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책>이라는 이벤트 주제를 보자마자 머리 속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캔디 캔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백조>...를 떨쳐내고 ^^;; 
고1 때부터 적고 있는(아니 적었던... 최근 2-3년간은 게으름 피느라 안 적었음) 
독서 노트를 펴 봤다.

독서 노트래봤자 독후감이나 내용 요약을 적은 건 아니고 
읽은 날짜와 책 제목, 지은이 정도만 쓴 거지만 
그래도 가끔 이걸 들쳐보고 있자면 잊었던 책들이 죽 떠오른다.

그런데...
남들한테 줄곧 책벌레 소리 들어가며 읽긴 했는데도 
어떤 님 말씀처럼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를 걸었던 탓인지, 
그리고 정독을 절대 못하고 그저 눈으로 슥슥 훑어가는, 
게다가 무거운 책보다는 그때 그때 관심있는, 
가벼운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책읽기 습관 때문일까. 
내 독서 노트에는 소위 말하는 "고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확실히 난 문학소녀는 절대 아니었던 거야... ㅠ_ㅠ)

나한테 있어서의 <세 권>을 골라보려니 
수많은 책들이 여러가지 의미에서 마음에 남는다.

우리집에 있던 한국문학전집 중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심훈의 <상록수>.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처음 읽었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 중2 때였는데, 상당히 야한 내용 때문에 엄마가 슬쩍 숨겨놓으면
또 열심히 찾아내서 읽곤 했다... ^^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고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헤세를 좋아하게 해 준 <데미안>.
<갈매기의 꿈>에 이어 리처드 바크에 한참동안 빠지게 만든 <환상>.
그냥 좋아서 읽고 읽고 또 읽었던 <제인에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다양한 인생을 보여주던 <오헨리 단편집>.

고등학교 때 너무너무 마음 저리게 좋아했던 친구에게 
연애편지처럼 매일 한 편씩 엽서에 적어서 부치던 조병화 시집 <남남>.
샘터사에서 나온 <노란 손수건> 시리즈.

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대2 겨울방학 때 날밤 새우면서 읽었던 <지리산>과 <태백산맥>과 <토지>.

입사 후 몇 년이 지나서 직장 생활이 슬슬 지겨워지고 
결혼하고 나서 여러가지 생각이 많을 때 힘을 북돋워 준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와 
<과학원 아이들>.

요새 내게 일본어를 잘하고 싶다는 의욕을 팍팍 넣어주고 있는 
<은하영웅전설>, 그리고 <불꽃의 미라쥬>까지...

이렇게 많은 책 가운데에서 [내게 새로운 길을 알려준 책 세 권]을 골라봤다.


1.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 또하나의 문화 제2호>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내 기억이 미치는 시절부터 항상
이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여자와 남자의 불평등에 
관심이 무척 많았고 예민했다. 
순리대로 생각해 봤을 때 당연히 틀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용되는게 견디기 힘들었다고 할까.

대학 3학년 가을에 도서관에서 만난 이 <또하나의 문화> 동인지는
(지금까지 열다섯 권이 나와있다)
그 전에 들었던 "여성학" 수업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내 안을 다져줬고 두고두고 힘이 되었다. 
멀게 느껴지는 이론이나 외국의 사례가 아닌, 
내 주위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짚어줬기 때문일 거다.

또문 동인지를 시작으로 엄청나게 읽어댔던 이 분야 책들 덕분에 
직장에서나, 결혼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 문제로만 생각해서 좌절하지 않고 싸울(!) 힘을 얻었다. 
그 시작이 된 책이다.


2. <마음 가는 대로 해라> 앤드류 매튜스

자기의 마음을 속이면 언젠가는 꼭 댓가를 치르게 된다.
앞으로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두 번. 
두 번 다 진짜로 하고 싶은 것,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억눌러 두고 
더 안전한 것, 남보기에 그럴싸한 쪽을 골랐지만 
덮어둔 고민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시작됐다.

재작년 가을에 만난 이 책은 나한테 "힘 내, 하고 싶은 걸 해!" 라고 말해줬고, 
난 이제 더 이상 '지금은 준비하고(또는 참고) 나중에 행복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3. <트리갭의 샘물> 나탈리 배비트

아이가 자라면서 다시 어린이책을 하나 둘씩 사게 되었고 함께 즐겼다. 
아이의 나이에 맞추어서 그림책에 푹 빠져있다가 이 책을 읽었고, 
어린 시절에 읽던 추억의 동화가 아니라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되어 처음으로 맘에 쏙 들었던 동화다. 
내 관심을 그림책 공부에서 외국동화 공부로 돌려놓은 책.


왠지 쓰고나니 창피하지만 
그래도 책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  

 

2000/10/31  
모 동호회 문화방 이벤트 "이 세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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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글이 포털 사이트에서 잘 검색되는지 보려고 이것저것 해 보다가 ^^;;; 
<너하고 안 놀아>를 검색해 봤다.  
검색 결과가 하도 많아서 여기 글은 못 찾았지만
대신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네.  

어느 초등학교 3학년이 쓴 감상글인데
'이 책은 옛날 할아버지들이 살던 때 이야기다'로 시작한다.  

옛날 할아버지라고?
이게?
아냐...라고 하다가 멈칫.  

할아버지 맞네.
현덕이 1930년대 후반쯤에 쓴 동화를 모은 거니까
지금 초등학생들에게는 정말로 까마득한 할아버지구나.  

예전에 딸내미랑 이 책을 읽을 때는
옛날 티 물씬 나는 삽화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걸림 없이 재미있게 즐겨서
이 이야기들이 그렇게 옛날에 나온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할아버지들 이야기라 이거지.
전혀 모르던 사실도 아닌데 <너하고 안 놀아>가 새롭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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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하고 안 놀아 - 개정판 창비아동문고 146
현덕 글, 송진헌 그림, 원종찬 엮음 / 창비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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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책을 소개할 기회가 생기면
얼른 이름을 꺼내고 보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현덕 동화집 <너하고 안 놀아>도 그 중 한 권이지요.

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현덕'이란 작가를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북으로 넘어간 작가여서
다른 월북 작가들처럼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물론 <너하고 안 놀아>가 처음 나왔을 때 그랬다는 거고요. 
지금은 현덕의 작품을 다 묶은 <현덕 전집>도 나오고 
짧은 이야기 한 편씩을 그린 그림책도 많이 나왔지만요.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설명하면
'노마, 똘똘이, 기동이, 영이가 노는 이야기'입니다.
진짜로 그게 다예요.
그런데 재미있습니다.
구구절절 이 사건 저 사건 나오고 이런 말 저런 말로 꾸민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몇 줄 적어볼까요? ^^

  기동이가 옥수수 과자를 먹고 있습니다. 저고리 앞자락에 한 웅큼 감추어 쥐고 하나씩 빼 먹습니다. 그 앞에 영이가 마주 앉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골목 응달입니다. 기동이는 옥수수 과자를 혼자만 먹습니다. 하나를 먹습니다. 둘을 먹습니다. 셋, 넷을 먹습니다. 그 앞에 영이는 말없이 보고만 있습니다.
  마침내 영이는 입을 엽니다.
  “맛있니?”
  “그럼.”
  “다냐?”
  “그럼.”
  그리고 기동이는 영이가 더 먹고 싶어하라고 일부러 더 맛있게 먹어 보입니다. 하나를 꺼내 들고 얼마나 맛있는 것인가 한참씩 눈 위에 쳐들고 보다가는 넙죽 넙죽 돼지 입을 하고 먹습니다. 그 손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영이 눈도 따라 움직입니다. 기동이는 옥수수 과자를 혼자만 먹습니다. 다섯을 먹습니다. 여섯을 먹습니다. 일곱, 여덟을 먹습니다.
 
<옥수수 과자>라는 이야기의 첫머리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지금은 고등학생인 딸내미가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입니다. 

사실 과제로 읽어 오라기에 읽었을 뿐,
처음에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어요.
뭐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얘가 걔 같은;;; 애들만 서넛 나오고...
심심하구만 뭐,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

그런데 일곱 살 난 딸내미한테 한 편을 읽어 줬더니 재미있다더군요.
뭐가 재미있는데, 그랬더니 그냥(!) 재미있답니다.
먹을 게 나오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하고 (제가 딸내미를 보는 눈이 이렇습니다;)
딴 걸 읽어 줬는데 그것도 재미있대요.
이 책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어서 신기했어요.

그 뒤로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씩 두 편씩 읽어 주다 보니
꼬맹이들 노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야기가 점점 좋아졌고, 
소리 내어 읽으면 입에 짝짝 달라 붙는 그 글맛에 빠졌습니다. 
다른 책 보듯이 눈으로만 훌훌 읽고 넘겼으면
이 책의 매력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겠지요.

주위에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없으면 혼자서라도 꼭 소리 내어 읽어 보세요.

이 책의 매력은 '맛을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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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10-1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밥 카페 '책 추천' 이벤트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품절


행복에 이르는 방도의 가짓수가 적을수록 후진국이다. '747' 과업을 못 이룬 나라가 아니라.-15쪽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중략)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자기 전투를 하시라. 어느 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P.S.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25쪽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착각하는 넘들이 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 윤리, 자본주의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대면할 때,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라.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100쪽

가족 간 문제의 대부분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그런 선이 없다는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120쪽

[외동딸의 데이트 코스까지 짜 주고 남자친구한테 확인전화 하는 부모에 대해]
그런 부모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해 그런다고 표현해선 안 돼요. 단순히 과보호라고 표현되어서도 안 되고. 그들은 자식이 한 사람의 독립되고 온전한 개인이 되는 걸 방해하는 훼방꾼이자, 자식의 인생 전체를 의존적이고 유아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책임한 자들이며, 자식을 보호한다며 자식의 자기결정권을 믿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항상 자신들이 대신 선택하는 걸 부모의 의무라 마음대로 생각해 결국 자식을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천하의 바보로 만들어버리는데도 그걸 사랑이라 믿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부류의 부모들이야. 아, 씨바, 좀더 나쁜 말 없나.-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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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09-2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김어준 총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산적 같이 생긴 외모도 그렇고(총수님, 죄송...;) 날것 같은 딴지일보의 말투도 부담스럽고... 아무튼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한 방에 바꿔준 것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상담 코너 '그까이꺼 아나토미'.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어? (넙죽)

요즘 다른 게시판을 보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자기가 결정할 문제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남한테 확인을 받고 빗나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 것이며(사실 남 얘기만은 아니다), 반대로 남의 삶을 휘젓는 오지라퍼들은 왜 그리 많은 건지.

거기에 일침을 놓는 총수의 '인생은 이런 거'.
마음에 든다.

2011/05/05
 

한때 "뒷방에 숨어들어 책이나 읽으며 살아버릴 테다"라는 
치유 불능의 책중독자적인 생각을 품었으나 
다행히 재활의 길을 걸어 지금은 출판 기획 및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어느 책의 역자 소개 중 첫 부분이다.
읽는 순간 "풉~." 하고 웃음이 나왔으나 사실 웃기지만은 않은 이야기.

치유 불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또에라도 당첨되면 근사한 서재를 꾸미고 거기 틀어박혀 살고 싶다는 꿈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으니까.

저 소개가 실린 책은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덧붙이자면 읽으며 너무 찔릴까봐 아직 못 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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