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 2021년이 다 가기 전에 올해의 책 결산을 올리겠노라 다짐했건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2022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게으르고 내실없게 살아왔지만, 2021년은 특히 더 그랬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고 나름의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저만 별달리 해놓은 게 없네요.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면승부 할 자신이 없으니 우회로를 찾다 오히려 더 꼬이고, 쉽게 가려고 꼼수나 부리다 제 꾀에 넘어가고 말이지요.

 

2021년은 책도 많이 읽지 못했네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100권을 채우지 못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와 달리) 제가 책벌레이미지가 워낙 강한지라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요 며칠 열심히 페이지를 넘겨가며 겨우겨우 101권을 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권수 채우기에 목숨을 거는 게 무의미하단걸 알지만,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정말로 해놓은 게 없는지라 조금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렇게 얼렁뚱땅 지나가버린 2021년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다면 좋은 교양서를 정말로 많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좋은 교양서를 쓰는 게 꿈인 사람으로서(좀 더 속물적으로는 한국출판문화상 교양부문 수상!) 책을 읽으며 무척이나 즐거웠고, 자극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단순히 어려운 주제를 알기 쉽게 요약·정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양서가 주는 자유로움을 십분 활용해 대담하고 발랄한 질문을 던지는 책들이 많아 반가웠습니다.

 

한 사회의 품격은 모어로 쓰인 좋은 교양서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게 나오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2021년의 한국사회는 제 생각만큼 망가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 구석이 있다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물론 그 좋은 교양서들이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어떻게 하면 좋은 교양서가 좋은 시민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2021년의 책 열권은 전부 교양서로만 골라봤습니다. 2021년에 읽은 좋은 학술서는 나중에 긴 서평을 쓸 일이 있겠지요. (물론 교양서도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가나다순)

   

 

1. 대치동

대치동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법정동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치동의 높은 교육열에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자녀의 입시가 다가오면 어떻게든 대치동에 발을 들이려고 한다. 조장훈의 대치동은 대치동을 향한 과도한 선망과 질시를 걷어내고, 이 별난 동네가 어떻게 한국 사교육 일번지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종합생태보고서다. 사교육과 부동산이 맞물리고, 입시정책이 급변하는 가운데 다품종 소량생산의 이점을 살려 전국의 학생과 학부모를 끌어 모은 대치동 생태계의 형성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지은이는 인류학을 전공했다지만, 부르디외를 자주 인용하는 것도 그렇고 사회과학자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도표까지 집어넣는 등 정작 책은 지극히 사회학적이다. 글의 구성부터 대안 제시까지, 논술선생님으로서의 에토스가 진하게 묻어나는 점도 재미있다. 이 책과 더불어 대치동 원주민으로 이제는 손주의 입시를 진두지휘하는 70대 할머니, 서울 변두리 자가를 팔고 대치동에 전세로 왔는데 집값이 폭등해 쫓겨날 위기에 놓인 40대 부부, 명문대 출신의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자녀교육을 위해 일을 그만둔 30대 어머니, 저 멀리 용인에서부터 매일같이 대치동 학원을 오가는 고3 수험생 등 대치동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대치동 앤솔로지가 한 편 나와도 좋을 것 같다.

 

2.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밥 꼭 먹고!”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만큼 밥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걱정과 애정을 전하는 수단이자, 인간다움을 이루는 핵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먹는 밥이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고도화된 시장과 발전한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낙관하거나, 농촌과 먹거리에 대한 목가적 환상만을 끊임없이 소환할 뿐이다.

정은정의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시장/기술만능론과 낭만적 생태주의가 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하는 농촌과 먹거리, 환경의 문제를 따뜻하지만 예리하게 짚어낸다.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유통업자의 트럭을 타고 도시로 실려와 자영업자의 손을 거쳐 따뜻한 밥이 된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러한 과정 속에 어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떻게 누군가의 작은 편의가 누군가의 큰 고통이 되는지를 지은이는 조곤조곤 담담하게 풀어낸다. 사회학이 사실상 통계학이 되어버린 지금, 숫자를 거의 쓰지 않고도 이토록 사회를 잘 실감케 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회학과 신입생 필독서로 지정하면 좋겠다.

 

3.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조선 사신단의 북경체험은 열하일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삐딱한 양반 도련님이 청나라의 번화한 문물을 체험하고 폐쇄적인 화이관을 탈피하는, 딱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른다. 미국 중국학의 기틀을 놓은 페어뱅크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건만, 정작 중화질서에 엄밀한 의미의 외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은연중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손성욱의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는 조선인들이 한가한 유람이 아닌 치열한 외교를 위해 북경에 갔음을, 나아가 양반이 아닌 중인의 교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선 도달 가능한 세계의 중심인 동시에 그 세계 바깥을 보여주는 유일한 창이었던 북경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은 저마다의 기대와 희망, 욕망을 이루고자 고군분투했다.

지은이는 19세기 조청관계 전문가로, 이미 훌륭한 논문과 서평을 여럿 내놓았다. 흔히 서세동점의 전환기로 이해되곤 하는 19세기 후반, 이 시기의 조청관계를 이해하는 틀은 근대전통/수구라는 이항대립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지은이가 이 틀을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에서 19세기 조청관계사를 써주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4.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지옥은 두려움만큼이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죽기 전까진 가볼 수도 없거니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지 아닐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지옥에 대한 상상력을 무럭무럭 키우며 불안을 달래고, 호기심을 채워왔다.

김태권의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은 동서고금의 다양한 지옥을 넘나들며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뿐 차마 말하지 못했던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지옥은 어디에 있을까? 지옥의 악마는 나쁜 사람을 벌주는데 왜 악하다고 여겨질까? 여러 종교를 믿으면 지옥에 떨어질 확률이 적어지지 않을까? 지옥의 일상은 어떻고 형벌은 언제쯤 끝날까?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온갖 기상천외한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을 마련하는 지은이를 보노라면, 역시 번뜩이는 상상력은 풍부한 독서에서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일본 만화 엉덩이 탐정이 함께 등장하는 건 아마 전 세계에서 이 책이 유일할 것이다. 한국의 에라스무스라는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은 지은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담한 상상과 엮어 읽기야말로 교양서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 점에서 이 책은 올해 읽은 가장 교양서다운 교양서다.

 

5. 신냉전 한일전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한국과 일본이 서로에게 품는 생각은 특히 재밌는 구석이 있다. 한국은 한일관계가 프랑스-영국관계와 비슷하다 느낀다. 반면 일본은 한일관계를 아일랜드-영국관계로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 한일관계가 어떻게 흘러왔느냐고 묻는다면, 한국보단 일본의 생각에 가까웠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해방 뒤에도 한국은 미일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냉전의 최전선에 내몰렸으니까. 그러나 지난 20여 년 간 한국의 국력이 크게 성장한 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정체했고,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국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한일관계를 뒤바꾸려는 모험에 나선다.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은 한국의 뒤집기와 일본의 굳히기가 엎치락뒤치락한 지난 4년의 역사를 샅샅이 살핀 끝에, 이 승부의 패자는 한국이라고 담담히 선언한다. 한국은 북미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한미일 삼각구도를 깨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무언가를 되게 할 힘은 없어도 아직 안 되게 할 힘은 있었던 일본은 한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고, 끝내 역사적인 하노이회담의 좌초에 일조했다.

한일관계의 파탄엔 한국의 책임도 크다는 지은이의 중도적인입장은 한겨레답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분단체제 해소를 한국 외교의 사명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지은이는 지극히 한겨레적이다. 다만 이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도 중시해야 한다는 각론의 차이가 도드라질 뿐.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대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여기지 않는, 가령 중국을 보다 중시하는 중앙일보같은 곳이라면 신냉전의 정의 역시 확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냉전은 구냉전과 어떤 점에서 다르며, 한국은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중 어느 나라를 수단으로, 어느 나라를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

 

6. 오답이라는 해답

과학사란 으레 정답을 향해 달려가는 끝없는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렇기에 한 나라의 과학사, 가령 한국과학사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해진 답을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빨리 찾아냈는가를 자랑스레 선전하거나, 반대로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뒤쳐졌는가를 열을 내며 성토하는 기록이 되어버리곤 한다. 물론 비단 한국뿐 아니라 특정 국가의 과학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쿨하게 선언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김태호의 오답이라는 해답은 과학엔 정답이 있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과학이란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설명 혹은 이야기인 만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선 오답으로 처리될 무수히 많은 과학이 그 시대, 그 지역에선 얼마든 해답이 될 수 있었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한국과학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거리를 안긴다. 근대를 일본의 식민지로, 현대를 미국의 점령지로 시작했던 만큼 한국의 과학연구는 두 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과학사가 일본과 미국의 혼종인 도란스(ドランス, trans의 일본식 발음)”적 존재에 그치는 건 아니다. 제국의 보편적 지식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만나며 상상도 못한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전의 양면인 자주-독자 프레임과 아류-열등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도 한국의과학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너무나 발랄하고 명랑하게 보여주고 있다.

 

7.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물론 사회적, 혹은 폴리스적 동물이란 해석도 있지만 넘어가자) 여기까진 다들 잘 알고 있다. 다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 만큼 정치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는, 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찍어달라는 납작한 결론으로 곧장 넘어가버려서 문제지.

김영민의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는 다르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정치에 참여해야 할 필연적인 당위가 생겨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말한다, 정치란 거대한 허구라고, 선거도, 투표도, 이를 가능케 하는 국가니 국민주권이니 하는 것도 전부 허구라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허구를 통해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고, 무리를 이루고, 질서를 유지하며,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정치란 허구고 인간은 바로 그 허구가 있기에 비로소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8. 전국 축제자랑

누군가 “K-”를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이 책을 보게 하라. 김혼비와 박태하가 쓴 전국 축제자랑은 단순한 지역축제 탐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지역축제를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 해부도에 가깝다. 사람이 줄어가는 지역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지자체의 눈물겨운 몸부림, 담당 공무원들의 헌신과 (의도된) 무심함, 지역주민보다 관광객을 우성한 구성, 온갖 요소가 맥락 없이 섞여 들어가는 혼돈의 도가니, 넘실대는 욕망과 밥벌이의 어려움, 그 가운데서도 나름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정말이지 “K-”하지 않은가!

“PC이 풍자와 익살을 말살한 21세기 판 성리학으로 공격받는 이 시대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배꼽 빠지게 웃긴 이 책의 존재는 퍽 소중하다. 톨스토이가 그랬다던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적어도 이야기만큼은 반대인 것 같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모두 비슷한 이유로 재미없지만 재밌는 이야기는 저마다의 이유로 재미있다. 농담과 재미의 결이 이렇게나 다양하단 걸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9. 전라디언의 굴레

고등학생 시절 5.18을 맞아 광주로 답사를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건 5.18을 기억하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멀리서 온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친절함도 아니었다. 바로 1980년에 멈춰버린듯한 도시풍경이었다. 아버지가 부산 출신인 친구는 어떻게 호남에서 가장 크다는 도시가 이리도 낙후할 수 있냐며, 자기는 그 때 지역차별의 문제를 처음으로 느꼈노라고 아직도 얘기하곤 한다. 일베발() “호남드립이 이제는 20대 사이에서 하나의 유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전라도 출신에 대한 혐오와 멸시도 여전히 뿌리깊다. 이른바 호남문제는 지역차별과 계급차별이 밀접히 얽혀있는 셈이다.

조귀동의 전라디언의 굴레는 호남의 낙후와 저발전, 그리고 지역차별의 기원을 파헤친다. 지은이는 단순히 박정희 정권이 공장을 많이 짓지 않아서 전라도가 못 살게 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1950~60년대 내내 호남 출신이 정치권에서 소외됨으로써 기업을 키우기 위한 자원을 배분받지 못했고, 따라서 지역에 산업생태계가 조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라도판 자민당 혹은 제도혁명당으로 군림하는 민주당이 중앙정부에서 받아온 떡고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폰팔이와 건설사가 지역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되어버린 현실은 그 결과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다만 동남권 식의 메가시티는 해결책이 아니다. 지역 간 연계가 밀접한 동남권과 달리 호남은 군산, 익산, 전주, 광주, 목포, 여순광 등의 도시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일단은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여 지역정계에서 민주당 일당제를 깨뜨리고, 지방국립대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는 것만이 시도해봄직한 유일한 대안이다. 문제제기에서 대안제시까지,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책이다. 지은이가 쓴 김대중 평전을 읽어보고 싶다.

 

10. 지속가능한 나이듦

노화는 방 안의 코끼리다. 모두 그 존재를 알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어 한다. 몸은 점점 예전 같지 않아지고, 신도시 상가를 채우는 노인보호센터는 늘어만 가건만 아무도 이를 공론화하려 들지 않는다. 정희원의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이제는 노화라는 코끼리를 마주해야 한다고, 노화를 위한 사회계약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이어폰 줄을 풀어가듯 지은이는 사회와 개인,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춤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과도한 공포나 낙관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도래할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현명함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이란 이처럼 객관적 데이터를 근거로 논의를 위한 공통의 지반을 확인하고, 그 위에서 합리적 해결책을 도모하는 역량을 길러내는 과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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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나이듦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정희원 지음 / 두리반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관악 갑 후보로 출마한 김대호 씨는 지역 장애인 체육시설 건립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사실상 정치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대호 씨의 발언이 장애인 차별이 아닌, “노인비하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점점 침침해지는 눈, 나도 모르게 절게 되는 다리, 예전 같지 않은 소화력 등 나이가 들수록 달라지는 몸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장애인이라는 말에 갑작스레 폭발한 건 아닐까.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김대호 씨는 어쨌거나 노화라는 방 안의 코끼리를 모두에게 드러낸 셈이다.

 

물론 코끼리의 존재를 인지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덩치에 놀라 호들갑을 떨며 잘못된 대책을 내놓거나, 최악의 경우 책임소재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자멸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쓴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흔치않은 책이다. 코끼리를 못 본 체 하지도, 그렇다고 그 위험을 과도하게 부풀리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지은이는 어떻게 하면 노화라는 코끼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사회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탁월함과 진지함에 여러 번 놀라며 책을 읽었다.

 

책은 노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방법을 다룬 1부와 노년의 질병에 대한 2, 사회 차원의 대안을 고민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목차를 그대로 따라가면 재미없으니 순서를 뒤집어 보자. 지은이는 이른바 초고령사회에 대한 일각의 두려움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오늘날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폐지 줍는 노인들과, 앞으로 노인이 될 이들은 꽤나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머지않아 노인으로 분류될 1960년대 생은 현 시점의 노인인 1930~40년대 생과 달리 비교적 건강하고, 아직 일할 능력이 있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췄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앞으로 노인인구가 늘어난다 해서 정확히 이에 비례해 부담이 커진다는 건 터무니없는 진단이다.

 

오히려 문제는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분류하는 현재의 기준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충분히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은퇴시키고, 연금까지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무려 70년 동안이나 바뀌지 않고 있는 노인의 기준을 조금씩 뒤로 밀어내서, 최종적으로 77세 정도로 상향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에 따를 여러 혼란과 저항을 알고 있기에, 지은이는 앞으로 15년간 1년에 4개월씩 노인 기준을 상향하고, 그 뒤에는 28년간 1년에 3개월씩 상향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만약 2022년부터 이렇게 상향을 시작하면 2065년에는 노인 기준 연령이 77세에 도달하므로, 국민연금 고갈과 과도한 총부양비 문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면서 사회적 저항 역시 최소화할 수 있다.

 

노인의 기준이 뒤로 밀리면, ‘젊은이의 기준 역시 똑같이 밀린다. 1950~60년대에 젊은 청년이 장군도 되고 건설회장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당시 중위 연령이 19세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 20~30대는 오늘날 40대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1972년생인 유재석의 현재 나이는 1960년생인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던 때와 같지만, 어느 누구도 그때의 이경규와 지금의 유재석이 똑같이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1981년생은 만으로 쉰이 되는 2031년에야 1967년생이 만으로 서른이었던 1997년에 누린 사회적 지위에 이를 수 있다. 앞 세대가 똘똘 뭉쳐 기득권을 수호하고 사다리를 걷어차 버려서가 아니라, 생애주기가 전체적으로 길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맞춰 사회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하고, 개인 역시 더 길어진 삶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게 되었다 해도 노화를 피해갈 수는 없다. 또 앞으로 노인이 될 60년대 생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노인인 30~40년대 생의 질병과 장애,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노화라는 정해진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지은이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라는 현재의 재가 중심 서비스에 의문을 던진다. 서비스 제공자가 여러 곳을 순회해야 하는 만큼 효율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은 저밀도의 재가 중심이 아니라 고밀도의 시설 중심이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아마 눈 밝은 독자라면 마강래의 지방도시 살생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원격의료의 도입 역시 고려해봄직하다.

 

나아가, 지은이는 보건복지부를 보건부와 복지부로 쪼개려는 일각의 움직임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특히 노인에게 질병과 장애, 돌봄은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느 하나만 떼어내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노화가 진행되면 기력이 쇠하고, 병에 걸리기도 훨씬 쉬워지며,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의 증가가 한국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점이 무척이나 자명한 만큼, 보다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보건과 복지의 긴밀한 연계는 꼭 필요하다.

 

노인 문제를 고민할 때의 이러한 복잡성은 노화에 따른 질병을 다룰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어도 노년의 질병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책은 간단명료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이 제 역할을 못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된 여러 지병과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가 상호작용하며 일종의 복잡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무려 1년 넘게 소화 장애와 파킨슨병 증상이 멈추지 않던 70대 후반 A씨의 고통이 고작 진통소염제 한 알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진통소염제와 함께 처방한 소화제가 신경계 부작용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처방받은 파킨슨 약이 구역과 구토를 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소화제 처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일으킨 것이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등산과 골프를 즐길 만큼 건강하던 A씨는,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흰죽과 미음밖에는 먹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고 말았다.

 

주치의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급격히 의료자원이 풍부해지며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있게 된 한국의 독특한의료시스템 역시 A씨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구토를 하면 내과 의사를 찾고, 손발이 떨리면 신경과 의사를 찾는 식으로 질병 중심의 진료를 받은 결과, 오히려 약물 사이의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은이는 A씨가 지난 1년간 복용했던 약들의 자서전을 꼼꼼히 살핀 결과 복잡계를 건드린 원인을 찾을 수 있었고, A씨는 밥과 김치를 먹고 지팡이 없이 병원에 걸어올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노인의학은 얽히고설킨 이어폰 줄을 풀어가는 일과 비슷한, 일종의 역추적 문제풀이인 셈이다.

 

이렇듯 노년의 질병은 원인을 찾기도, 상태를 호전시키기도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지은이는 노화에 대응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면 노화를 (아예 막을 순 없지만)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격적으로 노화에 따른 변화가 진행되는 50대 이전에 이를 실행에 옮길 필요가 있다. 마치 적금을 드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조그만 실천이 노화의 그래프를 최대한 길고 완만하게 연착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단언한다, 기술이 발전해 노화를 멈추고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무병장수를 선물하리라는 희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을 잘 하기 위해 반도체 공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생목의 오류. 심지어 지은이는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나이가 든 뒤에는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생에 비해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와 불량식품에 둘러싸여 생활한 1980~90년대 생의 평균수명이 더 낮을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마저 내놓는다. 한때 트위터에서 유행했던 글처럼, 우리는 고장 난 스마트폰 같은 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이 운명은, 아무리 영양제와 건강식품을 챙겨먹는다고 한들 절대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방법은 단 하나, 절식하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길 뿐이다. 특히 절식! 설탕은 금물이다. 탄수화물도 줄일수록 좋다. 인간은 좀 적게 먹는다고, 식사횟수 좀 줄인다고 크게 잘못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해진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어차피 고기를 소화하기 힘들어하는 노인인구가 늘어난다면 대체육 시장이 발달하고 소고기는 최상류층의 사치품이 될 테니 미리 적응한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고기를 줄이면 된다.

 

당연하겠지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아니, 동의하지 못한다가 정확한 표현이겠다.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로드맵이 너무나 따라가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이건 뭐 평생 수도승처럼 살라는 얘긴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저 노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데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간된 전현우의 거대도시 서울 철도와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나이듦역시 노화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한다. 노인의 기준은 몇 살로 잡을 것이며 새로운 기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라이프 사이클은 어떻게 재조정될 것인지, 노인에 대한 의료와 복지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물적, 제도적 조건이 필요한지,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까지, 노화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할 사항이 이렇게나 많다. 노화라는 코끼리에 어찌 대처할지 몰라 쩔쩔매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계약을 고민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첫 단추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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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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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정말 탁월하다, 고 생각했다. 이건 괴물같다, 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보통 젊은 작가에게 기대하는 건 천재성, 광기, 실험성, 불안함 등이다. 하지만 서이제는 놀랄 만큼 안정적으로, 원숙하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90년대 초반생(아마 92~94년생 정도?)의 삶을 그려낸다. 비슷한 또래의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관찰되는 자의식 과잉, 불안, 폐쇄성, 히스테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자조나 달관을 가장한 위악을 부리지도 않고 정직하게, 일체의 비하나 연민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거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이렇게 쓰면 이렇게 읽히겠구나를 충분히 고민하고 글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 에세이, 비평, 학술논문, 웹툰(작가는 영화를 전공했다지만 난 이쪽이 제일 잘 맞을 것 같다) 등 정말이지 다양한 장르가 소설에 녹아 있는 느낌인데, 작가가 글쓰기의 영역을 좀 더 확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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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 유명해지고 싶은 2030 인류학 보고서
정연욱 지음 / 천년의상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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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에 대한 탁월한 비평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비평의 재료로 (가령 "비평적 픽션"의 형태로!) 쓰임직하다. "이런 식으로 문화기술지 쓰면 교수님께 혼 안나요?"라고 묻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이 납작함과 투명함이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자동 사람들》이나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처럼 '전형적인' 연대 문화학 협동과정틱한 글과는 거리가 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연대 출신의 이미지에는 부합하는 희한한 텍스트. 《대학내일》이나 장류진의 소설(공교롭게도 이쪽 또한 '전형적인' 연대생 멘탈리티!)과 비슷한, 일종의 '풍속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래도 몇몇 대목은 꽤 뼈때렸어, 가령 이런 식으로.

"게다가 돈 많고 몸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사람들이다.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신파는 결핍에서부터 출발한 매서운 반골들이다. 단단한 정신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인정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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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새해가 찾아온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느 때보다 책에 빠져들기 좋은 환경이었음에도, 올해 읽은 책은 작년보다 줄어 총 124권입니다. 제가 책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서인지, 출판계가 예년보다 부진했는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히 읽은 책의 양뿐 아니라 질 역시 떨어진 느낌입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2020년에 나온 책만으로는 올해의 책 열권을 추릴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12월 들어 반짝이는 신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오랫동안 그만뒀던 서평 쓰기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요.

 

  2020년도 역시나 주요 언론사가 꼽은 2020년의 책들은 경향신문정도를 제외하곤 그저 그랬습니다. (특히 동아조선처럼 감각 있는 외부 필진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한 한겨레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년처럼 2020년에 나온 책들로만 열권을 꼽아 봤습니다. 작년에 쓴 글을 보니, 2020년의 목표로 두 가지를 적었더군요. 하나는 매주 꾸준히 서평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저자를 기다리게 하는 서평가가 되는 것. 이 얼마나 오만한 목표였는지요. 올해는 그저 뜨문뜨문, 하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고 서평을 써보려 합니다. 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1. 정의의 감정들 

조선의 법체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크게 두 가지, 원님재판과 저 놈의 주리를 틀라!”일 것이다. 공명정대한 성문법도, 독립적인 판관도 없이 고을 수령이 제멋대로 내리는 판결, 그리고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했던 야만적인 고문과 처벌은 그간 조선시대가 법에 의한 지배가 전혀 관철되지 않는 사회였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1912년 일제가 도입한 조선민사령이야말로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내린 근대의 씨앗이라는 주장도 가능했다.

정의의 감정들은 조선의 법체계가 근대적이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고루한 논쟁을 우회해, 당대의 약자였던 여성들이 어떻게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정의를 호소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원통함()을 해결하고자 기꺼이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낸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을 보노라면, SF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은 비단 거대하고 웅장한 서사를 통해서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임진전쟁 이후의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원을 찾는 건 이제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국민청원을 비롯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2. 거대도시 서울 철도 

  매일 밤,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앞에는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긴 줄이 여럿 만들어진다. 하남, 성남, 용인, 수원 등 경기 동남부의 위성도시 거주자인 이들은, 낮 동안 서울 각지에서 분주히 일하다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입구역에 집결해 각자의 보금자리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을 기다린다. 거대도시 서울철도의 저자 전현우는 이들이야말로 서울이란 거대도시의 통근 패턴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 서울 내 이동에선 지하철이 앞서지만 시계(市界)를 넘는 먼 거리는 광역버스가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후위기를 대비하기 위해선 자동차와 버스의 수요를 철도가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핵심은 신분당선과 같은 광역급행의 확충과 GTX를 연장한 광역특급의 대대적 준설이다. 북한과 중국까지 내다보는 호방함과 경기도 도농복합시 중 최약체인 광주를 배려해주는 세심함을 갖춘 동시에, 분석철학 전공자가 철덕이 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3. 대표: 역사, 논리, 정치 

  정치사상은 흔히 현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상아탑의 고담준론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소한 대표(representation)에 관한 한, 정치사상은 여전히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고 나아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이다. 가령 총학생회가 학내 구성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남혐강사를 초청했다며 전학대회에서 총학생회장 탄핵안이 발의된 모 대학을 살펴보자. 총학생회는 선출된 순간 나름의 자율성을 지니는가, 아니면 학내 구성원의 뜻을 철저히 모사(摹寫)해야 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대표: 역사, 논리, 정치는 이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대표 개념의 역사와 그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미래를 위해 그 범위를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얇지만 밀도가 높기에 후루룩 읽고 넘기기보다는 여러 번 정독하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4. 연년세세 

 황정은이 2014년에 퍼낸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는 주인공 소라와 나나를 돌봐주는 이웃집 아주머니 순자가 등장한다. 그는 접경지대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에 매년 제사를 지내러 간다. 그리고 황정은이 2020년에 퍼낸 연작소설 연년세세의 첫 단편인 파묘破墓, 똑같이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역시 접경지대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를 파버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책이 나온 해를 기준으로 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황정은은 연속보다는 단절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단절은 의식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어버린 상황에 가깝다. 연년세세, 즉 여러 해를 거듭하며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담은 제목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그간 해오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도,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자신을 힘들게 한 이를 원망하기도, 혹은 전혀 뜻밖의 일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은 끊길 수밖에 없고 무엇은 이어져야만 하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질문이다.

 

 

5. SF 작가입니다 

  단언컨대 배명훈은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다. 그가 처음으로 낸 에세이집인 SF 작가입니다는 평행우주나 타임머신처럼 SF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SF하면 으레 떠올리는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배명훈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이때의 세계란 있는 그대로의 세상보다는 조금 작은, 그러니까 세상을 나름의 주관과 논리에 따라 재배열해 만든 작지만 질서 있는 소우주다. 배명훈이 생각하는 SF란 결국 세계에 대한 이야기, 즉 작가가 만들어낸 소우주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며, 그런 만큼 순문학과 SF의 독법은 달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비단 작가 지망생이나 SF 애호가들뿐 아니라 대학원생이나 연구자, 좀 더 소박하게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모든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6.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하나의 유령이 출판계를 배회하고 있다, 유튜브라는 유령이. 구텐베르크 혁명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등극했던 책은 이젠 유튜브 혁명으로 영상에게 그 자리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다. 머지않아 책은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것이라는 비관과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낙관이 횡행하는 가운데,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이러한 불안에 따뜻하고 진지하게 응답하는 흔치않은 책이다. 두 저자는 책의 존폐 여부보다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를 잇는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이며, 이를 가장 잘 기를 수 있는 방법은 읽기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책을 다시 살려낸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와 조롱이 유독 심했던 2020년이었던 만큼, 상대방을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앎을 확장하는 두 저자의 모습이 참 귀하고 소중하다.

 

7. 서울, 권력도시 

 이른바 근대는 한국사회가 아직도 풀지 못한 커다란 숙제다. 특히 일정기(日政期)에서 대일항쟁기까지 그 명칭도 다양한 식민지시대에 대한 평가 문제에선 더더욱 그렇다. 이 시기를 설명하는 유력한 관점들인 수탈론과 근대화론, 근대성론은 모두 근대의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왔다. 다만 근대가 조선을 철저히 털어먹었는지,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규율권력을 창출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반면 서울, 권력도시, 비록 의도하진 않았을지언정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웃음으로 저항한 경성의 조선인들을 통해 근대란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내비친다. 조선인들은 그 안에 담긴 총독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오락을 오락으로 즐겼으며, 총력전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신사 앞에서 조선식 큰절을 했다. 그들은 근대의 폭력에 저항해야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근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터 에커트가 말한 제국의 후예란, 강력한 발전국가나 이에 기생하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권력의 선전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8. 사치와 고요 

 누군가에게는 동인문학상과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 확실히 기준영의 소설은 심심하고, 밋밋하다. 요즘 출판시장 최대의 소비자인 2030 여성의 호응을 얻을만한 요소도 부족하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독자는 이 책에서 때론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잉된 감정들이 모두 잦아든 뒤 찰나와도 같이 찾아오는 고요의 순간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준영은, 마치 섬세하고 정교한 유리 공예품 같은 그의 소설에서, 오해와 불신,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초기작보다는 나중 작품이 좋은 작가다.

 

9.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그 성과에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보내든, 그 불충분함에 야유 섞인 눈초리를 보내든, 그간 한국에서 메이지유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화 운동이었다. 21세기의 나이토 고난이라 할 수 있는 박훈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다. 그의 첫 한국어 학술서인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고 이야기한다. 종적(縱的)인 박스형 사회였던 일본에서 하급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확산되며 횡적(橫的)인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이를 토대로 천하의 공론에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유교 없는 유신은 불가능했어도 유신 없는 근대는 가능하지 않았을지, 혹은 군현화가 시대적 대세던 일본에서 어떻게 봉건화의 핵심인 의회개설이 가능했을지와 같은 재밌는 질문거리를 안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다만 편집이 조금 아쉬운데, 까치나 일조각에서 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10. 누가 백인인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블랙페이싱 논란 등, 한국에서 2020년은 그 어느 해보다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해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백인인가?가 크게 화제를 모으지 못한 건, 조금 이상하게까지 느껴진다. 저자는 명료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미국에서 백인, 흑인, 황인, 히스패닉을 비롯한 인종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때로는 그 명료함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자가 명료하게 정의내린 것이 과연 그렇게까지 명료한지 토론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단 점에서 결코 나쁘진 않다. 가령 저자는 미국에서 히스패닉이 민족집단인지 인종집단인지 논란이 계속됐다고 하는데, 애초에 민족과 인종이 그렇게까지 상호배타적인 개념일까? 고등학교나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이 책을 읽고 인종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대해 한바탕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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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21-01-04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네요.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유찬근 2021-01-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