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일상사 - 맹신과 무관심 사이, 과학기술의 사회생활에 관한 기록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1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박대인, 정한별) 지음 / 에디토리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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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나의 유령이 한국, 아니 지구를 배회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유령이.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 즉 트럼프와 로하니, 문재인과 아베, 영국의 보수당과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불길은 쉽사리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코로나 19는 마치 점포 하나까지 알뜰히 털어먹는 일수꾼마냥 온 세상을 신나게 헤집어놓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코로나19를 전후하여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했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과연 코로나 시대가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지 아니면 인터넷 밈으로 그칠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가지 깨달음만큼은 확실히 안겨준 듯하다. 바로 과학은 그 자체로는 철저히 무력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 독일 등 내로라하는 과학강국의 엘리트 연구진이 백신을 개발하고자 밤낮없이 노력중이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다. 중국 연구진이 원숭이로부터 코로나19 항체를 확인했다는, 희망을 갖기엔 너무나 미약한 발견만이 뉴스를 통해 전해질 뿐이다. 이번 사태에서 과학은 결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코로나19를 통해 실감한 건, 과학보다는 오히려 (좋든 나쁘든) 사회의 위력이다. 가히 하이퍼 모더니즘이라 불릴만한 한국의 방역 총력전, 신천지가 드러낸 한국 기독교의 민낯, 구로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 과로 끝에 사망한 택배노동자까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의 온갖 측면을 들쑤셔놓았다. 덕분에 지금 한국에선 국경폐쇄, 재난기본소득, 노동조건 개선, 마스크 배급제부터 심지어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사회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는 중이다. 만일 이전과 구분되는 코로나 시대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건 전염병이라는 (자연)재해가 과학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자각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과학의 무력함과 그에 비례해 사회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부각되는 지금, 박대인과 정한별의 과학기술의 일상사는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안겨준다.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이하 과정남)을 엮어 낸 이 책은, 과학의 위대한 발견을 흥분조로 소개하는 여타 교양서와는 확실히 다르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건 위대한 발견의 이면, 그러니까 무언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결과를 학술지에 등재하거나 제안서의 형태로 가공하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그렇게 탄생한 발견이 어떠한 투쟁과 타협을 거치며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차분하고 꼼꼼하게 탐구해간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꼭 필요한 책으로, 필독서로 지정해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읽히고 싶다. (뜬금없이 느껴지겠지만 내 입장에선 교양서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저자들은 과학기술이란 낡은 개념을 다시금 꺼내든다. 과학기술사 연구자인 김태호에 따르면, 그간 한국에서 과학기술은 그것이 처음으로 구체적 의미를 갖게 된 박정희 시대 이래 생산성 향상을 통한 소득증대로 받아들여졌다.(김태호, 과학영농의 깃발 아래서-박정희 시대 농촌에서 과학의 의미」, 『역사비평2017년 여름호 or 과학대통령 박정희신화를 넘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정보통신기술(ICT) 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4차 산업혁명까지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역시 이름만 바꿔왔을 뿐 본질은 박정희 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시대에 따라 있어 보이는키워드들을 죄다 우겨넣는 식으로 업데이트해왔다는 차이만 있을 뿐.

 

  하지만 과학기술은 단지 생산성을 높여 국가에 이바지하는 도구도, 그렇다고 과학기술의’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기계적 결합도 아니다. 저자들은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도움을 받아 과학기술에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로의 도약을 시도한다. 테크노사이언스란 간단히 말해 과학지식을 정치, 경제, 사회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관점으로, 과학지식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제도화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김태호, 양승훈, 최형섭 등, 한국에도 테크노사이언스로서의 과학기술사/정책을 연구하고 이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이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저자들이 테크노사이언스를 통해 재구성한 과학기술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이라는 점이다. 과학기술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음습한 연구실이나 프린스턴의 고풍스런 교정을 거닐던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뿅! 하고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은 중소기업 사장이나 다름없는 교수가 이끄는 연구실에서, 수많은 석박사와 기술자의 협업을 거쳐 탄생한다. 연구만 한다고 다가 아니다. ‘물주인 국가기관이나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미팅을 잡고 제안서를 수정해야 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구일 경우 언론과의 인터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과학기술 연구란 천재 과학영웅의 단독작업이 아닌 만큼, 철저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막말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는데 인간관계 트러블이 안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사소한 감정싸움부터 보다 큰 스케일의 파벌싸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갈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학생 신분이란 이유로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학원생과 학생연구생,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경력이 단절되곤 하는 여성 과학인의 목소리는 배제되기 일쑤다.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써내야만 하는 각종 지원서 역시 고도로 정치적인 작업이다. 정부가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경우야 좀 낫겠지만, 연구과제 제안 요청서(Request for Proposal, RFP)의 경우엔 정부의 니즈를 찰떡같이 알아먹고 가격 역시 적정수준에 맞춰야한다. 당연히 중공업계나 건설업계를 방불케 하는 수주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비공식적으로 ‘REP 요청서(연구과제 제안 요청서 요청서)’라 불리는, 이러이러한 연구가 국가에 도움이 될 법하니 관련 공모를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도 존재한다! 흔히 과학의 차가움을 비판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을 이야기하는데, 이미 과학은 지극히 인간적인 셈이다. 다만 그 인간다움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뿐.

 

  그렇다면 과학기술정책을 더한 과학기술정책은 어떨까? 과학기술 자체도 이토록 정치적일진대, 그것이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과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대표적으로 최근 몇 년 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공유경제 논란을 살펴보자. 우버와 에어비앤비, 타다 등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은 이들 서비스는 이내 기존 이해관계자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우버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타다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공유경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타다의 이재웅 전 대표를 비롯한 기업인들은 여전히 이를 도도한 혁신의 물결을 거스르는 반동으로 규정하며 이성적 판단을 호소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의 말마따나 공유경제 서비스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등장한 역사의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연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유경제 서비스가 일으킨 파장은 그간 정보통신기술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얼마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공유경제란 기술발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를 확인하는 지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유경제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드러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우버와 타다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정보통신기술만큼이나, 택시기사나 숙박업자와 같은 기존 사업자들의 강력한 영향력과 존재감 또한 실감했다. 보수언론이나 기업계의 주장처럼 이들이 혁신을 막는 적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를 밀어붙일 경우, 과연 창조로 인한 이익이 파괴로 인한 손해보다 크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파괴를 제대로 밀어붙일 수나 있을까? 우버가 퇴출된 이후 비슷한 사업을 시도한 카카오가 결국 택시라는 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과학기술이란 보검을 내세워 이 복잡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한 때 서점가를 휩쓸었으나 이제는 만인의 지탄을 받는 책 제목을 빌리자면, 결국 해답은 닥치고 정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들은 어차피 한국이 과학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는 탑티어 국가가 (당분간은) 되지 못하는 이상, 아예 크게 방향을 틀어 무엇을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가령 미국이나 독일이 인공지능 같은 선제적이고 융합적인 분야를 선점한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한국이란 사회에 연착륙시킬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과 인권보장,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을 북돋되 그 폐해를 교정할 수 있는 적절한 규제 마련 등이 이에 해당하겠다.

 

  과학기술이 정치의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 시민의 역할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냉정히 말해, 그간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상대성이론처럼 어렵지만 있어 보이는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이에 감탄하는 일에 불과했다. 아마 저자들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차라리 SF를 읽는 게 훨씬 낫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잘못 번역되곤 하는 SF야말로 과학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사회는 과학기술의 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언어로 풀어낸 사고실험이기 때문이다. (사고실험으로서의 SF에 관심이 있다면 배명훈의 따끈따끈한 신작 SF 작가입니다를 추천한다!)

 

  물론 SF보다 좋은 건 따로 있다. 바로 소양으로서의 과학기술정책이다. 과학기술이 제도와 정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책의 대상과 목적, 파급효과를 면밀히 따져가며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능력이야말로 시민의 덕목이자 의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시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코로나19로 촉발된 백가쟁명이 그 증거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개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건설적인 결과로 이어지려면 더 많이 읽고, 쓰고, 공부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치 모든 일을 예견한 듯 재난에 대한 장까지 따로 마련해 둔 과학기술의 일상사야 말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꼭 읽어야 할 교양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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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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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조선에서나 볼법한 극렬한 당쟁의 여파로, 미토번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힘 한 번 못쓰고 폭삭 망해버렸다. 하지만 미토번은 망해도 망한 게 아니었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 뱃속의 새끼들은 결국 뱀의 몸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는 80년대 운동권의 프로파간다처럼 미토번의 정신적 후예들이 천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막말 유신지사들의 이념적 나침반이었던 후기미토학부터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토번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기미토학의 이데올로그였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와 그 제자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유명세는 80년대 대한민국의 김영환이나 이진경(박태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실제로 그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 각지의 수많은 지사들은 흠모하는 선생님밑에서 배우고자 국경(당시 일본에선 번이 곧 나라였으므로)을 넘어 미토번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모교와의 연계를 이어갔다. 그저 밖으로부터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했던 게 아니다. 미토번의 사무라이들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번을 떠나 천하를 유랑하며 깽판도 많이 쳤지만, 그 과정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다른 번에 전파하기도 했다. 여러 모로 튀었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행보 또한 유교적 이상군주로서의 천황을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주자학의 극단적인 일본적 변형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미토학, 그리고 이를 매개로 형성된 사대부적 정치문화야말로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게 박훈의 설명이다.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그의 책에서 마땅한 비판거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꼼꼼한 실증이 뒷받침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가 몇 겹의 가정과 제약으로 자신의 주장이 확대해석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가 거대서사혹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경우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일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긴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역사학이 외려 다른 분과보다 거대서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퍽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지난 2018년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가 유교의 공론정치와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를 연결짓자 평안도 악센트가 인상적이었던 한 원로학자가 포퓰리즘을 옹호하다니,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비판하던 모습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이러한 신중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박훈이 예상되는 거의 모든 비판을 선제적으로 반론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막아버린다고 느껴져서다.

 

  가령 박훈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유교적 근대론과 선을 그으며 자신은 유교에서 근대적인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에는 부정적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입장은 유교가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를 도입하는 촉매 역할을 한 뒤 자살했다고 여기는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에 가깝다. 그간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비롯해 그가 쓴 논문과 칼럼 등을 읽으며 유교는 그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어왔는데, 이 책에서 아예 와타나베의 입을 빌려 그렇다고 못을 박은 셈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시대의 맥락(context)’과 이용하는 주체의 성격, 그리고 이용 수준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질 때만 겨우 가능할 뿐이다.(p.51.)

 

  하지만 유교가 기껏해야 촉매 혹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 중요성을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유교를 촉매로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맥락과 주체의 성격, 그리고 역량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박훈이 교양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자주 인용하는 요나하 준(與那覇潤)중국화하는 일본을 통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국화하는 일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s://brunch.co.kr/@msg2012/12 참고)

 

  요나하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건 중국화’(‘유교화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를 감행하며 겸사겸사 서양화도 패키지로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중국은 송나라, 한국은 조선왕조 때 이미 중국화를 달성해버렸기에 구태여 서양화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게 요나하의 설명이다. ‘중국화를 보편이자 필연으로 여기는 요나하로서는 일본이 그만큼 시대의 흐름에 뒤쳐졌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일본은 그때까지 중국과 전혀 다른 사회였기 때문에 중국화를 매개로 서양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나하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일본(에도시대)으로 따로 분류될 만큼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핵심은 먹고사니즘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오사카의 거대 사찰인 이시야마 혼간지(右山本願寺)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일본의 지배세력은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 안전·생계보장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보장받았다. 다시 말해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권위를 흔들지 않는 이상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칼을 쥔 건 자신들이니 말이다. (에도시대의 인쇄혁명역시 역설적으로 말과 글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 점에서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정치의 발견자라며 추켜세웠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그저 이를 사후추인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https://brunch.co.kr/@msg2012/8)

 

  실제로 유교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19세기 중반에도 막부는 서양에 열린 자세를 유지했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문물을 적극 흡수했다.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42년부터 1857년까지 서양화 정책을 진두지휘했고, 그가 발탁한 인재들은 서양에 대한 이해도로나 실무능력으로나 당시 일본에선 따를 자가 없었다. 권력의 원천이 종교나 사상이 아닌 무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18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막부 내 강경파 인사들 사이에서 쇼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능력본위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훗날의 메이지 신정부를 연상케 하는 주장이 등장하기까지 한다.(p.433.)

 

  이처럼 무인사회라는 특성상 막부를 비롯한 일본사회 전반이 서양의 새로운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열려 있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유교 없는 메이지유신은 불가능했을지언정, 메이지유신 없는 근대화(서구화)’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막말로 막부의 내부총질러인 미토번이 조금만 더 고분고분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조금만 더 일찍 쇼군에 등극했더라면 앞서 이야기한 막부 강경파의 꿈이 실현되었을 수도 있다.

 

  정리해보자. 유교는 분명 메이지유신에 일정한 역할을 했으나, 이를 완수한 뒤 자살했다. 그리고 어쩌면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근대와 별반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교는 근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양자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를 돌파할 방법은 이전까지 수많은 연구자가 그러했듯 무턱대고 유교에서 근대의 맹아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 성실하고 치밀하게 추적해가는 것이리라.

 

  저자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의 근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봉건·군현론이라는 유력한 테제를 제시했음에도 정작 이 맥락에서 일본의 의회개설을 사유하지 못한 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사학계의 거인인 민두기와 중국화하는 일본으로 일본사회를 뒤흔든 요나하 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봉건·군현론, 근대전환기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이 틀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강한 설명력을 갖는다. 문제는, 정작 저자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는 의회개설은 봉건·군현론을 통해 설명하지 못하고(혹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자국의 봉건제를 고대의 이상에 부합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겼다. 반면 군현제는 각 번의 자율성을 찍어 누르려는 막부 강경파의 획책, 그러니까 비난받아 마땅한 패도(覇道)’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메이지유신 역시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초창기엔 막부의 봉건에서 천황의 봉건으로 이행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막상 왕정복고 이후에는 군현제 긍정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는데, 그 시작은 18691월의 판적봉환(版籍奉還)이었다. 당시 유신을 주도한 주요 번들은 판적봉환을 일단 영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바친 뒤 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는, 다시 말해 천황의 봉건으로 이해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왕토왕민 사상을 다이묘의 입을 통해 강조한 꼴이었다. 이즈음 널리 확산된 서양에 대한 지식 역시 부국강병을 위해선 중앙집권과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을 중시하는 군현제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번 내에서도 점차 출세에 목마른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점차 실권을 잡으며 군현제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고, 결국 18717월 폐번치현(廃藩置懸)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막말 정치사는 봉건에서 군현으로의 점진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막상 의회개설을 이 흐름에 어떻게 포함시킬지를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의회제란 군현보다는 봉건의 맥락에서 지지 또는 정당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령 의회개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19세기의 공의여론(公議與論) 사상은 공의기구 설치를 요구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각 번의 다이묘가 주체가 되는 열번회의(列藩會議)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브레인이었던 니시 아마네(西周)가 제안한 의회제 역시 각 번의 다이묘를 상원에, 각 번에서 선발한 번사 한 명씩을 하원에 배치하는 등 봉건제를 기초로 삼고 있었다.(p.434.)

 

  반면 군현제의 경우 긍정되었다 해도 중앙집권이나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이 이유였지, 의회제와 관련해서 논의된 사례는 적어도 이 책에선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박훈의 말마따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 원로에서부터 자유민권운동의 급진파에 이르기까지만인이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면(p.188.),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하처럼 의회개설은 중국화를 추진하며 겸사겸사 딸려온 서양화의 부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훈은 이를 중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 조선 등 다른 비서구 지역과 구분되는 일본만의 위대한 성취라고 여기는 만큼, 보다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일본에서 의회제는 군현제에 봉건의 뜻을 깃들게 하는 것(㝢封建之意於郡縣之中)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아니면 아예 군현제의 맥락에서 새롭게 긍정되었는가?

 

  사실 이 책에는 채 담아내지 못했지만, 박훈은 이미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다.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의회제가 명백히 봉건제의 영향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공론정치가 어떻게 근대 의회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는가를 러프하게나마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 헌법 초안을 연구하는 많은 모임이 여전히 주자학 텍스트를 공부하던 회독(會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언급으로 보아(p.62.), 근대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서도 연구를 시작한 듯하다.

 

  무엇보다 박훈은 결론에서 정밀한 실증을 통해 근대적공업과 전통적소농경영이 융합하는 양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경제학자 다니모토 마사유키(谷本雅之)를 언급하며, ‘또 다른 근대의 편린을 드러내고자 하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언제나 그의 글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던 한 사람의 독자로서, 결코 쉽지 않겠지만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앞으로의 연구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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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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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쇼군의 직계가 끊겼을 시 후계자를 낼 권한을 갖는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였던 미토번은 막말 초기 정국을 주도한 키 플레이어였다. 무엇보다 미토번은 예로부터 유학의 고장으로 유명했는데, 1682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찾은 김지남의 동사일록에도 미토번주(水戶宰)가 선비를 기르는데 힘쓴다는(捐俸養土) 기록이 등장할 정도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유학의 고장이라 해도 일본은 일본이었던지라, 18세기까지 미토번의 정치는 여타 번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돌아갔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번들보다 일본적이었다. 쇼군가의 방계라는 특성상, 미토번주는 격년으로 영지와 에도를 오가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의 적용을 받지 않고 아예 에도에 정주했다. 정부제(定府制)라 불리는 이러한 패널티로 인해 미토번주는 자신의 번에 대한 애착을 갖기 어려웠고, 에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제사나 로비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에도는 260여개에 달하는 번들의 대사관이 모여 있는, 오늘날의 브뤼셀과 비슷한 도시였다)

 

  번주의 부재는 자연히 가신단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막부가 미토번에 심은쓰케가로(附家老)인 나카야마가(中山家)와 야마노베가(山野邊家)일국(一國, 미토번)의 부침에도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될 만큼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했다. 그렇다고 가신단이 번 전체를 장악한 것은 또 아니었는데, 수많은 무라()로 이루어진 농촌은 나누시(名主, 촌장)의 지도아래 자체적으로 굴러갔기 때문이다. 향촌의 민정(民政)을 총괄하는 군봉행(郡奉行)이란 직책이 있긴 했으나, 그 힘은 제한적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미토번은 번주와 가신단, 백성 모두 저마다의 박스에 틀어박혀 따로 노는 콩가루 집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며, 미토번의 분위기는 조금씩 일변한다. 이를 추동한 건 일차적으로 간세이기(寬政期, 1789~1801)에서 분카기(文化期, 1804~1817)에 걸쳐 급증한 사숙(私塾)이었다. 일본판 서당이라 할 만한 이 사설학원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번이 세운 공식 교육기관인 번교()와는 달랐는데, 우선 회독(會讀)’이란 교육방식부터가 하나의 파격이었다.

 

  말 그대로 한데모여() 유교 경전을 한 구절씩 읽고() 해석하는 회독은, 텍스트의 맥락을 깡그리 무시하고 특정 구절을 끄집어내 곧바로 현실정치와 연결시킴으로써 젊은 사무라이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 마치 1980년대 한국 대학가의 이념서클처럼, 사숙 역시 세상에 불만 많은 젊은이들을 의식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당대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비판하며 주자학을 추종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실학의 무리(實學黨)’라고 자부했다는 사실이다. 주자학은 중세고 고문사학은 근대라는 오늘날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퍽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애초에 주자학이 고루한 훈고학을 대신할 실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외려 이쪽이 정상에 가깝다.

 

  이처럼 사숙에서의 회독을 통해 소시민에서 지사(志士)로 거듭난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속한 좁은 박스를 벗어나 보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박훈이 학적 네트워크라 이름붙인, 느슨하지만 그만큼 끈끈하고 광범한 연대가 종적(縱的)인 일본사회를 횡적(橫的)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비록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을지언정, ‘학적 네트워크속에서라면 엄격한 신분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학문을 논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하급 사무라이에 불과했던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미토번 가로(家老)의 적자 야마노베 요시미를 가르쳤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전통적인 신분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직적인 위계질서에서 수평적인 동지애로의 이러한 전환은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보다 너른 시야에서, 보다 거대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끔 북돋았다. 이에(), 그리고 무라()와 마치()를 넘어 번이라는 국가(國家),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라는 천하(天下)로까지 지평이 넓어진 것이다. 다이묘와 사무라이, 사무라이와 백성, 도시와 농촌, 사숙과 향교, 번과 번을 이으며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간 학적 네트워크가 국가와 천하의 대소사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아무리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형성되었다한들 최고지도자의 후원이 없다면 이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터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미토번에는 희대의 풍운아인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있었다.

 

  1829년 우여곡절 끝에 이복형인 도쿠가와 나리노부(德川齊彊)의 뒤를 이어 9대 미토번주가 된 나리아키는 당대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우선 그는 정부제의 관례를 깨고 재임 기간 15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53개월간 미토에 머무르는 취번(就藩)을 감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번주들이 에도의 화려함에 취해 정작 제 영지는 내버려두다시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는 앞으로 나리아키가 펼칠 정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무려 고귀한번주께서 하찮은영민(領民)들을 친히 찾아다니셨던 것이다! 이를 순행(巡行)이라 한다.

 

  물론 도쿠가와 시대의 쇼군이나 메이지 시대의 천황 역시 사람들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는 점에서, 나리아키의 순행은 그다지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군사지도자로서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임으로써(어위광, 御威光) 반란의 싹을 잘라내려 했던 쇼군이나 장엄한 의례를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자 했던 천황(이라기보다는 근대권력)과 달리, 나리아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교유(敎諭)를 통해 영민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예고 없이 영민의 집을 방문하는 깜짝 쇼를 즐겼으며, 군봉행을 통해 수시로 영민에게 휘호나 수서(手書)를 내려 격려의 뜻을 전했다. 단순히 영민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고충까지 하나하나 챙기고자 했다는 점에서, 나리아키의 행보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임한 조선의 정조와 닮아 있었다.

 

  ‘유교적 이상군주를 향한 나리아키의 열망은 미토번 중앙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번주에 취임한 직후 그는 의견이 있는 자는 어떤 역직에 있는 자라도 서슴지 말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봉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언로를 개방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오로지 자신의 직분에 관련된 일만, 그것도 직속상사를 거쳐 간신히 보고할 수 있던 그간의 관례를 생각했을 때 실로 놀라운 조치였다. 무능한 집정(執政)들을 몰아내고 바람직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미토번의 사화(士化)된 사무라이들은 주군의 선언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이내 이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를 잡게 된다.

 

  1831, 대표적인 개혁세력이었던 후지타파는 번의 요직인 오쿠유히쓰부(奧右筆府)에서 자파 인사들이 대거 잘리자 이를 상대 정파의 전면공격이라 판단, 적극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이른바 역체소동(役替騷動)’이라 불리는 인사파동의 시작이었다. 특기할만한 점은, 후지타파의 무기가 이 아닌 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집정의 손이 닿지 않는 에도통사(江戶通事)를 거쳐 번주 나리아키에게 직통으로 봉서를 올렸고, 직분의 벽을 뛰어넘어 후지타파로서의 횡적인 연대를 도모했다. 심지어 군봉행 가와세 교토쿠(川瀨敎德)의 경우 정론(正論)을 펼친다면 그간 일본에서 금기시된 도당(徒黨)을 결성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위험한인식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마치 조선에서나 볼 법한 맹렬한 키배, 나리아키 역시 일반적인 봉건영주로서 대응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봉서에 일일이 직서를 내리고 번사들의 수령확인이 늦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등, 친히 정치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이에 대한 번 중역들의 견제가 잇따르자 나리아키는 아예 비밀서한이라는 대담한 방법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비록 연명상서(連名上書)가 허용되지 않는 등 종래의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을지언정, 상서라는 미디어를 통한 자유로운 토의정치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련의 남상운동(南上運動, 미토의 서남쪽에 위치한 에도로 올라갔다하여 이런 이름이 붙음)을 거치며 미토번의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최고조에 이른다. 1829년 나리아키 대신 쇼군의 아들이자 시미즈가(淸水家)의 당주(當主)인 시미즈 쓰네노인(清水恒之允)을 옹립하려는 번 중역들의 음모에 맞선 분세이기(文政期)의 남상운동만 해도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소수(49)의 개혁파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러나 1844년 덴포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나리아키가 돌연 막부로부터 근신, 은거의 처벌을 받고 실각(갑진국난, 甲辰國難)한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고카기(弘化期)의 설원(雪冤) 남상운동은 이미 사무라이들만의 정치투쟁에서 한참 멀어져있었다. 농민, 상인은 물론이고 신관(神官)과 슈겐(修驗, 산중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일파)까지 참여하는 등, ‘()’이라 불릴만한 주체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다양한 배경의 영민들은 번 곳곳에 퍼진 사숙과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서로 의견을 개진하고 정보를 주고받았다. 본디 사무라이들만의 참여가 허용되었던 학적 네트워크가 일부 상층 영민까지 받아들이며 외연을 확장한 것이다. 박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 사화(士化)가 일어난 셈인데, 실제로 미토번의 군봉행들은 이들을 유지(有志)의 백성이라 일컬었다. 군봉행들이 그간 교화의 대상에 불과했던 영민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남상운동 이후 미토번의 사무라이()와 영민()이 곧잘 미토사민(水戶士民)’으로 엮여 불렸다는 점도 이들이 학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강한 일체감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844년의 설원 남상운동으로 절정에 오른 미토번의 사대부적 정치문화, 그러나 이내 자체적인 모순을 드러내며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미토사민의 노력으로 복권된 나리아키가 자신의 실각을 주도한 게 집정인 유키 도라쥬(結城寅壽)라고 판단하여 그가 이끌던 문벌파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반면 1831년의 역체소동 당시 문벌파를 맹렬히 비판했던 후지타파의 영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경우 외려 이 사건을 계기로 당파 간 대립의 자제를 촉구했지만, 한 번 돌아선 주군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탕평을 추구해야 마땅할 군주가 한 쪽 당파를 노골적으로 편듦에 따라 미토번의 당쟁은 점차 심각해졌고, 185510월의 대지진으로 도코가 사망하며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최후의 인물마저 잃고 말았다.

 

  급기야 18562월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당시 번주였던 도쿠가와 요시아쓰(徳川慶篤)는 번을 정론(正論)과 간물(奸物)로 구분하여 자신은 정론에 속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정론이란 후지타파가 급진화된 텐구당(天狗黨)이요, 간물이란 유키가 속한 문벌파였으니 번주가 당쟁의 한 쪽 당사자에 속함을 천명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같은 해 4월 미토번청은 적절한 절차 없이 명문가 출신의 유키를 처형하는 이례적인 조취를 취했고, 당파 간의 반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말았다. ‘유교화가 지나쳐 조선화된 결과였다.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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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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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 관련된 것 중 어디 안 그런 게 있겠느냐만, 한국인들에게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특히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에게 메이지유신이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터닝 포인트인 반면, 다른 누군가에겐 근대 이후 비서구 정치사에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보수적/반동적 근대화의 원류에 불과하다. 얼핏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시각은, 그러나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바로 메이지유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짧게는 1853년의 페리내항, 길게는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역을 튼 17세기 이후부터 일본으로 유입된 서구문물이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었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만일 페리가 에도만이 아닌 강화도로 들이닥쳤거나, 효종이 하멜을 통해 동인도회사와 접촉했더라면 조선 역시 근대화가 가능했으리라는 과감한 주장도 서슴지 않고 내놓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지만, 그만큼 서구중심적 역사관에 철저히 얽매여있다. 이들은 서구, 구체적으로는 영불미(英佛美) 3국의 역사로부터 이상적인 근대를 추출한 후 이를 잣대로 메이지유신이 얼마나 근대적(사실은 서구적)이었는가를 평가한다. 그에 따라 메이지유신은 서구화를 지향했으나 끝내 천황제 절대주의로 귀결된, ‘미완의 혁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한국의 한 원로 서양사학자는 아예 세계사적 맥락에서 메이지 일본과 유럽의 절대왕정을 동렬에 놓기도 했다. (물론 이는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전후 일본의 역사관을 충실히 답습한 것이다)

 

  막말기(幕末期) 일본사 연구자인 박훈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다. 메이지유신을 동경하든 비판하든 서구라는 색안경을 벗을 생각을 않기에 당시의 역동적인 흐름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진 그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수많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온 (그러나 별반 실속은 없었던) 말이다. 하지만 박훈의 문제의식은 공허한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학자 특유의 탄탄한 실증과 저널리스트 출신다운 탁월한 감각을 바탕으로 사대부적 정치문화라는,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전환기를 이해하는 설득력 있는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 경력을 적극 살려 긴 흐름을 꿰뚫는 그럴싸한 테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 이후 근세론을 주창한 교토학파의(근대초극론을 주도한 교토학파와는 다르다!)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떠올리게 하는 박훈의 새 책이 나왔다. 바로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와 언론사 칼럼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온 그가 단독저자로는 처음 쓴 학술서로, 도쿄대 박사논문 막말 미토번에서 '공론정치'의 형성과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들을 엮었다. 학술서인만큼 결코 쉬이 넘어가진 않지만, 평소 그의 글에서 여러 인사이트를 얻었던 독자라면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주로 메이지유신(1868)을 전후한 19세기 중반에 초점을 맞추지만, 우선은 그보다 앞선 에도시대(1603~1868)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저자의 말마따나 메이지유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너뜨리고자 했던 앙시앵 레짐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거니와, 이 시대 자체가 한국인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는 저자가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의 첫 장을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을 설명하는데 통째로 할애한 이유이기도 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명실상부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엇보다 바랐던 건 전국시대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종결이었다. 다이묘, 사무라이, 사찰, 심지어는 유럽의 상인과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만인이 만인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아수라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선 안 될 터였다.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엄격한 신분제로 재편하여 하극상을 원천봉쇄하되, 이에(, 혈연가족보다는 법인체의 성격이 강하다)’에게 대대로 세습되는 가업만큼은 확실히 보장해주어 사회 안정을 이루고자 했다.

 

  만인으로 하여금 야망을 버리고 소학행에 만족하게끔 강제한 막부의 정책은, 실로 성공적이었다. 17세기 초 1200만 명이었던 일본의 인구는 백 년 뒤 30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인구 100만의 에도, 3~40만의 오사카와 교토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 대도시가 들어섰다. 이를 바탕으로 융성한 대중문화는 당시 세계의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화려했으며, 또 가장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향유되었다. ‘일억 총중류를 자부하던 1980년대 버블경제기에 견주어도 꿇리지 않을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달성한 만인의 소확행은 결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화석연료 없이 30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유지하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인구가 늘어났다간 맬서스의 함정에 빨려 들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사람들 사이에선 마비키(間引)’라 불리는 영아살해나 가업을 이을 수 없는 차남 이하 자식들을 대도시의 일용직 노동자로 쫓아내는 자발적 인구조절이 횡행했다. 겉보기엔 안온하고 평화로운 에도시대의 이면에는 이토록 잔인한 살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정체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했던 게 바로 사무라이 계층이었다. 그나마 자발적 인구조절을 통한 긴축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백성(일본에서 백성은 어디까지나 농민만을 일컫는다)과 달리, 이들은 무조건 도시에 거주해야 했던 데다 체면 문제도 있었기에 씀씀이를 줄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자연히 빛은 늘어만 갔지만, 대대손손 할 일이 정해져 있었던지라 상업에 뛰어들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무라이 계층을 괴롭게 했던 건 이들이 그 존재의의를 의심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사실이었다. 본디 도쿠가와 막부는 병영국가의 성격이 강했고, 사무라이 역시 근본은 어디까지나 칼잡이였다. 그러나 200년 가까이 전쟁 없는 상태가 이어짐에 따라, ‘싸우는 자인 사무라이의 존재는 누가 봐도 아이러니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은 잡다한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도시의 테크노크라트(書吏)로 변신을 꾀하긴 했으나,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면 당연히 성에 찰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사무라이들을 다시 농촌으로 돌려보내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라도 확보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마저도 무위에 그쳤던 것이다.

 

  이처럼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무라이들의 눈에 들어온 게 다름 아닌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이었다. 본래 에도시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추종자를 불러 모았던 학문은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근대성의 맹아로 추켜세워진 소라이학이었다. 하지만 이내 소라이학은 도덕을 업신여기는 무뢰배의 학문이라는 이유로, 무엇보다 국가의 최고결정자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개돼지로 여긴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아카데미컬한 문헌학으로 전락했다.

 

  반면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도덕인 ()’를 근거로 누구든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천하의 중대사를 논할 수 있다는 주자의 가르침은 소라이학에 비해 훨씬 매력적이었다. 때문에 주자학은 당시의 발달한 목판인쇄술에 힘입어 소라이학을 밀어내고 국학(國學)과 더불어 일본의 지배적인 사상적 조류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박훈이 사대부적 정치문화라 이름붙인 것이 특히 하급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이를 에도 동북부에 위치한 미토번(水戶藩)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자.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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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국제정치사상
장인성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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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선 건담의 아버지로 유명한 애니메이터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 사실 선 굵은 대하역사만화를 여럿 그려낸 거장이기도 하다. 근대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단연 왕도의 개(王道), 청일전쟁기의 일본, , 조선을 넘나들며 공존공영의 이상사회를 꿈꾸는 가상의 인물 카노 슈스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19세기 동아시아 올스타전이라는 모 위키의 평가에 걸맞게, 작중 카노는 망명객 김옥균의 경호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도 하며, 손문과 혁명을 모의하고, 일본과 맞서는 전봉준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과 교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카노의 행보가 왕도(王道)’라는 유교적인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전봉준과 카노가 나눈 짧은 대화다.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믿느냐는 전봉준의 질문에, 카노는 그렇다고 답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왕도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보편도덕의 실현인 셈이다. 반면 왕도의 대척점에 서있는 패도(霸道)’란 권모술수와 무력행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행위다, 만화에선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열강으로 등극하려는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가 이러한 패도의 체현자로 등장한다.

 

  유럽의 혁명가보다는 동아시아의 사대부를 떠올리게 하는 카노와 전봉준의 모습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퍽 낯설게 느껴진다. 혹자는 카노 슈스케란 결국 가상의 인물이고, 작가 역시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며 이들에게서 유교의 파토스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서구와 일본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왕도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대부 겸 혁명가는 결코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다. 막말 일본에도 카노의 모델이 되었음직한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요코이 쇼난(横井小楠),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뛰어난 유학자였기 때문에오히려 국가평등관념이나 세계평화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장인성의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은 한국어 단행본으론 유일하게 쇼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다. 다만 저자의 관심은 유교적 근대의 현현으로 쇼군을 추켜세우는 게 아니라, 한 사상이 장소(topos)’에 따라 어떠한 변용을 보이는가에 있다. 따라서 저자는 쇼난의 카운터파트로 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조선의 운양(雲養) 김윤식(이하 운양)을 끌고 온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보여주기에는 그만한 인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활동시기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역할로 보나 쇼난의 짝궁은 박규수가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운양을 조선의 쇼난으로 포장하는 재일코리안 연구자 조경달에 대한 비판 또한 이 책의 목적이니 그러려니 한다.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쇼난과 운양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들이 선 장소(topos)’를 들여다봐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공간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장소야말로 사상가의 사유를 구속하는 의식의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단순한 정치사상 연구자가 아니라, 동주 이용희로부터 이어지는 서울대 외교학과의 전통 위에 서있는 국제정치사상 연구자임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쇼난과 운양이 자리한 일본과 조선이라는 장소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달랐다. 둘 다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언정) 나라의 빗장을 닫아거는 쇄국체제를 유지했지만, 일본은 너무나 풍족하기에 구태여 외부와 교역할 필요가 없다며, 조선은 너무나 가난하기에 외부와 교역할 여력이 없다며 서구의 통상요구를 거절했다. 자기규정 역시 달랐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덴노가 다스리는 위풍당당한 신국(神國)이었지만, 조선은 중국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국(東國)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는 두 나라의 정치질서였다. 조선은 관념국가라 불릴 정도로 주자학 일원주의를 고집했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내질서와 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전환의 시대인 19세기의 조선에서 갈등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만국공법과 동아시아의 조공-책봉체제를 두고 불거졌다. (물론, 동과 서의 국제질서가 충돌했다는 통념은 근래 많은 도전에 직면해있다. 두 국제질서를 연속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구로는 유바다의 박사논문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있다)

 

  반면 조선에서 국왕의 통치가 정당한지, 다른 방식의 정치질서는 없는지에 대한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엔 당연히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일로 이해되는 혁명(革命)조차, 당시 조선에서는 무능한 왕을 끌어내리고 새 왕을 세우는 반정(反正)의 의미로 쓰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헌미의 박사논문 반역의 정치학 : 대한제국기 혁명개념연구를 참조하라) 운양 역시 평생을 주자학자로 살았고, 만년에 의회(衆議之院)와 헌법을 긍정했을지언정 끝내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인정하진 않았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애초에 어디에 속하는 일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온 만큼 딱히 국제질서의 충돌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보다 중요한 충돌은 쇼군과 덴노라는 두 권위 사이에서 발생했다. 교토에 기거하는 신비로운 금리(禁裏)18세기 후반 이후 국학과 유학의 서포트에 힘입어 에도의 공의(公儀)에 도전했다. 이러한 권위의 충돌은 독서하는 사무라이, 혹은 칼을 찬 사대부로 하여금 주자학은 물론이요, 양명학과 국학, 심지어는 서구의 정치사상까지 끌어다 쓸 여지를 허용했다. 쇼난이 주자학과 양명학, 소라이학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사고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장소가 쇼난과 운양의 다름을 보기위한 도구라면, ‘맥락(context)’은 두 사람의 같음을 살피려는 도구다. 조선과 일본이 서구열강으로 상징되는 근대와 조우한 과정은, 비록 일정한 시차를 둘지언정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서구를 배척하는 쇄국’, 서구와 마주하는 응접’, 서구를 향해 문을 여는 개국으로 맥락을 구분하여 쇼난과 운양을 비교한다.

 

  먼저 쇄국의 공간에서 두 사상가가 보인 반응을 살펴보자. 쇼난은 켐페르(Engelbert Kaempfer)쇄국론을 읽고 남긴 독쇄국론이라는 독서노트에서, 태서(泰西, 서구)는 개통이 도이고, 일본은 폐쇄가 도라며 쇄국을 긍정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쇄국이란 어디까지나 안민(安民)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하며 일본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쇄국을 고집하는 국학자들과는 선을 그었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할 여지도 남겨놓았다.

 쇄국공간의 운양 역시 천주교를 배척하는 폐쇄적인 사고를 보였지만, 동시에 스승인 박규수처럼 천주교는 박멸이 아닌 교화의 대상이며, 정교(正敎)가 바로 서면 자연히 사교(邪敎)가 사라지리라는 여유로운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닫혔으되 여유가 있던 두 사람의 사유는, 그러나 서구열강과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응접의 공간이 열리며 이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쇼난의 경우 아무리 유교적 교양을 익혔던들 근본은 사무라이였던지라 에도 앞바다로 흑선을 몰고 온 미국의 페리제독에 분개하며 양이(攘夷)를 부르짖었다. 운양 또한 병인양요(1866)를 계기로 위원(魏源)해국도지에 근거해 잘 훈련된 정예병(精兵)과 정밀한 대포(精砲)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조선의 유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자세였다. 비록 쇼난은 적극적인 승출(乘出), 운양은 수동적인 근수(謹守)를 고집했으나 두 사람 모두 서구를 자국의 도()를 해치는 이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보편적이어야 마땅할 도를 특수화, 개별화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셈이다.

 

  물론 서구와의 교섭이 진행되며 이들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쇼난과 운양이 가졌던 적개심은 차차 누그러졌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구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고,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가령 18536월 러시아 사절 푸차친이 나가사키에 내항했을 때 쇼난이 사절응접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 이로응접대의(夷虜應接大意), 그간 마루야마 마사오 등에 의해 근대적 국제의식의 표명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쇼난이 도와 신의를 내세운 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설유하고 논파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이들을 동등한 도의 담지자로 인정해서가 아니었다고 냉정히 분석한다.

 

  러시아에 당당하게 논리로 맞선 쇼난과는 대조적으로, 미국과의 교섭에 임한 운양은 시종일관 순응적인 자세였다. 그 역시 쇼난과 마찬가지로 신()을 내세웠으나, 이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안전과 체면을 지키려는 약소국의 자구책이었다. 은밀히 개국을 권하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만국공법이 그리 공평무사하면 어찌 터키는 보전하고 류큐는 멸망시켰냐며 빈정댄 영의정 이유원처럼, 운양도 결코 만국공법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만국공법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조선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심정에서 그리 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구가 주도하는 세계체제에 편입된 개국의 공간에 이르러, 두 사람은 서구마저 도의 담지자로 포용하려는 열린 사유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쇼난은 미국을 오랑캐로 규정하던 과거의 입장을 뒤집어, 오히려 우매한 쪽은 일본이고 미국은 일본을 깨우쳐주려 했을 뿐이라고 반성한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고 선양함으로써 왕정을 종식시킨, 요순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물론 쇼난은 이내 약육강식이 횡행하며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판치는 세계의 모습에 깊이 실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할거견(割拠見)을 종식하고자 그가 꺼내든 건 또다시 유교였다. 쇼난은 일본이 천리에 따라 인의의 대도를 일으켜 세계의 후견국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게 주어진 길은 식민지 인도(印度)가 되거나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되는 것뿐, 다른 길은 없다.

 

  운양 또한 성()을 확충하여 멀리 있는 서양을 어루만지고 이들을 믿음으로 대한다면 패연(沛然)히 덕교(德敎)가 사해에 넘칠 것이며, 사해의 나라들이 반드시 서로 앞다투어 와서 제물을 바치고 유도의 나라임을 칭송하리라고 이야기했다. 문명국의 지식인다운 자부심이 느껴지지는 발언이지만, 운양이 이 말을 한 게 그가 정치적으로 실각한 1887년 뒤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못 묘한 기분이 든다. 풋내기 개화당의 쿠데타를 조기에 저지하고 고종에게 반성문을 요구할 정도로 노회한 관료였던 운양은, 야인이 되고서야 비로소 유교의 도를 긍정할 수 있었던 걸까. 도가 자연히 넘친다()’는 표현 또한 세계를 상대로 강한 승출(乘出)의 의지를 내보였던 쇼난에 비하면 적극성이 떨어진다.

 

  다른 장소, 같은 맥락에 놓인 두 사상가의 행보는 유교를 고정불변의 무언가로 생각하려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쇼난은 유학자였지만 특정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쇼난이 유교라는 무기를 큰 칼처럼 휘둘러 무도한 서구를 계도하려는 승출(乘出)의 자세를 보인 건 이처럼 그가 칼 찬 사대부혹은 독서하는 사무라이였기에 가능했다.

 

  반면 운양은 군사요충지인 강화의 유수(留守)를 역임하는 등 병학(兵學)에 밝았으나, 어디까지나 천생 주자학자였다. 그런 만큼 쇼난처럼 다른 학문으로 쉽게 갈아탈 수 없었고, 그저 묵묵히 근수(謹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청이 없으면 존립조차 위태로운 약소국 조선의 정치인이라는 페널티까지 더해졌기에, 운양의 운신 폭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훨씬 좁을 수밖에 없었다. 운양과 조선이 유달리 보수적이었다거나, 쇼난과 일본이 유달리 진보적인 게 아니었다. 그저 조선과 일본이라는 장소, 그곳에 서서 바라본 풍경이 달랐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아무리 장소의 차이가 존재했다 해도, 쪼다처럼 눈치나 보던 운양보다는 서구열강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일본이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쇼난이 훨씬 유교적이고 또 멋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왕년의 자유민권운동가로 평민주의를 주창했으나 훗날 군국주의자로 전향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쇼난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들으면 생각이 좀 달라지시려나. ‘왕도적 제국주의자’, 소호는 쇼난을 이리 불렀다. 부친이 쇼난 사숙(私塾, 서당)의 첫 입문자였고, 숙모가 쇼난의 후처였던 만큼 쇼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평가였다.

 

  물론 저자의 말마따나 이는 명백한 곡해(曲解)지만, 문제는 쇼난의 정치적 사유에 그러한 곡해를 허용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메이지 일본에서 많은 자유민권운동가는 중국과 조선을 도와줄것을 주장했고, 그 도움의 성격은 많은 경우 분명치 않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동아시아를 풍미한 아시아주의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을 뿐 아니라, 그 성격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혁명을 돕고자 고군분투하는 왕도의 개의 카노 슈스케와 극우 정치단체 현양사(玄洋社)의 거리는, 생각만큼 넓지 않다.

 

  오늘날 일부한국인들께선 자신들이 믿는 정의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를 주변에 적극적으로 퍼뜨려야 직성이 풀린다. 의도가 좋으면 결과 역시 좋으리란 명제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이들은 쇼난과 그를 곡해한 아시아주의자들의 후예다. 일부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건, 쇼난의 호연지기보다는 운양의 찌질함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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