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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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조선에서나 볼법한 극렬한 당쟁의 여파로, 미토번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힘 한 번 못쓰고 폭삭 망해버렸다. 하지만 미토번은 망해도 망한 게 아니었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 뱃속의 새끼들은 결국 뱀의 몸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는 80년대 운동권의 프로파간다처럼 미토번의 정신적 후예들이 천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막말 유신지사들의 이념적 나침반이었던 후기미토학부터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토번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기미토학의 이데올로그였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와 그 제자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유명세는 80년대 대한민국의 김영환이나 이진경(박태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실제로 그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 각지의 수많은 지사들은 흠모하는 선생님밑에서 배우고자 국경(당시 일본에선 번이 곧 나라였으므로)을 넘어 미토번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모교와의 연계를 이어갔다. 그저 밖으로부터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했던 게 아니다. 미토번의 사무라이들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번을 떠나 천하를 유랑하며 깽판도 많이 쳤지만, 그 과정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다른 번에 전파하기도 했다. 여러 모로 튀었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행보 또한 유교적 이상군주로서의 천황을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주자학의 극단적인 일본적 변형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미토학, 그리고 이를 매개로 형성된 사대부적 정치문화야말로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게 박훈의 설명이다.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그의 책에서 마땅한 비판거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꼼꼼한 실증이 뒷받침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가 몇 겹의 가정과 제약으로 자신의 주장이 확대해석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가 거대서사혹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경우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일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긴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역사학이 외려 다른 분과보다 거대서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퍽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지난 2018년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가 유교의 공론정치와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를 연결짓자 평안도 악센트가 인상적이었던 한 원로학자가 포퓰리즘을 옹호하다니,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비판하던 모습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이러한 신중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박훈이 예상되는 거의 모든 비판을 선제적으로 반론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막아버린다고 느껴져서다.

 

  가령 박훈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유교적 근대론과 선을 그으며 자신은 유교에서 근대적인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에는 부정적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입장은 유교가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를 도입하는 촉매 역할을 한 뒤 자살했다고 여기는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에 가깝다. 그간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비롯해 그가 쓴 논문과 칼럼 등을 읽으며 유교는 그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어왔는데, 이 책에서 아예 와타나베의 입을 빌려 그렇다고 못을 박은 셈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시대의 맥락(context)’과 이용하는 주체의 성격, 그리고 이용 수준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질 때만 겨우 가능할 뿐이다.(p.51.)

 

  하지만 유교가 기껏해야 촉매 혹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 중요성을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유교를 촉매로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맥락과 주체의 성격, 그리고 역량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박훈이 교양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자주 인용하는 요나하 준(與那覇潤)중국화하는 일본을 통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국화하는 일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s://brunch.co.kr/@msg2012/12 참고)

 

  요나하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건 중국화’(‘유교화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를 감행하며 겸사겸사 서양화도 패키지로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중국은 송나라, 한국은 조선왕조 때 이미 중국화를 달성해버렸기에 구태여 서양화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게 요나하의 설명이다. ‘중국화를 보편이자 필연으로 여기는 요나하로서는 일본이 그만큼 시대의 흐름에 뒤쳐졌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일본은 그때까지 중국과 전혀 다른 사회였기 때문에 중국화를 매개로 서양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나하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일본(에도시대)으로 따로 분류될 만큼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핵심은 먹고사니즘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오사카의 거대 사찰인 이시야마 혼간지(右山本願寺)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일본의 지배세력은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 안전·생계보장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보장받았다. 다시 말해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권위를 흔들지 않는 이상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칼을 쥔 건 자신들이니 말이다. (에도시대의 인쇄혁명역시 역설적으로 말과 글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 점에서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정치의 발견자라며 추켜세웠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그저 이를 사후추인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https://brunch.co.kr/@msg2012/8)

 

  실제로 유교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19세기 중반에도 막부는 서양에 열린 자세를 유지했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문물을 적극 흡수했다.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42년부터 1857년까지 서양화 정책을 진두지휘했고, 그가 발탁한 인재들은 서양에 대한 이해도로나 실무능력으로나 당시 일본에선 따를 자가 없었다. 권력의 원천이 종교나 사상이 아닌 무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18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막부 내 강경파 인사들 사이에서 쇼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능력본위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훗날의 메이지 신정부를 연상케 하는 주장이 등장하기까지 한다.(p.433.)

 

  이처럼 무인사회라는 특성상 막부를 비롯한 일본사회 전반이 서양의 새로운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열려 있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유교 없는 메이지유신은 불가능했을지언정, 메이지유신 없는 근대화(서구화)’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막말로 막부의 내부총질러인 미토번이 조금만 더 고분고분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조금만 더 일찍 쇼군에 등극했더라면 앞서 이야기한 막부 강경파의 꿈이 실현되었을 수도 있다.

 

  정리해보자. 유교는 분명 메이지유신에 일정한 역할을 했으나, 이를 완수한 뒤 자살했다. 그리고 어쩌면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근대와 별반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교는 근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양자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를 돌파할 방법은 이전까지 수많은 연구자가 그러했듯 무턱대고 유교에서 근대의 맹아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 성실하고 치밀하게 추적해가는 것이리라.

 

  저자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의 근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봉건·군현론이라는 유력한 테제를 제시했음에도 정작 이 맥락에서 일본의 의회개설을 사유하지 못한 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사학계의 거인인 민두기와 중국화하는 일본으로 일본사회를 뒤흔든 요나하 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봉건·군현론, 근대전환기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이 틀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강한 설명력을 갖는다. 문제는, 정작 저자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는 의회개설은 봉건·군현론을 통해 설명하지 못하고(혹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자국의 봉건제를 고대의 이상에 부합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겼다. 반면 군현제는 각 번의 자율성을 찍어 누르려는 막부 강경파의 획책, 그러니까 비난받아 마땅한 패도(覇道)’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메이지유신 역시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초창기엔 막부의 봉건에서 천황의 봉건으로 이행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막상 왕정복고 이후에는 군현제 긍정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는데, 그 시작은 18691월의 판적봉환(版籍奉還)이었다. 당시 유신을 주도한 주요 번들은 판적봉환을 일단 영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바친 뒤 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는, 다시 말해 천황의 봉건으로 이해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왕토왕민 사상을 다이묘의 입을 통해 강조한 꼴이었다. 이즈음 널리 확산된 서양에 대한 지식 역시 부국강병을 위해선 중앙집권과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을 중시하는 군현제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번 내에서도 점차 출세에 목마른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점차 실권을 잡으며 군현제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고, 결국 18717월 폐번치현(廃藩置懸)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막말 정치사는 봉건에서 군현으로의 점진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막상 의회개설을 이 흐름에 어떻게 포함시킬지를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의회제란 군현보다는 봉건의 맥락에서 지지 또는 정당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령 의회개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19세기의 공의여론(公議與論) 사상은 공의기구 설치를 요구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각 번의 다이묘가 주체가 되는 열번회의(列藩會議)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브레인이었던 니시 아마네(西周)가 제안한 의회제 역시 각 번의 다이묘를 상원에, 각 번에서 선발한 번사 한 명씩을 하원에 배치하는 등 봉건제를 기초로 삼고 있었다.(p.434.)

 

  반면 군현제의 경우 긍정되었다 해도 중앙집권이나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이 이유였지, 의회제와 관련해서 논의된 사례는 적어도 이 책에선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박훈의 말마따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 원로에서부터 자유민권운동의 급진파에 이르기까지만인이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면(p.188.),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하처럼 의회개설은 중국화를 추진하며 겸사겸사 딸려온 서양화의 부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훈은 이를 중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 조선 등 다른 비서구 지역과 구분되는 일본만의 위대한 성취라고 여기는 만큼, 보다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일본에서 의회제는 군현제에 봉건의 뜻을 깃들게 하는 것(㝢封建之意於郡縣之中)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아니면 아예 군현제의 맥락에서 새롭게 긍정되었는가?

 

  사실 이 책에는 채 담아내지 못했지만, 박훈은 이미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다.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의회제가 명백히 봉건제의 영향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공론정치가 어떻게 근대 의회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는가를 러프하게나마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 헌법 초안을 연구하는 많은 모임이 여전히 주자학 텍스트를 공부하던 회독(會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언급으로 보아(p.62.), 근대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서도 연구를 시작한 듯하다.

 

  무엇보다 박훈은 결론에서 정밀한 실증을 통해 근대적공업과 전통적소농경영이 융합하는 양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경제학자 다니모토 마사유키(谷本雅之)를 언급하며, ‘또 다른 근대의 편린을 드러내고자 하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언제나 그의 글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던 한 사람의 독자로서, 결코 쉽지 않겠지만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앞으로의 연구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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