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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재미있다! 세계명작 3
루이스 캐럴 지음, 토베 얀손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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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도 많은 번역서가 나왔지만, 이 책은 읽기에도 편하고 독특한 삽화도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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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진짜 비밀이야 다림창작동화 4
김리리 지음, 한지예 그림 / 다림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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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이슬비’가 속으로 좋아하는 남자 짝꿍이 전학 간다는 소식을 듣는 데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결국 짝은 전학 가지 않고 둘은 화해한다. 흔히 보는 이야기고 줄거리만 보면 평범하다. 상투적이란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 나이 또래 아이가 할 법한 생각, 할 만한 행동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친근하고 재미나다. 우선 어른들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이야기가 많은 상황에서 아이들끼리 툭탁거리다 해결하는 이야기라 호감이 간다. 때문에 총 다섯 권인 이슬비 이야기 중에서 엄마나 이모 등 어른들의 비중이 큰 권은 재미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작가는 심리묘사나 잔잔한 감동에 매달리지 않고 아이들의 생활을 충실히 그려내는 쪽으로 이슬비 이야기의 방향을 잡았고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인물과 사건

이슬비는 어느 반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아이다. 활기차고 솔직하며,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서 행동하고, 무슨 일 때문에 조금 기죽었다가도 아이답게 금세 기운을 찾는다. 그래서 각종 말썽과 사고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인물이다.

말썽으로 보이는 이슬비의 행동에도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글에 설득력이 실렸다.

곧 헤어질 친구한테 어쩌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해서 사이가 어색해졌다. 선물을 하고 싶지만 저금통에는 돈이 없고, 엄마한테 말하자니 괜한 소리를 할까 봐 망설여진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슬비는 아빠 갈색 구두를 검정 구두약으로 닦아서 얼룩을 만든다. 놀란 이슬비는 이렇게 항변한다. “파란색 치약으로 이를 닦는다고 이가 파래지는 건 아니잖아요?”(19쪽) 맞는 말이다. 안 쓰는 자기 물건도 별 망설임 없이 친구들에게 팔기로 한다. 예전에 벼룩시장에서도 동화책을 팔았고, 털 달린 인형은 아기 아토피에 안 좋다고 엄마가 남 주려고 했으니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가게에서 싸게 파는 과자를 보자마자 학교에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락하게 돈 꿔 달라는 친구에게는 대신 이자를 받을 생각이다. 책에서 봤는데 은행에서는 돈 꿔 주고 이자라는 걸 받는댔으니까. 돈 벌 생각에 몰두하니 모든 것이 그리로 통한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는 어쩌면 저렇게 잔머리를 굴릴까 싶기도 한데, 이슬비의 행동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와 간절함이 있다. 그 와중에 깨달음도 얻는다. “앞으로는 누가 돈을 엄청 많이 준다고 해도, 절대로 남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을 거예요.”(39쪽)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내가 본 만화책에는 이자에 대한 것만 쓰여 있을 뿐 친구들한테 돈 빌려 주고 이자 받는 게 나쁜 거라고 쓰여 있진 않았거든요.”(58쪽)

이슬비 짝꿍인 재현이, 수다쟁이 단짝 아람이, 개구쟁이 양종호와 오영철. 글 속에서 구구절절 성격이 어떻고 속마음이 어떻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는데도, 아이들의 행동과 대화문을 보면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잘 보인다. 묘사가 길지 않아 글도 지루하지 않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슬비 이야기를 읽으며 아쉬움을 느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이슬비 이야기를 읽고 나서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라는 거다. 인물들이 생생하긴 하지만 개성적이지는 않다. 명랑만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본 듯한 도식적인 인물과 관계도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이슬비만 해도 개성 있는 독특한 캐릭터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수선스럽고 기운 넘치는 말괄량이 아이’라는 한 유형이 떠오른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건도 지극히 평범하다. 무심코 시작했다가 버릇이 된 거짓말, 새로 태어날 동생, 짝 바꾸기, 친구와 화해하기, 장래 희망 등. 

물론 그저 평범하지만은 않은 독특한 사건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 시리즈 3권 《제발 나랑 짝이 되어 줘》에서 이슬비는 자기와 짝이 되려고 할 아이가 하나도 없을까봐 미리 남자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하며 일부러 딱지를 잃어주고 마음을 사려고 애쓴다.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할까 싶은 독특한 에피소드가 작품 속에서 더 발전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대목에서만 확 살았다가 계속 이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이슬비 이야기의 ‘평범함’, ‘흔함’은 친숙함이 될 수도 있고 진부함이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은 분명 자기 곁에서도 곧잘 일어나는 사건, 자기 반에도 있을 듯한 인물에 친근감을 느끼고 자기 경험을 떠올려 가며 자기 이야기처럼 읽을 테다. 그러나 그거면 된 걸까? 만날 그게 그거라고 욕하면서도 보는 통속 드라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문체

이 작품은 이슬비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진 저학년 동화 중에는 지나친 심리묘사로 흘러서 작품에 나타난 아이의 행동과 심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슬비 이야기는 1인칭이지만 묘사를 통해 아이의 심리를 전하기보다 이슬비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전해주기 때문에 읽기에 불편하지 않다. 

문장도 별 군더더기가 없다. 특히 대화문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아이들이 평소에 쓰는 말 그대로라 입에 착착 붙는다. 짧고 쉬운 문장을 써서 읽기 편한 글이 되었고, 아이들에게 친숙한 말 덕분에 막힘없이 죽죽 잘 읽힌다,


평범한 이야기, 소소한 재미

일상 속의 평범한 이야기를 그렸다고 해서 무조건 나쁠 리는 없다. 다만 ‘어떻게’ 그려내느냐 하는 문제가 따른다.

아이들이 이슬비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실감이 주는 힘이 아닐까. 자신들이 평소에 듣고 쓰는 말, 나와 내 친구들처럼 행동하는 등장인물, 자신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또는 경험할 법한 사건이 버무려져서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평범하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인물과 사건이 무리 없이 배치되고 진행된다. 작품의 깊이는 얕더라도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반면에 이슬비 이야기는 작품에 나타나 있는 행동과 말로 이미 모든 설명이 끝난다. 이 인물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이런 대목은 뭘 뜻하는 거지, 이런 궁금증을 품을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니 독자가 더 파고 들어가서 해석할 일도 없다. 여러 방면으로 해석하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하면, 이슬비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는 분명 모자란 작품이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지만, 깔끔하게 쓴 글, 밝고 통통 튀는 분위기, 일상을 잘 드러낸 친숙한 이야기가 주는 재미 덕분에 이슬비 이야기는 아이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 되었다. 진부함과 대중성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 책을 어느 쪽에 더 점수를 주어야 할까?


+

책의 구성

쪽마다 윗부분에는 동화, 아랫부분에는 만화가 실려 있다. 삽화 수준이 아니라, 칸나누기도 되어 있고 대화에는 말풍선을 사용한 진짜 만화다. 각 쪽 아랫부분의 만화만 쭉 읽어도 결말 부분의 편지글 정도만 빼고는 줄거리 이해에 별 문제가 없다. 아이들은 여기에 많이 끌리지 않을까?

그러나 본문을 읽으려고 할 때는 이 만화가 방해가 된다. 글을 읽고 자연스럽게 눈이 아래로 가면 같은 내용이 반복되곤 해서 글 읽는 흐름이 뚝뚝 끊긴다. 설마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하려는 효과는 아니겠지. 이런 책을 어찌 평가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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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2-04-28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연구실 토론회 발제
 
금두껍의 첫 수업 창비아동문고 254
김기정 지음, 허구 그림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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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만나는 공상 세계

《금두껍의 첫 수업》을 읽으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상 세계로 들어가는 점이 우선 눈에 띄었다. 공상을 현실의 도피처로 이용한다든지 교훈적인 주제를 펼치는 도구로 삼지 않아서 좋았다.

<금두껍의 첫 수업>(이하 <금두껍>)에서 주인공 검지는 학교 가는 길에 처음 두꺼비를 만나서 가방에 넣어 데리고 간다. 이튿날 다시 늪에서 두꺼비를 만났을 때 두꺼비가 난데없이 사람 말을 하지만, 이때는 이미 검지에게 두꺼비는 친숙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말하는 두꺼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두꺼비가 왜 나와야 하는지 어색하지 않고, 공상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도깨비 일기>(이하 <도깨비>)에서는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아이가 일기장을 편 순간에 공상 세계 ― 도깨비가 대신 쓴 일기 ― 가 등장하는 구성이 깔끔하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이야기라 조금 구닥다리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반면 <학교가 사라진 날>(이하 <학교>)에서는 조금 아쉬운 면이 보였다. 노야는 방학 숙제인 일기를 쓰지 않아서 개학날 학교에 가기가 싫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은 나머지, 예전에 선생님한테 들은 요술 주문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공책에 있는 학교 그림을 지우며 주문을 외워 봤다니?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노는 아이들, 놀게 해 주는 어른들

김기정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라는 작가의 굳은 믿음이다. 기존에 발표된 《박뛰엄이 노는 법》, 《뭐 하니? 놀기 딱 좋은 날인데!》 등의 작품 제목에서도 그 점은 뚜렷이 드러난다(물론 작품 속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놀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김기정은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작가의 생각이 작품 곳곳에서 강박으로 작용하는 느낌이 든다.

<금두껍>에서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은 금두껍이 친구들을 선동(?)해서 학교 선생님들이 출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난 금두껍은 교실을 놀이판으로 바꿔서 아이들을 놀게 해 준다. 뒤늦게 학교에 오는 선생님들이 헉헉대며 하는 말이 재미있다.

그런데 두꺼비들이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만들어 준 상황이 과연 아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놀이였을까? 교실이 늪으로 변하고 학교 건물에는 아름드리나무와 폭포가 생기고 아이들은 갖가지 동물로 변해서 뛰논다. 이 부분은 <금두껍>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막상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작품 속에서 말하는 재미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놀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른(여기에서는 두꺼비들)이 한판 놀라고 자리를 만들어주는 식이라는 게 아쉽다.

또, 검지가 학교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아기를 낳으러 간 담임선생님 대신 새로 올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게 두려워서다. 두꺼비 선생님들이 벌인 한바탕 소동이 끝나도 검지의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을 텐데, 과연 검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도깨비>의 주인공 사내아이는 늘 심심하다. 일기도 억지로 지어내야 써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일기장 속에서 도깨비들이 나타나 교실 안의 비밀을 알려 준다. 담임선생님의 방귀 뀌는 버릇, 아이들이 몰래 숨겨서 가지고 있는 동물과 잡동사니,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야단하는 교장 선생님이 실은 예전에 말썽꾸러기였다는 사실 등. 그 후로 아이는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감에 차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한다. 일기장을 통한 도깨비의 제보(!)가 없었어도 아이는 학교에서 한바탕 놀 수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고 아닐 것 같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그런 고민이 조금 덜하다. 어쨌든 노야가 만들어 낸 텅 빈 학교 자리, 또 새로 생긴 학교에서 아이들은 즐겁게 뛰어 놀았다. 노야 또한 사라졌던 학교가 돌아왔다는 즐거움으로 일기를 쓰지 않은 게 이미 그다지 문제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으므로.

일기 숙제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글쎄. 분명한 건, 이날 온종일 노야가 해죽해죽 웃고 다녔다는 사실이야. 어쩜, 선생님한테 혼났을 수도 있지. 그러나 노야한테 일기 숙제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라졌던 학교가 돌아오셨으니, 일기가 뭐 그리 큰일이겠어! (23쪽)

이처럼 어른들이 판을 벌여주기 때문인지 다 읽고 나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인상에 남는 작품이 많았다.

<학교>의 주인공은 지우개로 학교 그림을 지워서 본의 아니게 학교를 없앤 노야다. 그런데 노야 하면 학교를 지웠다가 다시 그린 것밖에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오히려 학교가 사라졌을 때 학교와 학생을 걱정하기보다 학교를 잃어버린 교장이라고 소문이 날까봐 걱정하는 교장 선생님, 새로 생긴 학교에서 새 책과 잔디 운동장이 생겨서 기뻐하는 선생님들, 진기한 요리를 할 줄 아는 요리사 등이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금두껍>에서 두꺼비가 학교에 선생님으로 나타날 때까지는 검지가 확실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검지의 비중은 확 줄어들어 버린다. 다른 아이들이 다 동물로 변했을 때도 검지는 자기만 변하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 금두껍이 검지의 예쁜 목소리를 눈치채 줬을 때야 비로소 검지도 꾀꼬리로 변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금두껍의 비중이 너무 커서 검지는 금두껍이 나오도록 이끌어주는 조연 같다는 느낌을 준다. 글을 읽으면서 금두껍이 아이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럼 어른인 두꺼비가 주인공인가? 그러고 보니 제목도 <금두껍의 첫 수업>이네. 누가 주인공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하나 덧붙이자면, <학교>, <금두껍>, <도깨비> 세 편에서 모두 교장 선생님이 등장하고 이야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라는 대상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친숙한 대상인가? 오히려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 하면 교장실에 있는, 선생님보다 높은 어른 정도로만 인식하지 않을지. 여기에 등장하는 교장 선생님은 어른들의 권위에 대한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구수한 입담? 쓸데없는 잡담?

김기정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작가가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로 작품을 끌어나간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화자(김기정이 분명한)는 때로는 함께 웃고 때로는 참견하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미있는 표현도 많이 섞어 쓴다. ‘열아홉 바퀴나 돌고도 주차장을 찾을 수 없었지(14쪽)’, ‘꽃밭 왼쪽에서 열아홉 번째 장미 아래(20쪽)’, ‘천아홉 가지 진기한 요리(24쪽)’ 같은 대목에서 밑줄 친 말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척하면서 실은 일종의 말장난이라 읽는 재미를 준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입담이 쓸데없이 너무 나갔다 싶을 때가 있다. 작가는 ‘이거다’ 싶어서 힘을 실어 쓴 것 같은데, 정작 읽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예를 들면 <학교>에 나오는 요리사의 안내문 같은 게 그렇다.

니들 맘대로 골라 먹어라. 제발 찬찬히 꼭꼭 씹어 먹어라.
몹시 맛나서 둘이 먹다 다 죽어도 난 모른다.
쌀 한 톨 남기지 마라. 남기는 놈은 다 먹을 때까지 꿀떡 하나 더!
새로 온 꿀떡 요리사! (25쪽)

‘이거 재미있지? 이 대목에서는 웃으면 돼.’라는 작가의 생각이 빤히 보이는 이 대목을 과연 아이들이 재미있어할지. 게다가 음식이 맛있어서 ‘꿀떡꿀떡’ 삼키는 것에서 ‘꿀떡’ 요리사가 나오고 ‘꿀떡 하나 더’가 나왔지만, 그냥 읽어서는 ‘갑자기 웬 꿀떡?’이라고 느끼기 십상이다.

<금두껍>에서 두꺼비가 쓰는 사투리도 그렇다. 능청맞으면서도 우스운 두꺼비의 성격을 그리는 데는 잘 어울린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투리가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져 굳이 써야 하나 싶다는 의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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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2-04-28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연구실 토론회 발제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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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점>
개구리와 두꺼비의 단순하고도 앞일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특히 계획표를 짜고 그에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 씨앗을 뿌리고 언제 싹이 나올까 안달하는 모습, 먹고 싶은 과자 앞에서 자꾸 손이 나가는 모습 등이 재미있었다.
책 분량은 적지 않으나 글씨가 크고 짤막한 글 여러 개로 되어 있어서 처음 혼자 읽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도 알맞다.

아쉬운 점>
줄거리 위주의 책에 길들여져서일까? 내가 읽기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듯. 초등 2학년 딸내미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행동을 마냥 재미있어 한다. 

2002/03/26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은 '이게 뭐가 재미있을까?'였다. 
그러니 위의 느낌글만으로 별점을 매긴다면 별 세 개 정도?

그러나 5년쯤 지나서 다시 읽었을 떄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책을 재미없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 

지금은?
강력 추천, 별 다섯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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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10-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외국동화분과 발제
 
산적의 딸 로냐
린드그렌 지음, 김라합 옮김 / 일과놀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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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달에 걸쳐 분과 사람들과 함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을 읽어나갔다. 린드그렌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끌었던 책은 《산적의 딸 로냐》였다. 이 책 속에는 '로냐'라는 매력적인 아이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와 많은 생각거리들이 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옮겨본다.


로냐라는 아이

로냐는 내가 어렸을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 초록지붕 집에 사는 앤이나 소설가의 꿈을 꾸는 죠우-이나 린드그렌의 유명한 주인공 '삐삐'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아이다. 아이다움과 어른스러움, 활달함과 침착함을 함께 지닌 아이. 이것은 로냐만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어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의 숨은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로냐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사뭇 다르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거짓으로 느껴지지도,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수리 마녀가 날아다니고 회색 난쟁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배경을 빼고 사람만 보면 옆집 아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린드그렌이 책 속에 그려낸 아이들을 보노라면 '정말 아이답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 속을 잘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로냐 또한 그렇다.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 마티스의 성이나 숲 속에서도 혼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만, 비르크와 만난 뒤에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 비르크와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고 속상해 하고, 그리고는 곧 후회하고 다시 친해진다. 언제나 올바르다고 믿던 부모의 다른 모습을 알고나서는 반항하고 집을 나오지만 바깥에서는 집을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아이다. 우리가 언제나 아이들에게서 보는 그 모습을 로냐에게서도 본다.

밝고 씩씩하고 생각할 줄 아는 아이 로냐가 나는 정말 좋다.


여자와 남자

로냐의 아빠 마티스와 그를 따르는 열두 명의 남자들은 다른 어떤 무리보다도 '남자답다'는 말이 어울릴 '산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던 산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힘으로 보르카 무리를 이기고 싶어하고 큰소리 치기 일쑤인 마티스지만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인색하지 않고 (이렇게 툭 하면 흥분하고 여러 번 눈물 흘리는 아빠는 책 속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 딸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잔걱정도 많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에 비해 엄마 로비스는 다정하고 꼼꼼하지만 큰 일이 닥쳤을 때는 침착하고 담이 크다. 로냐에 대해서도 마티스보다 한 발짝 더 뒤에 물러서서 지켜볼 줄 아는 엄마다.

슬픔에 겨워 울부짖는 마티스, 시끄러운 산적들에게는 고함을 치지만 슬퍼하는 마티스를 안아서 달래주는 씩씩한 로비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여자가…' 또는 '남자가…'라는 덫은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그런 생각에 대한 통쾌한 한 방이었달까. 이런 모습이 그려져도 어색하지 않은 건,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린드그렌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여자들의 자리가 높은 스웨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자식과 부모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한다. 마티스와 보르카는 숲을 호령하는 무지막지한 산적이지만 자식 일에는 한없이 마음 약해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자식을 보고 심란해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러나 로냐가 자라서 처음으로 숲에 나갈 때 마티스와 로비스가 어떤 말을 하면서 보내는지, 마티스에게 반발해서 집을 나간 로냐를 로비스가 어떻게 기다려 주는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올바른 부모의 자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이제 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자신의 틀에만 가둬놓지 않고 지켜 봐줄 줄 아는 부모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수리 마녀들과 회색 난장이, 그리고 보르카네 산적들을 조심해라."
"어떻게 생긴 게 수리 마녀고 회색 난장이인지, 누가 보르카네 산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너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곧게 난 오솔길을 찾도록 해라."
"강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죠?"
"헤엄을 쳐라."
"…또 조심해야 할 일이 있나요?"
"다 됐다. 이제 차차 하나씩 하나씩 터득하게 될 게다. 자, 가거라!" (1권 22-24쪽에서 부분 발췌)

… 굴 앞의 넙적 바위에서는 로비스가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딸 로냐야, 머리가 젖었구나! 헤엄쳤니?"
로비스가 물었습니다.
(중략)
로냐는 엄마 곁에 앉아,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산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들릴락 말락 조용히 흐느꼈습니다.
"내가 왜 왔는지 알지?"
로비스가 이렇게 말하자 로냐는 흐느끼며 웅얼거렸습니다.
(중략)
"엄마, 만일 엄마가 저라면, 그리고 엄마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 정도로 무정한 아빠를 가졌다면, 그런 아빠에게 돌아가겠어요? 아빠가 찾아오거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을 하지 않아도요?"
로비스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나 같으면 돌아가지 않을 게다. 아빠가 나에게 사정을 해야지, 암, 그래야지!"
(중략)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로냐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때 이미 로비스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로비스가 놓고 간 회색 스카프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습니다. 로비스는 로냐가 잠든 사이에 그걸로 로냐를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2권 89-95쪽에서 부분 발췌)

마티스는 숲으로 간 로냐가 마주치게 될 위험을 조목조목 짚어주지만 결코 앞서 나가거나 부모가 다 해결해 주려 하지는 않는다. 로비스 또한 집을 나간 로냐를 섣불리 달래려 들거나 억지로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잠자는 사이에 덮어준 스카프로 딸에 대한 사랑을 말없이 전해줄 뿐이다.

나라면 이들처럼 너 혼자 바깥 세상에 나가서 겪어보고 깨닫거라 하면서 열두 살 아이를 쉽게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까. 로냐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바깥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 어렵지만 용기를 내는 일도 부모가 할 일이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그려지는 숲 속의 모습은 손에 잡힐 듯 하다. 나란 사람은 등산과는 거리가 멀기에 '숲'이란 말을 들으면 고작해야 동네 뒷산이나 수목원 속의 모습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로냐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숲과 강과 그 속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머리 속에서만 만들면 절대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 린드그렌 그 자신이 직접 겪어보고 쓴 글일 거라는 믿음이 든다.


줄거리만 꿰뚫고 나면 더 이상 볼 게 없는 책 말고 여러 갈래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 좋은 책이라 했던가. 《산적의 딸 로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게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로냐가 되어서, 로비스와 마티스가 되어서, 비르크가 되어서, 때로는 산적 떼가 되어서 그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읽어보려 한다. 

 

200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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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09-2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회보 '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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