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쇼군의 직계가 끊겼을 시 후계자를 낼 권한을 갖는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였던 미토번은 막말 초기 정국을 주도한 키 플레이어였다. 무엇보다 미토번은 예로부터 유학의 고장으로 유명했는데, 1682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찾은 김지남의 『동사일록』에도 미토번주(水戶宰)가 선비를 기르는데 힘쓴다는(捐俸養土) 기록이 등장할 정도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유학의 고장이라 해도 일본은 일본이었던지라, 18세기까지 미토번의 정치는 여타 번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돌아갔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번들보다 ‘일본적’이었다. 쇼군가의 방계라는 특성상, 미토번주는 격년으로 영지와 에도를 오가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의 적용을 받지 않고 아예 에도에 정주했다. 정부제(定府制)라 불리는 이러한 ‘패널티’로 인해 미토번주는 자신의 번에 대한 애착을 갖기 어려웠고, 에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제사나 로비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에도는 260여개에 달하는 번들의 ‘대사관’이 모여 있는, 오늘날의 브뤼셀과 비슷한 도시였다)
번주의 부재는 자연히 가신단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막부가 미토번에 ‘심은’ 쓰케가로(附家老)인 나카야마가(中山家)와 야마노베가(山野邊家)는 “일국(一國, 미토번)의 부침에도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될 만큼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했다. 그렇다고 가신단이 번 전체를 장악한 것은 또 아니었는데, 수많은 무라(村)로 이루어진 농촌은 나누시(名主, 촌장)의 지도아래 자체적으로 굴러갔기 때문이다. 향촌의 민정(民政)을 총괄하는 군봉행(郡奉行)이란 직책이 있긴 했으나, 그 힘은 제한적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미토번은 번주와 가신단, 백성 모두 저마다의 ‘박스’에 틀어박혀 따로 노는 ‘콩가루 집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며, 미토번의 분위기는 조금씩 일변한다. 이를 추동한 건 일차적으로 간세이기(寬政期, 1789~1801)에서 분카기(文化期, 1804~1817)에 걸쳐 급증한 사숙(私塾)이었다. 일본판 서당이라 할 만한 이 사설학원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번이 세운 공식 교육기관인 번교(藩校)와는 달랐는데, 우선 ‘회독(會讀)’이란 교육방식부터가 하나의 파격이었다.
말 그대로 한데모여(會) 유교 경전을 한 구절씩 읽고(讀) 해석하는 회독은, 텍스트의 맥락을 깡그리 무시하고 특정 구절을 끄집어내 곧바로 현실정치와 연결시킴으로써 젊은 사무라이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 마치 1980년대 한국 대학가의 이념서클처럼, 사숙 역시 세상에 불만 많은 젊은이들을 ‘의식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당대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비판하며 주자학을 추종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실학의 무리(實學黨)’라고 자부했다는 사실이다. 주자학은 ‘중세’고 고문사학은 ‘근대’라는 오늘날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퍽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애초에 주자학이 고루한 훈고학을 대신할 ‘실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외려 이쪽이 ‘정상’에 가깝다.
이처럼 사숙에서의 회독을 통해 소시민에서 지사(志士)로 거듭난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속한 좁은 ‘박스’를 벗어나 보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박훈이 ‘학적 네트워크’라 이름붙인, 느슨하지만 그만큼 끈끈하고 광범한 연대가 종적(縱的)인 일본사회를 횡적(橫的)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비록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을지언정, ‘학적 네트워크’ 속에서라면 엄격한 신분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학문을 논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하급 사무라이에 불과했던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미토번 가로(家老)의 적자 야마노베 요시미를 가르쳤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전통적인 신분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직적인 위계질서에서 수평적인 동지애로의 이러한 전환은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보다 너른 시야에서, 보다 거대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끔 북돋았다. 이에(家), 그리고 무라(村)와 마치(町)를 넘어 번이라는 국가(國家),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라는 천하(天下)로까지 지평이 넓어진 것이다. 다이묘와 사무라이, 사무라이와 백성, 도시와 농촌, 사숙과 향교, 번과 번을 이으며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간 ‘학적 네트워크’가 국가와 천하의 대소사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아무리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형성되었다한들 최고지도자의 후원이 없다면 이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터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미토번에는 희대의 풍운아인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있었다.
1829년 우여곡절 끝에 이복형인 도쿠가와 나리노부(德川齊彊)의 뒤를 이어 9대 미토번주가 된 나리아키는 당대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우선 그는 정부제의 관례를 깨고 재임 기간 15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5년 3개월간 미토에 머무르는 취번(就藩)을 감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번주들이 에도의 화려함에 취해 정작 제 영지는 내버려두다시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는 앞으로 나리아키가 펼칠 정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무려 ‘고귀한’ 번주께서 ‘하찮은’ 영민(領民)들을 친히 찾아다니셨던 것이다! 이를 순행(巡行)이라 한다.
물론 도쿠가와 시대의 쇼군이나 메이지 시대의 천황 역시 사람들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는 점에서, 나리아키의 순행은 그다지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군사지도자로서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임으로써(어위광, 御威光) 반란의 싹을 잘라내려 했던 쇼군이나 장엄한 의례를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자 했던 천황(이라기보다는 근대권력)과 달리, 나리아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교유(敎諭)를 통해 영민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예고 없이 영민의 집을 방문하는 ‘깜짝 쇼’를 즐겼으며, 군봉행을 통해 수시로 영민에게 휘호나 수서(手書)를 내려 격려의 뜻을 전했다. 단순히 영민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고충까지 하나하나 챙기고자 했다는 점에서, 나리아키의 행보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임한 조선의 정조와 닮아 있었다.
‘유교적 이상군주’를 향한 나리아키의 열망은 미토번 중앙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번주에 취임한 직후 그는 “의견이 있는 자는 어떤 역직에 있는 자라도 서슴지 말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봉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언로를 개방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오로지 자신의 직분에 관련된 일만, 그것도 직속상사를 거쳐 간신히 보고할 수 있던 그간의 관례를 생각했을 때 실로 놀라운 조치였다. 무능한 집정(執政)들을 몰아내고 바람직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미토번의 ‘사화(士化)된 사무라이’들은 주군의 선언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이내 이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를 잡게 된다.
1831년, 대표적인 개혁세력이었던 후지타파는 번의 요직인 오쿠유히쓰부(奧右筆府)에서 자파 인사들이 대거 잘리자 이를 상대 정파의 전면공격이라 판단, 적극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이른바 ‘역체소동(役替騷動)’이라 불리는 인사파동의 시작이었다. 특기할만한 점은, 후지타파의 무기가 ‘칼’이 아닌 ‘말’과 ‘글’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집정의 손이 닿지 않는 에도통사(江戶通事)를 거쳐 번주 나리아키에게 직통으로 봉서를 올렸고, 직분의 벽을 뛰어넘어 ‘후지타파’로서의 횡적인 연대를 도모했다. 심지어 군봉행 가와세 교토쿠(川瀨敎德)의 경우 정론(正論)을 펼친다면 그간 일본에서 금기시된 도당(徒黨)을 결성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위험한’ 인식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마치 조선에서나 볼 법한 맹렬한 ‘키배’에, 나리아키 역시 일반적인 ‘봉건영주’로서 대응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봉서에 일일이 직서를 내리고 번사들의 수령확인이 늦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등, 친히 정치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이에 대한 번 중역들의 견제가 잇따르자 나리아키는 아예 ‘비밀서한’이라는 대담한 방법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비록 연명상서(連名上書)가 허용되지 않는 등 종래의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을지언정, 상서라는 미디어를 통한 자유로운 ‘토의정치’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련의 남상운동(南上運動, 미토의 서남쪽에 위치한 에도로 ‘올라갔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음)을 거치며 미토번의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최고조에 이른다. 1829년 나리아키 대신 쇼군의 아들이자 시미즈가(淸水家)의 당주(當主)인 시미즈 쓰네노인(清水恒之允)을 옹립하려는 번 중역들의 음모에 맞선 분세이기(文政期)의 남상운동만 해도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소수(49명)의 개혁파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러나 1844년 덴포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나리아키가 돌연 막부로부터 근신, 은거의 처벌을 받고 실각(갑진국난, 甲辰國難)한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고카기(弘化期)의 설원(雪冤) 남상운동은 이미 사무라이들만의 정치투쟁에서 한참 멀어져있었다. 농민, 상인은 물론이고 신관(神官)과 슈겐(修驗, 산중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일파)까지 참여하는 등, ‘민(民)’이라 불릴만한 주체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다양한 배경의 영민들은 번 곳곳에 퍼진 사숙과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서로 의견을 개진하고 정보를 주고받았다. 본디 사무라이들만의 참여가 허용되었던 ‘학적 네트워크’가 일부 상층 영민까지 받아들이며 외연을 확장한 것이다. 박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民)의 사화(士化)가 일어난 셈인데, 실제로 미토번의 군봉행들은 이들을 “유지(有志)의 백성”이라 일컬었다. 군봉행들이 그간 교화의 대상에 불과했던 영민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남상운동 이후 미토번의 사무라이(士)와 영민(民)이 곧잘 ‘미토사민(水戶士民)’으로 엮여 불렸다는 점도 이들이 ‘학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강한 일체감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844년의 설원 남상운동으로 절정에 오른 미토번의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그러나 이내 자체적인 모순을 드러내며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미토사민의 노력으로 복권된 나리아키가 자신의 실각을 주도한 게 집정인 유키 도라쥬(結城寅壽)라고 판단하여 그가 이끌던 문벌파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반면 1831년의 역체소동 당시 문벌파를 맹렬히 비판했던 후지타파의 영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경우 외려 이 사건을 계기로 당파 간 대립의 자제를 촉구했지만, 한 번 돌아선 주군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탕평’을 추구해야 마땅할 군주가 한 쪽 당파를 노골적으로 편듦에 따라 미토번의 당쟁은 점차 심각해졌고, 1855년 10월의 대지진으로 도코가 사망하며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최후의 인물마저 잃고 말았다.
급기야 1856년 2월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당시 번주였던 도쿠가와 요시아쓰(徳川慶篤)는 번을 정론(正論)과 간물(奸物)로 구분하여 자신은 정론에 속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정론이란 후지타파가 급진화된 텐구당(天狗黨)이요, 간물이란 유키가 속한 문벌파였으니 번주가 당쟁의 한 쪽 당사자에 속함을 천명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같은 해 4월 미토번청은 적절한 절차 없이 명문가 출신의 유키를 처형하는 이례적인 조취를 취했고, 당파 간의 반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말았다. ‘유교화’가 지나쳐 ‘조선화’된 결과였다.
(下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