니다. 한국의 지적, 문화적 분위기는 미국으로 치자면, 소설가 잭 케루액이라든가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등과 같은 비트 제너레이션이 활약하던 때인 1950년대 수준도 될까말까지요. 아직, 정치적, 문화적 검열에 관한 문제라든가 드럭(drugㆍ마약) 문제에 관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인식이 아직 형편없어요. 다들 앵무새처럼 말할 뿐이지요.

수전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건 아니야. 다만 나에 대해서는 미국의 주류 사회가 속으로 ‘저 년은 원래 저런 년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약간 봐준 정도일 뿐이지. 또 내가 뉴욕 토박이가 아니었더라면, 9ㆍ11 이후 미국의 파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대외 군사정책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실제 내가 당했던 것보다도 아주 더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을 거야.

현 선생님에 대한 평가 중에 일찍부터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전 나는 그게 일종의 욕이라고 생각해. ‘아마도’란 말도 그렇고 ‘여성’이란 말도 그렇고 말이야. 그 말에는 여성이란 본디 지적이지 못하다는 전제가 들어 있는 것이고, ‘아마도’란 여성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잖아?

현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선생님은 1960년대부터 사회적,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 쭈욱 계속해서 나름대로 직접 행동을 취해 오셨습니다. 1980년대의 한국에는 일본어 한자말에서 빌어온 ‘활동가’란 말이 쓰이곤 했습니다. 지금 그 활동가들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먹고살면서 애 키우느라 바쁘고,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고, 또 일부는 아직도 사회운동 및 시민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액티비스트’로서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엑스(ex)-활동가들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수전 야, 그런 걸 왜 내게 묻냐? 너희 일은 너희가 가장 잘 아는 거지. 세상이 바뀌면 바뀌는 만큼 변화를 해나가되, 최초의 그 곧고 아름다운 마음가짐과 ‘합리적 핵심’에 해당하는 관점을 지켜나가면 되는 거잖아.

현 물론이지요. 하지만, 자기 일에 파묻혀 살다보면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또 한 해가 저무는데 세상이 더 나아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런 거지요.

수전 그렇다면 한 수 가르쳐 주지. 가령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시사저널> 사태 해결에 나서는거야.

현 앗. 선생님, 어떻게 그 문제를 알고 계신가요?

수전 바로 위에서 네가 날 소개하면서 “작가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사장이 사전에 편집국 구성원들과 아무런 얘기나 논의 없이 기자가 쓴 글을 윤전기에서 인쇄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빼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잡지를 만들어 온 기자들이 참 대견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참 안쓰럽다.

현 네. 문제는 다른 일간지들이 이 중대한 사태에 관해 제대로 보도를 하고 있지 않아서 국민 대다수가 사정을 모른다는 겁니다. 일종의 굳건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게지요. 사태는 정말 심각합니다. 소위 ‘편집권 독립’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경영주가 제멋대로 기자의 글을 삭제하는 것은 일제 시대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수전 말로 안 되는 경우에 쓰라고 화염병이 있는 거야.

현 켁. 선생님,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수전 그러니까, 내 말은 연말에 망년회 대신‘몰로토프 칵테일’파티를 하라는 얘기야. 너희 한국에 활동가가 그렇게 많았다면서.

현 네에~(푸훗). 아무튼 선생님, 한국과 한국의 언론 상황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찌 보면 매우 창피한 일입니다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이런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대충 50년쯤 뒤에 선생님 계시는 나라로 저도 살러 가겠습니다. 그럼, 다시 뵐 그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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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논문계획서 통과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논문연구계획서>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하위문화
- 억압된 문화실천의 생산과 수용을 중심으로



바람구두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이 그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 - F.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연구문제를 선정하게 된 사회 ․ 문화적 배경과 의의

책의 운명 : 역사의 변동기에 태어난 한 권의 책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운명을 겪는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초판이 발간된 것은 1979년 10월 15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란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고 우리들 독자들에게도 독서가 한가로움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바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 관한 이야기들이 줄을 이었고, 1980년 3월 20일에는 이미 제3판이 발행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이 책을 늦게 만나본 셈이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책을 확인해보니 이 ‘2판’이었다. 그 판수가 어떻든 열심히 읽었다. 밑줄을 그어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무엇보다도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닌 것 같았다. 연일 계속되는 토론이 캠퍼스를 매우고 있을 때, 이 이야기들은 그저 책 속에 누워 있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원 주최의 한 심야 토론회는 바로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기도 했다. - 김광식(1986), 「살아움직이는 책들」, 『우리시대 출판운동과 오늘의 사상신서』, 100~101쪽

책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2004년 초가을이었다. 그 무렵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젊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 번씩 한다”며 “그 시대를 거꾸로 살아온 사람들이 득세하는 역사”를 비판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접했다. 대통령은 이미 우리 현대사를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했다는 식으로 평가한 바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정치권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여러 법안이 구체화되고 있었는데,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몇몇 지인들에게 뜻을 물었고 세 분이 기꺼이 동참함으로써 편집진이 구성되었다.
우리는 정책결정권자들이 그런 역사 인식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1979년에 출간되기 시작해 현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엮음(2006),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 11~12쪽


얼마 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006)이 출간되면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의 의식세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한 권의 책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 우리 역사는 반공 이데올로기 중심의 우편향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어왔다. 1979년 첫 권이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전6권)은 1980년대 민주화투쟁 시기를 대변하는 책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민중사관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지적 기원을 이룬 책으로 평가받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1987년 6월 항쟁 20년이 다가오는 시점인 오늘날 다른 한 측면에서는 민족주의, 좌편향적인 역사서술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광식(1986)이 『해방전후사의 인식』라는 한 권의 책에 대해 20년 전에 던진 질문, “역사의 변동기에 태어난 한 권의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운명을 겪는가”라는 물음은 20년 세월을 거슬러 2006년 오늘 우리에게 되돌아온 질문이 되었다.

미셸 드 세로토는 “신문이든 프루스트(Marcel Proust)든 텍스트는 독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한 권의 텍스트가 지닌 의미 역시 독자를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책 읽기’라는 특정한 문화실천 행위는 특정한 시공간과 문화적 태도에 따라 변화한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의미가 생산되고 메시지가 기호화되는 의미 구조와 수용자에 의해 해독되는 의미 구조가 결코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 홀의 지적은 텍스트를 생산하는 자로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다. 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고 그것을 구성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놓여 있는 각각의 맥락과 환경 안에서 해당 텍스트를 해석한다. 텍스트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그 자신의 해석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텍스트의 의미는 생산자의 의미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의 수용 과정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텍스트를 둘러싼 관계들 간의 투쟁과 타협의 소산이며 주체는 담론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다.

청년문화 :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하위문화
본 연구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1980년대의 청년지식인들은 이른바 민주화세대로, 일반적으로 1987년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구자에 따라 1970년대 유신독재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이 함께 포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198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을 지칭한다. 1987년 6월 항쟁과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대한민국 사회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급격히 변화시켰다. 분단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50년 체제,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 각 부문에서 형성되었던 권위주의 개발독재 체제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통치 기반으로 삼았다. 198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복권되는 중요한 반전을 가져왔고, 이후 권위주의 체제는 급격히 해체(최근엔 87년 6월 항쟁 이후 형성된 현재의 체제를 87년 체제, 87년 혁명이라 규정)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하위문화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주류문화, 지배문화(지배적인 가치와 윤리)가 이단시하고,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던 좌파적 이데올로기들을 하위문화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1980년대 청년문화가 지배문화를 거부한 것은 그 내부의 능동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이다.

문화연구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등장한 하위문화의 개념이 주요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시대적으로 주로 90년대 이후 현재까지이다. 대체로 1980년대 하위문화로서의 청년문화는 역사학적 관점에서 혹은 정치학, 사회학의 영역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하위문화의 등장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사회에서의 하위문화는 그 개념을 산출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사회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산업화와 근대화가 촉발한 사회변동이 노동계급의 생활 터전을 위협하고, 부모 세대가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출현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한국사회 청년지식인의 하위문화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초래된 체제억압적인 정치질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출현했다.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은 부모세대들이 간직했던 전통(지배)문화의 정체성 - 반공이데올로기, 독재체제에 대한 의식 ․ 무의식적 복종과 합의,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 과 충돌했다. 청년지식인들은 억압적인 체제에 대해 불만과 공포, 정치적 자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새로운 청년문화를 만들어냈고, 1980년대의 청년문화는 다른 시대와 구분되는 하위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화란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곧 정치적 행위가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문화정책은 사회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의 통합을 추구한다. 80년 광주를 제물로 삼은 5공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문화를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육성과 통제를 주요 문화정책으로 삼았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을 명분으로 국사교육을 강화했고, 이에 따라 모든 한국사교과서가 검인정에서 국정으로 바뀌었으며, 국민윤리교육도 강화되었다. 국사와 국민윤리는 모든 공무원 시험에서 필수 과목이 되었으며 대학에서 군사교육이 강화되었다. 이렇듯 국가주의와 획일적 교육,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던 시기에 민중지향적인 진보적 사상과 학문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제시되었다. 이 시기에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이 창간되었고, 김지하의 담시와 희곡들이 발표되었다.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텔레비전의 보급은 1975년에는 180만대, 1980년대에는 690만대에 이르러 100가구당86.7가구가 TV를 소유하는 등,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로 대중사회가 도래했으나 대중문화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말할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하는 자발적인 세력의 등장, 진보적, 민중지향적인 사상과 학문들을 담은 텍스트들의 등장은 실제 대중의 삶과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1980년대의 청년문화는 다른 하위문화 일반과 마찬가지로 부모문화와 지배문화라는 두 가지의 문화형태들에 대한 반발을 통해 생성되었다.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가 온존해있는 봉건적인 부모문화와 자본주의적인 권위주의 억압체제였던 지배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배적 문화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것의 형태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위문화로서의 1980년대 청년문화는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온 부모문화의 윤리의식과 규범 등 봉건적인 부모문화, 정치적 ․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억압적인 지배문화에 대해 이중의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부모세대가 내면화시켰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검열과 지배문화의 공식적인 지식을 무력화하는 일상적 문화실천을 통해 지배체제의 문화재생산에 저항했다.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이러한 거부행위는 그들만의 세대의식(generational consciousness)과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 -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용어를 빌자면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 - 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수용자 연구 : 억압된 지식(문화)의 생산과 수용과정은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세대의식(generational consciousness)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1980년대를 살아낸 청년지식인의 하위문화는 어떻게 다른 의미구조를 체현했는가?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기형도, 「대학시절」<全文>

19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내며 서울의 우울을 노래했던 시인 기형도는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고 읊었다. 1980년대 대학의 풍경은 “플라톤과 총성, 감옥과 군대, 시를 쓰던 후배와 기관원”으로 상징되었고, 시인은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비록 시인 기형도는 1980년대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와 같은 1980년대 세대들은 대학을 떠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 1980년대 청년지식인들이 피땀으로 싸워 얻어낸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들, 자유와 민주, 평등과 다원성의 원칙들은 우리 사회의 지배문화로 성장하지 못했고, 그들이 저항했던 부모문화의 역공은 물론 같은 1980년대 세대 내부에서도,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혜택을 받는 1990년대, 2000년대 청년들에게 환멸과 희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해럴드 가핀켈(Harold Garfinkel)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사소한(비논리적인) 대화와 행위에도 대화당사자들 사이에는 복잡한 공유 지식을 대화 과정에 투사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버릇처럼 반복하는 일상의 수많은 행위들이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동일한 기본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핀켈(Garfinkel)은 사람들이 일상의 현실에 대해 이와 같이 동일한 기본 가정을 공유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험했다. 그는 실험자인 대학생들에게 친숙한 존재들인 친구와 가족을 만났을 때, 처음 만난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실험자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처음 만난 낯선 사람처럼 행동했고, 가족과 친구들은 이들에 대해 자제력을 잃고, 흥분하여 화를 냈다. 평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상적인 대화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interpellation)’에 응답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문화실천은 이와 같은 일상적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며, 한 개인의 인격(personality)이란 이와 같은 일상적 문화실천 과정의 축적물이다.

우리들이 느끼는 일상의 현실이란 세계 혹은 세계관을 타인과 공유함으로 형성된다. 이 말은 우리의 ‘문화적 기억’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주고, 그 기억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을 상실하거나 그로부터 소외된다면 민족이산(diaspora)의 이방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인류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통의 기억과 감정구조를 습득하게 만드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디아스포라가 혈연적 민족구성원의 이질화를 초래한다면, 각각의 세대가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과 타협으로 구성해내는 문화실천(책읽기)은 세대 간 세계인식의 두드러진 차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극복하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는 문민통치의 새로운 전통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대간 문화충돌이라 부를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비롯해 국내외 수많은 현안들을 놓고 첨예한 논쟁과 사회적 갈등이 빈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국가보안법 폐지논쟁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겠다 말하자 1,500여명에 이르는, 이른바 국가원로들이 나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들 세대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나 이들 발언의 정치적 동인에 대한 분석, 이들의 전력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있었으나 이들이 과연 어떤 문화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물론, 이들이 규탄해 마지않는 1980년대 청년지식인 세대의 하위문화에 대한 문화분석 역시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어째서 한쪽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악법으로 기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원로를 자임하는 이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국가의 중차대한 위기로 의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들이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 문화실천의 차이에서 비롯된 세대간 문화의 차이, 감정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사회는 지난 1970년대 이후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동안 경제성장은 물론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양적, 질적 비약을 거듭해왔다. 20세기 후반 40년 동안 한국은 흔히 이중혁명으로 불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관문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개성이랄 수 있는 이중혁명은 수많은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한국사회의 결실이며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형 이중혁명은 빛과 함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 모더니티 형성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는 기본 틀이 짜인 시대로서 이 시대를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방식과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상호 대질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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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통과하는 거니까. 대단한 건 아니지만, 대략 2주 정도 나름대로 발목을 잡고 고민하게 한 결과물입니다. 연구계획서만 원고지로 150매 가량 되는데 윗글은 문제제기의 사회문화적 배경 부분만 올린 것입니다.

* 혹시라도 제 논문을 위해 인터뷰에 응해주실 분들은 비밀글 남겨주시면 감사하게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아니면 제가 색출하겠습니다. 특히, 알라딘 서재의 1980년대 학번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 말은 꼭 80년대 학번이 아니더라도 무방하다는 말씀입니다. 비밀글에 실명과 이메일, 연락처 남겨주시면 되겠습니다.)

* 협조해주신 분들의 신상은 원하신다면 비공개로 할 것이며, 논문이 완성되는 대로 한 부씩 우송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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