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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국제정치사상
장인성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한국에선 건담의 아버지로 유명한 애니메이터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는, 사실 선 굵은 대하역사만화를 여럿 그려낸 거장이기도 하다. 근대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단연 『왕도의 개(王道の狗)』로, 청일전쟁기의 일본, 청, 조선을 넘나들며 공존공영의 이상사회를 꿈꾸는 가상의 인물 카노 슈스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19세기 동아시아 올스타전’이라는 모 위키의 평가에 걸맞게, 작중 카노는 망명객 김옥균의 경호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도 하며, 손문과 혁명을 모의하고, 일본과 맞서는 전봉준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과 교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카노의 행보가 ‘왕도(王道)’라는 유교적인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전봉준과 카노가 나눈 짧은 대화다.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믿느냐는 전봉준의 질문에, 카노는 그렇다고 답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왕도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보편도덕의 실현인 셈이다. 반면 왕도의 대척점에 서있는 패도(霸道)’란 권모술수와 무력행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행위다, 만화에선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열강으로 등극하려는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가 이러한 패도의 체현자로 등장한다.
유럽의 혁명가보다는 동아시아의 사대부를 떠올리게 하는 카노와 전봉준의 모습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퍽 낯설게 느껴진다. 혹자는 카노 슈스케란 결국 가상의 인물이고, 작가 역시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며 이들에게서 유교의 파토스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서구와 일본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왕도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대부 겸 혁명가는 결코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다. 막말 일본에도 카노의 모델이 되었음직한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요코이 쇼난(横井小楠),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뛰어난 유학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평등관념이나 세계평화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장인성의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은 한국어 단행본으론 유일하게 쇼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다. 다만 저자의 관심은 ‘유교적 근대’의 현현으로 쇼군을 추켜세우는 게 아니라, 한 사상이 ‘장소(topos)’에 따라 어떠한 변용을 보이는가에 있다. 따라서 저자는 쇼난의 카운터파트로 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조선의 운양(雲養) 김윤식(이하 운양)을 끌고 온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보여주기에는 그만한 인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활동시기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역할로 보나 쇼난의 짝궁은 박규수가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운양을 ‘조선의 쇼난’으로 포장하는 재일코리안 연구자 조경달에 대한 비판 또한 이 책의 목적이니 그러려니 한다.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쇼난과 운양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들이 선 ‘장소(topos)’를 들여다봐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공간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장소야말로 사상가의 사유를 구속하는 ‘의식의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단순한 정치사상 연구자가 아니라, 동주 이용희로부터 이어지는 서울대 외교학과의 전통 위에 서있는 ‘국제’정치사상 연구자임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쇼난과 운양이 자리한 일본과 조선이라는 장소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달랐다. 둘 다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언정) 나라의 빗장을 닫아거는 쇄국체제를 유지했지만, 일본은 너무나 풍족하기에 구태여 외부와 교역할 필요가 없다며, 조선은 너무나 가난하기에 외부와 교역할 여력이 없다며 서구의 통상요구를 거절했다. 자기규정 역시 달랐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덴노가 다스리는 위풍당당한 신국(神國)이었지만, 조선은 중국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국(東國)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는 두 나라의 정치질서였다. 조선은 ‘관념국가’라 불릴 정도로 주자학 일원주의를 고집했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내질서와 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전환의 시대인 19세기의 조선에서 갈등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만국공법과 동아시아의 조공-책봉체제를 두고 불거졌다. (물론, 동과 서의 국제질서가 ‘충돌’했다는 통념은 근래 많은 도전에 직면해있다. 두 국제질서를 ‘연속’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구로는 유바다의 박사논문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있다)
반면 조선에서 국왕의 통치가 정당한지, 다른 방식의 정치질서는 없는지에 대한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엔 당연히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일로 이해되는 혁명(革命)조차, 당시 조선에서는 무능한 왕을 끌어내리고 새 왕을 세우는 반정(反正)의 의미로 쓰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헌미의 박사논문 『반역의 정치학 : 대한제국기 혁명개념연구』를 참조하라) 운양 역시 평생을 주자학자로 살았고, 만년에 의회(衆議之院)와 헌법을 긍정했을지언정 끝내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인정하진 않았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애초에 어디에 속하는 일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온 만큼 딱히 국제질서의 충돌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보다 중요한 충돌은 쇼군과 덴노라는 두 권위 사이에서 발생했다. 교토에 기거하는 신비로운 금리(禁裏)는 18세기 후반 이후 국학과 유학의 서포트에 힘입어 에도의 공의(公儀)에 도전했다. 이러한 권위의 충돌은 독서하는 사무라이, 혹은 칼을 찬 사대부로 하여금 주자학은 물론이요, 양명학과 국학, 심지어는 서구의 정치사상까지 끌어다 쓸 여지를 허용했다. 쇼난이 주자학과 양명학, 소라이학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사고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장소’가 쇼난과 운양의 ‘다름’을 보기위한 도구라면, ‘맥락(context)’은 두 사람의 ‘같음’을 살피려는 도구다. 조선과 일본이 서구열강으로 상징되는 ‘근대’와 조우한 과정은, 비록 일정한 시차를 둘지언정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서구를 배척하는 ‘쇄국’, 서구와 마주하는 ‘응접’, 서구를 향해 문을 여는 ‘개국’으로 맥락을 구분하여 쇼난과 운양을 비교한다.
먼저 ‘쇄국’의 공간에서 두 사상가가 보인 반응을 살펴보자. 쇼난은 켐페르(Engelbert Kaempfer)의 『쇄국론』을 읽고 남긴 「독쇄국론」이라는 독서노트에서, 태서(泰西, 서구)는 개통이 도이고, 일본은 폐쇄가 도라며 쇄국을 긍정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쇄국이란 어디까지나 안민(安民)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하며 일본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쇄국을 고집하는 국학자들과는 선을 그었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할 여지도 남겨놓았다.
쇄국공간의 운양 역시 천주교를 배척하는 폐쇄적인 사고를 보였지만, 동시에 스승인 박규수처럼 천주교는 박멸이 아닌 교화의 대상이며, 정교(正敎)가 바로 서면 자연히 사교(邪敎)가 사라지리라는 여유로운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닫혔으되 여유가 있던 두 사람의 사유는, 그러나 서구열강과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응접’의 공간이 열리며 이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쇼난의 경우 아무리 유교적 교양을 익혔던들 근본은 사무라이였던지라 에도 앞바다로 흑선을 몰고 온 미국의 페리제독에 분개하며 양이(攘夷)를 부르짖었다. 운양 또한 병인양요(1866)를 계기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에 근거해 잘 훈련된 정예병(精兵)과 정밀한 대포(精砲)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조선의 유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자세였다. 비록 쇼난은 적극적인 승출(乘出)을, 운양은 수동적인 근수(謹守)를 고집했으나 두 사람 모두 서구를 자국의 도(道)를 해치는 이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보편적이어야 마땅할 도를 특수화, 개별화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셈이다.
물론 서구와의 교섭이 진행되며 이들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쇼난과 운양이 가졌던 적개심은 차차 누그러졌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구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고,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가령 1853년 6월 러시아 사절 푸차친이 나가사키에 내항했을 때 쇼난이 사절응접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 『이로응접대의(夷虜應接大意)』는, 그간 마루야마 마사오 등에 의해 ‘근대적 국제의식’의 표명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쇼난이 도와 신의를 내세운 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설유하고 논파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이들을 동등한 도의 담지자로 인정해서가 아니었다고 냉정히 분석한다.
러시아에 당당하게 논리로 맞선 쇼난과는 대조적으로, 미국과의 교섭에 임한 운양은 시종일관 순응적인 자세였다. 그 역시 쇼난과 마찬가지로 신(信)을 내세웠으나, 이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안전과 체면을 지키려는 약소국의 자구책이었다. 은밀히 개국을 권하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만국공법이 그리 공평무사하면 어찌 터키는 보전하고 류큐는 멸망시켰냐며 빈정댄 영의정 이유원처럼, 운양도 결코 만국공법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만국공법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조선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심정에서 그리 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구가 주도하는 세계체제에 편입된 ‘개국’의 공간에 이르러, 두 사람은 서구마저 도의 담지자로 포용하려는 열린 사유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쇼난은 미국을 오랑캐로 규정하던 과거의 입장을 뒤집어, 오히려 우매한 쪽은 일본이고 미국은 일본을 깨우쳐주려 했을 뿐이라고 반성한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고 선양함으로써 왕정을 종식시킨, 요순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물론 쇼난은 이내 약육강식이 횡행하며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판치는 세계의 모습에 깊이 실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할거견(割拠見)을 종식하고자 그가 꺼내든 건 또다시 유교였다. 쇼난은 일본이 천리에 따라 인의의 대도를 일으켜 세계의 후견국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게 주어진 길은 식민지 인도(印度)가 되거나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되는 것뿐, 다른 길은 없다.
운양 또한 성(誠)을 확충하여 멀리 있는 서양을 어루만지고 이들을 믿음으로 대한다면 패연(沛然)히 덕교(德敎)가 사해에 넘칠 것이며, 사해의 나라들이 반드시 서로 앞다투어 와서 제물을 바치고 유도의 나라임을 칭송하리라고 이야기했다. 문명국의 지식인다운 자부심이 느껴지지는 발언이지만, 운양이 이 말을 한 게 그가 정치적으로 실각한 1887년 뒤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못 묘한 기분이 든다. 풋내기 개화당의 쿠데타를 조기에 저지하고 고종에게 반성문을 요구할 정도로 노회한 관료였던 운양은, 야인이 되고서야 비로소 유교의 도를 긍정할 수 있었던 걸까. 도가 자연히 ‘넘친다(湓)’는 표현 또한 세계를 상대로 강한 승출(乘出)의 의지를 내보였던 쇼난에 비하면 적극성이 떨어진다.
다른 장소, 같은 맥락에 놓인 두 사상가의 행보는 ‘유교’를 고정불변의 무언가로 생각하려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쇼난은 유학자였지만 특정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쇼난이 유교라는 무기를 큰 칼처럼 휘둘러 무도한 서구를 ‘계도’하려는 승출(乘出)의 자세를 보인 건 이처럼 그가 ‘칼 찬 사대부’ 혹은 ‘독서하는 사무라이’였기에 가능했다.
반면 운양은 군사요충지인 강화의 유수(留守)를 역임하는 등 병학(兵學)에 밝았으나, 어디까지나 천생 주자학자였다. 그런 만큼 쇼난처럼 다른 학문으로 쉽게 갈아탈 수 없었고, 그저 묵묵히 근수(謹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청이 없으면 존립조차 위태로운 약소국 조선의 정치인이라는 ‘페널티’까지 더해졌기에, 운양의 운신 폭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훨씬 좁을 수밖에 없었다. 운양과 조선이 유달리 보수적이었다거나, 쇼난과 일본이 유달리 진보적인 게 아니었다. 그저 조선과 일본이라는 장소, 그곳에 서서 바라본 풍경이 달랐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아무리 장소의 차이가 존재했다 해도, 쪼다처럼 눈치나 보던 운양보다는 서구열강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일본이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쇼난이 훨씬 ‘유교적’이고 또 멋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왕년의 자유민권운동가로 평민주의를 주창했으나 훗날 군국주의자로 전향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쇼난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들으면 생각이 좀 달라지시려나. ‘왕도적 제국주의자’, 소호는 쇼난을 이리 불렀다. 부친이 쇼난 사숙(私塾, 서당)의 첫 입문자였고, 숙모가 쇼난의 후처였던 만큼 쇼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평가였다.
물론 저자의 말마따나 이는 명백한 곡해(曲解)지만, 문제는 쇼난의 정치적 사유에 그러한 곡해를 허용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메이지 일본에서 많은 자유민권운동가는 중국과 조선을 ‘도와줄’ 것을 주장했고, 그 도움의 성격은 많은 경우 분명치 않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동아시아를 풍미한 ‘아시아주의’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을 뿐 아니라, 그 성격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혁명을 돕고자 고군분투하는 『왕도의 개』의 카노 슈스케와 극우 정치단체 현양사(玄洋社)의 거리는, 생각만큼 넓지 않다.
오늘날 ‘일부’ 한국인들께선 자신들이 믿는 ‘정의’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를 주변에 적극적으로 퍼뜨려야 직성이 풀린다. 의도가 좋으면 결과 역시 좋으리란 명제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이들은 쇼난과 그를 곡해한 아시아주의자들의 후예다. 이 ‘일부’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건, 쇼난의 호연지기보다는 운양의 찌질함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