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난 후 며칠간 꿈을 꾸었습니다. 깨고 나면 녹아버리듯 사라지는 꿈을 꾸느라, 며칠간 뒤숭숭한 잠을 잤습니다. 

  바로 오늘 꾼 꿈에는 부유하고, 기품 있는 일본 무사의 집이 나왔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비장한 모습으로 방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실내는 어둑했고, 촛불이 몇 개 켜져 있는 듯도 했습니다. 그 집의 하녀였는지, 더부살이였는지 나는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긴 복도를 지나 부엌을 지나치는데, 그 집의 집사장쯤 되는 남자가 단정하게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동정을 바라는 내 눈과 마주쳤지만,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집을 나와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밤이였죠. 그 집을 나가는 게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집에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 허물어져가는 담벼락 사이 아늑한 곳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더니, 반짝이는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 유대인들이 갇힌 채 불타버린 교회의 이미지가 이렇게 꿈으로 나타난 걸까요? 이상하고 낯선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자꾸만 기괴한 꿈을 꿉니다. 

  이 소설은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부끄러움과 책임감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인간의 죄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섣불리 한나를 동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섣불리 한나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죄가 있었고,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죄를 알기 위해 온힘을 다했던 한나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가슴이 뻐근해서, 서평을 써볼까 하고 알라딘을 열어보면, 대부분 리뷰가 그득하다. 그 리뷰들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글을 쓸 생각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 내 말이 이 말이야. 어쩜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정리해 놨지? 이게 이런 의미였군.’하면서 슬그머니 다른 책들을 검색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리뷰가 생각보다 너무나도 적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이리 리뷰가 없을까 안타까워하다가 잘 못 쓰는 글이나마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2권을 늦은 시간까지 읽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깨어서도 계속 박지원과 얘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흥분이었다. 

  이 흥분을 정리해 보면, 우선 왜 이런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문학 언저리에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내가 이제야 이것을 읽었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웠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한역된 열하일기가 있었음에도 한번도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음식의 원재료가 아무리 싱싱하고 영양가가 있어도, 특별한 미식가가 아닌 이상 보기 좋고, 먹기 좋게 요리해 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한글 세대에게 우리의 한문 문학이 바로 그런 재료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그린비에서 맛깔스러운 밥상을 차려 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가장 기행문다운 기행문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여행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아주 훌륭한 글이다. 이 책의 꼼꼼한 사진 자료의 덕도 크겠지만, 박지원의 글을 읽으며 지금 열하로 여행을 떠나면 그가 만났던 풍물을 나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만났던 중국의 상인들도, 점잖은 관리들도, 마두들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느낌. 그것 때문에 내가 며칠간 설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 눈을 시원하게 터주었던 호곡장을 인용한다. 처음 이 글을 접하고, 심호흡하고 다시 한번 읽어야 했다. 아득한 저 멀리까지 지평선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벌판을 상상이라도 하면서 요즘의 하수상한 세월을 이겨낼 힘을 얻고 싶다.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저도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건 갓난아기에게 물어봐야 될 것이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 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 울부짖기만 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삶이란 성인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이.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 곳이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요란한 전면 광고 때문에 제목을 알게 되었고,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받았다는 얘기에 읽어 보게 되었다.

  미덕은 많다. 쉽게 술술 읽힌다. 양념처럼 등장하는 욕설도 재미난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와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주인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성장해 간다.

  그러나 인물들은 모두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 완득이, 착한 선생 똥주, 똘똘한 여학생 윤하, 난쟁이 아버지, 베트남인 어머니, 그리고 멋진 체육관장님까지. 아, 또 있다. 똥주와 욕설을 주고 받는 이웃집 아저씨까지 모두다 전형적이다. 인물들이 전형적이다 보니 읽을수록 사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청소년 소설이기 때문에 인물들은 전형적이어도 상관없는 걸까?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으며, 길이도 적당하고, 주제도 교훈적이면 청소년 소설로 충분한 걸까?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서 다른 소설과 다른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년 소설이라도,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소설이 갖추어야할 형식적인 아름다움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광고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위험한 생각들>이라는 책을 읽고 내 지식들 중 물리학에 관한 부분이 백지라는 걸 알았다. 뭐 좀더 솔직히 말하면 새삼스럽게 알게 된 건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생활하면서 문득문득 궁금한 건 있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왜 뒤로 가서 떨어지지 않을까? 핵무기는 어째서 그렇게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을까? 블랙홀이라는 게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신문을 읽다가, 뉴스를 보다가 문득문득 ‘아인슈타인’이나 ‘상대성 원리’라는 말이 스치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한 일이 그 속에 있을 거라는 생각, 난 결코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험한 생각들>을 읽으면서 내가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결국 나 자신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뭐부터 시작해야 하지?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둘러보다가  E=mc2 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3박 4일 간 E=mc2 를 두 번 읽고, 오래 오래 생각했다. 뭐랄까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뜬 느낌? 내 시력에 잘 맞는 안경을 끼어서 세상이 또렷해 보이는 느낌? 알 수 없던 무늬가 하나의 형체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 아무튼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신선한 충격이었고, 즐거움이었다. 

  난 이제 왜 태양이 그토록 강한 에너지를 내뿜을 수 있는지 안다. 밤하늘의 별들이 왜 반짝이는지도 안다. 별의 탄생과 성장, 소멸을 안다. 블랙홀이 무엇인지 안다. 시간이 달리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시간과 공간이 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타임머신이 왜 만들어질 수 없는 지도 알 것 같다. 지구상에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좀더 알고싶다. 어디 이런 책 또 없을까? 학교 다닐 때부터 화학과 물리에는 쥐가 나던, 고등학교 졸업이후 거의 20년 만에 다시 과학의 세상이 궁금해진 내가 읽을 만한 쉬운 과학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책이 좋다. 때로는 일부러 자제해야할 만큼, 책을 보면 읽고 싶어진다. 책을 읽으면 그 속에 빠져들어 세상일을 제쳐두고 골몰하기 일쑤다. 책 읽기를 끝내고 나면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해 주면 좋을까 생각해본다. 그 책 너무 재미있더라는 말 한 마디면 난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해진다.

  나는 책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만큼 난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은 열망에 휩싸인다. 간질간질하고 조마조마한 이야기의 즐거움을 아이들도 알게 하고 싶다.

  나는 국어 선생이다. 국어 선생이 책을 좋아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하지 마시라. 내가 아이들을 향해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내 즐거움의 크기만큼 아이들은 저만치 책으로부터 도망친다. 아이들은 그 책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책이 평가에 얼마나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에 주목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너무나 읽히고 싶은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소설처럼>을 생각한다. ‘읽다’는 동사는 ‘꿈꾸다’, ‘사랑하다’처럼 명령형이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목소리를 다시 생각한다. 책은 아이들이 독서감상문을 쓰거나, 사고력과 창의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씌여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되새긴다.

  그리고 나면 책을 읽히고자 하는 내 간절한 열망은 조금씩 가라앉고, 나는 수업을 하다가 마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듯, 책 속의 한 도막을 꺼내 놓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지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내가 던진 미끼를 무심히 스쳐지나 가기 일쑤다. 그래도 난 그다지 괴롭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책을 읽지 않을 권리도 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