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사회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0
심너울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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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F의 최대 매력은 사고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가정에서 시작해, 끝에는 정교하고 그럴싸한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독자에게 지적 쾌감을 안겨주고 상상력을 넓히는 일이야말로 SF소명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소멸사회는 내겐 실패한 사고실험으로 남을 듯하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도래한 암울한 205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가정은 허술하고 인물들은 도무지 그 시대 사람들 같지가 않다. 차라리 2010년대의 청년들이라 했다면 보다 그럴싸했을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인구가 줄어 소멸을 향해가는 마당에 청년들이 뭐 하러 한강에 배를 띄워 사는가? 그냥 무수히 널려있을 빈 집을 점거해 살면 되지.

애초에 200여 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담아내기엔 너무 무겁고, 커다란 주제였다. 올해 나온 대멸종에 실린 단편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를 재밌게 읽었던지라 퍽 기대하는 작가였는데, 이 책은 굉장히 실망스럽다. 곽재식 작가가 이야기한, 너무 별로라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하고 이야기 고치는 연습을 해볼 수 있는 바로 그 정도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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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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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는 이우학교가 망한 건 공동체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구태여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열아홉 살 때 처음 듣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석을 달고 있을 만큼 소중히 여기는 말인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도 이 금언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책의 주인공 김하나와 황선우는 잘 나가는 고급 지식노동자다.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능력 역시 뛰어나다. 요컨대, 이 둘은 굳이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도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런 둘이 함께 살게 된다고 해서 이우학교처럼 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없어질 뿐.

책을 읽는 내내 참 부럽고 행복한 삶이다 싶으면서도, 나의 부러움이 김하나와 황선우가 함께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님 그냥 두 사람의 쩌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헷갈렸다. 역시 함께 살아가는 일의 아름다움(그리고 비루함)은 절박함에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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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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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책인데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저자 고경태는 <한겨레 21><한겨레> 토요판(별도의 주말섹션이 아닌, 주간판과 구분되는 토요판으로는 한국 언론 최초라고 한다)을 성공시킨 베테랑 편집자다. 파격적인 기획을 대담하게 밀어붙이고, 이를 성공시키기까지 한 저자의 편집인생이 기자 특유의 간결한 문체에 힘입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기획이 하나같이 그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끌어들임으로써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겨레> 토요판 1면은 전날 일어난 최신의 사건을 보도하는 통상적인 신문과는 달리 편집장이 중요하다 판단한 주제 하나를 대문짝하게 실었다. 전형적인 주간지의 기법으로, <한겨레 21>에서 오래 일한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초창기 <한겨레 21>을 스타덤에 올린 김규항과 김어준의 쾌도난담 역시 술자리에서 오고갈 법한 대화를 그대로 주간지에 실은 것인데, 굳이 따지자면 활자화된 팟캐스트라 할 수 있다.

매체 A에 다른 매체 B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파격을 꾀한다. 퍽 일관적이라 할 수 있는 저자의 파격, 이 책이 증명하듯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신문이 신문 아닌 것을 끌어들여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면, 굳이 신문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활자화된 팟캐스트를 읽느니 그냥 팟캐스트를 듣는 게 낫지 않나? 성격이 전혀 다른 매체를 슬금슬금 끌어들이다보면, 결국 신문과 잡지 고유의 성격까지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활자의 종언을 더 이상 호사가의 공담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 지금, 신문과 잡지 고유의 방식으로 혁신을 꾀할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저자의 이야기가 주로 아이템 개발이나 외부 필진과의 에피소드에 치중된 점은 아쉽다. 편집이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가이드라인은 편집장이 정할지언정 결국 그 속을 채우는 건 기자들이다. 자신의 구상을 팀원들에게 설득하고, 때로는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화려한 편집장 역사에는 명민하고, 오만하며, 고집 센 기자들과 실랑이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하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라 일부러 뺀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저자가 실랑이를 벌일 여지 자체를 주지 않았던 걸까. 책을 읽다보면 어쩐지 후자일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PART 5 내가 만난 편집장에 등장하는 편집장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캐릭터가 겹친다. 좋게 말해 추진력 있고, 나쁘게 말해 오만하고 독선적이다. 편집장의 역할은 조율보다는 지휘인 걸까. 저자의 다른 책인 유혹하는 에디터를 읽으면 편집장의 또 다른 모습을 접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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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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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계 스웨덴인인 저널리스트의 논픽션. 마치 세계를 훑을 것만 같은 제목과는 달리, 책에서 다루는 현재란 어디까지나 서구세계의 오늘에 불과하다. 물론 이슬람세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긴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로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외에는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의 분단이 곁다리로 등장하는 정도.

19471월에서 12월까지, ‘세계각지의 국가와 도시를 훑으며 현재를 만든 중요한 사건들을 훑는 저자의 시야에 서울과 평양, 도쿄와 베이징, 하노이와 자카르타는 들어와 있지 않다. 과연 병들어 죽어가는 조지 오웰이나 미국인 작가와 사랑에 빠진 시몬 드 보부아르, 새로운 패션을 창조한 크리스티앙 디오르보다 이들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이 덜 중요한가 싶지만, 비서구를 일종의 악세사리로 다루느니 깔끔하게 들어내기로 한 저자의 판단은 퍽 현명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꿀꿀함은 남는다. 어째서 서구, 구체적으로는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문제만을 천착한 이 책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 현재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나올 수 있었을까. 만일 배경이 동아시아였고, 사건이 한반도의 분단이었다면 저토록 당당하게 현재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서구는 자신을 구태여 보편이라 천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반면 비서구는 자기네 특수성을 이야기할 때조차도 서구를 의식해야만 한다. 차크라바티의 말마따나, 유럽의 지방화가 절실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스웨덴어로 쓴 글의 영어 번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중역본임에도, 문장은 유려하고 우아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동아시아나 한반도의 현재를 만든 인물과 사건들을 엮어 이런 책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너무나 자연스레 서구 명저동아시아/한국판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역시 비서구는 결코 서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사족이지만, 유대인 문제에 올인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전후 나치의 재편을 도모한 스웨덴인 페르 엥달이라는 점은 퍽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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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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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기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인물평전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아렌트는 20세기 전반을 어두운 시대로 정의한다. 공적인 삶을 상징하는 밝음의 대척점에 있는 어둠은, 모두가 사적인 것에 매몰된 상황에 대한 은유다. 역자 홍원표에 따르면 아렌트에게 어둠이란 가치판단이 배제된 중립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공적인 삶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고대 그리스로부터 지대한 영감을 받은 아렌트가 과연 어둠에 대해 일말의 부정적인 평가도 남기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특히나 그가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를 마주했고, 전후에는 뉴요커기자로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아렌트가 집중한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사람이 백만 명 단위로 죽어나가던 시대에 사람이라니, 지나치게 한가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렌트가 조명한 사람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온 세상이 사적인 것에 얼굴을 박고 있던 때, 이들은 용감하게 공적인 것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가톨릭의 개혁을 추구한 보수적인 리버럴 발데마르 구리안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좌파 시인 그룹을 이끌었던 위스턴 휴 오든까지, 사상도 행적도 가지각색인 아렌트의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내용에 역자의 섬세하지 못한 번역까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어가는 과정은 고난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쓴 약을 먹어가듯 두꺼운 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며, 어둠으로 가득 찬 20세기를 비추었던 등불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이 위로받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전반 유럽의 이야기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며, 난 엉뚱하게도 20세기 후반 한국을 떠올렸다. 최인훈이 광장에서 이명훈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듯, 허울뿐인 민주공화국의 간판을 내건 신생국 대한민국 역시 광장()은 없고 밀실()만 빼곡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전반의 유럽과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의 한국에도 밀실을 젖히고 나와 기꺼이 광장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학인 최인훈과 김수영, 종교인 함석헌과 문익환, 정치인 장준하와 김대중, 언론인 한창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의 어두운 시대를 밝혀간 이들의 역사 역시, 누군가가 써주었으면 싶었던 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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