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블루스
김종광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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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뒤를 잇는 스타일리스트. 내가 처음 김종광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의 이름 앞에 붙어있던 수식어이다. 다들 고만고만한 문장을 가지고 있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요즈음 소설가를 본다면 김종광은 그나마 개중에서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릴 만한 문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문구의 문장이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버무려진 문장이라면 김종광의 문장은 좀 더 쉽게 읽히는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되 알아먹을 수 있는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축제가 사라진지 오래다.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와해와 함께 젊은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회지로 속속 빠져나가기 시작한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인 낙후와 경제적인 빈곤, 그들만의 전통과 문화의 상실에 직면해 있다. 남아 있는 젊은 층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다음 세대가 태어나지 않아 농촌에는 '늙은 부부끼리 바르작바르작 농사짓는 집'이 허다하다.

김종광은 근간에 보기 드문 농촌 소설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전, 김유정이 농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놓듯이 능청스런 의뭉함으로 농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농촌 사람들의 극심한 생활고보다 농기계의 고장이나 젊은 도시 여성이 농촌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춘이 서해를 데리고 돌아온 것은 더 이상 세대가 이어지지 않는 농촌에 마치 축제와도 같은 사건이다. 이 축제는 서해와 대춘의 정사를 지나 서해가 오기로 버텨 낸 모내기를 끝내고 대춘과 추는 블루스에서 절정을 맞는다. 막걸리 몇잔을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서해의 노래에 어깨를 들썩이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농촌은 새로운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함께 더불어 가는 사회. 이 말이 언제부터인지 낯선 말이 되었다. 굳이 타인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혼자서 무슨 일이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작가는 공동체의 약화를 문제제기 하고 있다.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란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알 수 없는, 따라가지 못할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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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양,유다 세계사 시인선 26
이연주 지음 / 세계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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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90년대를 여성시의 확립 시기라고 한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여성의 교육 기회 증대와 중간계급으로의 편입,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유입 등의 요인이 밑거름이 되어 90년대에는 많은 여성 시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당시 여성 시인들은 가부장제 중심사회의 제 모순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과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는 것의 두 가지의 양상을 보였다. 이들보다 뒷 세대의 시인들은 에코 페미니즘적 성향으로 여성성과 아울러 모성성을 새롭게 제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대에 데뷔한 여성시인들에게서는 이전의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피해의식을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여성이 살만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시선이 페미니즘에서 휴머니즘으로, 여성해방에서 남녀평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비평문에서 다룰 이연주는 이들 양상 중에서 '가부장제 중심사회의 제 모순을 비판'하는 양상을 보였다. 여성적 의미 생산은 일단 여성적 자리에서 남성적 담론들에 대한 해체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남성들은 여성을 자연과 죽음의 동의어로 보면서 육체라는 물질성만을 가진 존재로 취급했다. 여성은 자신의 초월을 위한 방해물이거나 혹은 내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수동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초월을 위해 딛거나 버리거나 해야만 했다.

이연주의 시는 위악적이다. 시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이 위악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여성은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내면의 목소리의 실존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자신이 삶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음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실재하는 내면의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자신의 현실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인이 느끼는 죽음은 단순한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매일 새로운 시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유기시켜버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녀의 유기된 몸, 육체는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날짐승에게 훼손되어 버린다. 몸을 유기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시인이 느끼는 것은 '지독한 냄새'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쉬기를 원한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기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위악적인 태도는 시인이 이 세상에서는, 이런 현실 속에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여성시의 경우, 그곳엔 여성적인 전체성만이 충만하다. 그곳에서 여성시인은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타자와의 차이가 무시되고, 대화가 증발하며, 신비주의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경계가 선험적으로 무시된 또 다른 가상의 동일자의 사랑이다. 이런 시들의 화자에겐 현실적 타자는 필요 없고, 어쩌면 자신의 육체도 필요 없다. 다만 자신만의 에로스의 공간, 항홀경이 필요할 뿐이다. 그 화자가 그려낸 세상은 여성이라는 이름의 밀도로 모든 아이들을 하나로 채워버린, 녹아버린 버터 속 같은 곳이다. 이런 시 속의 여성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외부에서만 살아 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언어로 영적 체험을 현재화하는 언어, 신비주의에 사로잡힌 여성적 제스처의 언어는 남성적 세계를 표면적이고 외부적으로만 극복한다.

이연주는 당당히 '유토피아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시인의 시는 '절망의 노래'인 것이다. 현실 속에서 유토피아는 단지 신기루일 뿐이다.

그녀의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찾지 못하고 죽음에서 찾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숨막히는 절망의 구조 속에서도 점점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던 다른 여성시인들과 달리 그녀는 왜 변하지 못하고 이승을 져버린 것일까. 남성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격렬하게 파헤치고 비판하던 90년대의 여성시인들 중에서 그녀는 남성의 사회에 편입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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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흉상 - 신상웅 전집 1
신상웅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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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책임회피'로 점철된 군 의료기관의 무성의함과 미련함, 그리고 타성에 젖은 군의관의 자질 문제와 비신뢰성을 복막염을 앓고 있는 한 병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전우 구영구 일병이 송문집에게 던지는, 다소 현학적(衒學的)인 질문과 골린답시고 내뱉는 '그렇게 쉬운 걸 못 알아내면, 넌 늘 움켜잡고 돌아가는 배앓이로 칵 뒈질 것'이란 악담에 대한 송문집의 강박 관념이 나타나 있다. 송문집이 급성 맹장염으로 쓰러지는 시점은 리어왕이 배가 갈려 죽는 장면에서이다. 그 후로도 그는 배가 찢겨져 죽는 장면을 자주 상상한다.

작품을 이렇게 시작한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허약한 회의(懷疑)를 간과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그 허약 증세의 극복은 '인간 긍정의 정신'으로 가능함을 제시하고 있다. 즉, 송문집이 밤중에 복통을 일으켰을 때 걱정을 하며 거드는 동료들, 눈 덮인 밤길에 후송을 강행하는 주번사관 정 소위의 의지 등을 통해서 인간 긍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달리 의무대-야전병원-후송병원 순으로 여러 절차를 거치며 후송되는 과정에서 의무관들의 책임 회피와 거친 응급 처리 등은 결코 긍정적 모습이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급성 맹장염은 급성 복막염으로 또 다시 횡경막염으로 번져 송문집은 몇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국 병실 동료가 선의의 동기로 진통제로 알고 잘못 준 약이 그를 죽게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 조직사회의 타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요구한다. 송문집의 말대로 '의사가 두 개의 얼굴을 가졌건 천의 얼굴을 가졌건 군의관은 의사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처형권을 가진 군대의 상관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군 의무조직의 비인간성을 생생히 보여 준다. 송문집 일병의 '분노가 있는 한 우린 죽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작가의 작품의 주된 모토인 '현실에 마주서기'의 자세가 잘 드러난다. 주인공이 마주치는 후송병원에서의 모순, 즉 의병 제대를 노리는 꾀병 환자, 거짓 파월 유족 수혜 환자, 병원 종사자 가족들에 대한 불법적인 특혜, 후송 특명을 따낸 군인들의 허위성, 비민주적인 군대 횡포, 군의관의 근무 태만 및 안일성, 사망서의 허위 작성 외에도 후송 병원 입원 환자의 절반이 허위로 작성된 민간인이라는 사실은 군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정황은 병원의 부조리를 자기 고향 선거구의 무질서 등에 연관짓는 병실 동료 김환석의 잡담으로 인해서 상황악(狀況惡)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이런 복합적 상황의 와중에서 인간 송문집은 고독하고 신랄한 투병 끝에 허무하게 죽어갔다.

작가는 문단에 데뷔한 이래 가장 관심을 많이 기울인 영역인 군대 조직과 같은 현대의 조직 메커니즘이 초래하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조직 메커니즘의 기계적인 억압에 항거하면서 전체 속에 처한 개인의 문제의식을 통해 그것의 위선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고발해 왔다.「히포크라테스 흉상」에서 보여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주체를 그 군대 현장에 밀착시키기를 포기한 채 그 시간 그 담당 직책만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드는 군의관들의 책임 회피와 같은 현상들은 군대 조직 속에서의 삶이란 결국 허위의 삶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근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군대 조직이란 그 배후의 존재하는 무형의 거대한 어떤 힘의 조작을 받고 있으므로 거기서는 아무도 개인의 주체를 밀착시킬 어떤 실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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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 현대문학북스의 시 3
이홍섭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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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불교 색채로 범벅된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사찰 한 곳에 다녀 온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잊고 지내던 불교 공부를 한 기분이랄까. 예전 스님 한 분이 지은 시집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시어, 이미지, 비유 상징을 중점으로 시집을 평해야 하는데 도무지 '불교'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으니 막막한 심정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그 '불교' 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교라는 학문이(나는 착실한 불교 신자이지만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불교는 내게 종교보다는 학문에 가까웠다.) 선문답 같은 면이 없잖아 있어서 그런 것인지 한참을 되뇌여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 두 편의 시를 시집의 첫 머리에 둔 이유는 아마 이 시집에서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이 두 편의 시에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화엄경>이란 소설-이라기 보다는 불교 서적이었다-을 읽고 나서 꼭 꿈을 꾸고 난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었던 적이 있다. 몽유비원도. 꿈 속에서 놀기를 슬프도록 원한다 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러기에 꿈에서 돌아온 아이가 서럽게 울고 화자 역시 깨어나 혼자인 것을 서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과연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시인은 불가(佛家)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속세(俗世)의 사람도 아니다. 속세에 머무르면서도 늘 생각은 불가에 가있는 사람 같다. 일상을 버리고 불교에 메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그의 삶의 지향점은 불도인 것처럼 보인다.

시집에서 다루고 있는 불가의 사람들, 그리고 속인(俗人)의 모습, 시인이 사찰을 오르락 내리며 만난 모든 것들은 참 예쁘다. 예쁘다라는 말 외에 달리 대신할 말이 없다.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베길 절을 하는 시인의 할아버지와 홍련암부처님이 서방 같다고 이야기하는 공양주보살, 캄캄한 산길에서 문둥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노스님, 깔딱고개를 넘어와 보시를 하고 영감 저녁상 차리러 다시 그 고개를 넘어간 노파, 문둥이 여자를 자기 방에서 보살폈다는 경허선사, 자살 직전 앳된 비구니의 얼굴을 빚었다는 조각가, 시인이 하산하기 전에 발을 씻어드렸다는 노스님, 요양원 앞뜰에서 어부바를 하고 있는 노파. 심배나무, 꾹저구, 살구나무, 열목어, 달맞이꽃, 국화, 벚꽃, 송아지 등. 시인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그네들이 아마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들은 일차적인 따뜻함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인의 시각은 연민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두 개의 화두는 끈질기게 시인을 따라다니고 있다. 시인이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긴 밤길 속을 해메는 청맹과니 같다. 한평생을 운수납자로 살아온 스님의 발을 씻어드리고 그 발을 안고 하산하는 시인이 가야하는 길은 멀기만 하다. 아니,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되고 힘이 든다. 피가 돌지 않는 발을 안고 가는 길이란 얼마나 무겁고 힘이 들겠는가.

시인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향하여 서 있는 이유는 아마 시인이 있는 이 곳이 극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세상이 극락이어서 극락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뒤로 가든 앞으로 가든 이 세상에서는 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적쇠 위에서 인내하며 붉은 열반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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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 시인선 140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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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우파니샤드. 이국적인 이 단어에 이끌려서 나도 모르게 시집에 손이 갔다. 어딘지 모르게 마력이 깃든 언어 '우파니샤드'. 그것도 그럴 것이, 경전의 이름이란다. 인도에서 인간과 신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적 생명과 개인적 생명의 궁극적인 일치에 대한. 시인에게 경전은 '서울'인 모양이다. 그녀는 서울에서 이 모든 것의 합일점을 찾아내었다.

시인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그 기발한 상상력을 따라가는 일이 마냥 즐거웠다. 이런 의도로 썼을 거야 라고 골머리를 썩히며 읽는 것보다 그녀의 상상력을 있는 그대로 내 안에 수용했다. 이것이 내가 이 시집을 읽는 첫 번째 작업이었다. 그녀의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 안에 내가 녹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서로 전혀 다른 성질의 사물을 연결시켜서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런 이미지와 상상력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 함께 공감하고 그것에 동화되는 것 같았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판독하는 것은 그 상상력에 마음껏 휘둘리고 난 다음의 문제였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는 김혜순의 시를 그녀가 갖고 있는 에로스적 관점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만큼 시인은 완성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역동적인 성적 표현을 종종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몸 안에 혹은 마음 안에 커다란 방을 가지고 있다. 그 방에 '그' 혹은 '당신'을 가두기도 하고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그와 자신을 가둔 방에 숨기도 하고 그 방을 깨뜨려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인 자신의 내면화를 이루는가 하면 자신을 확대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경전인 서울은 '우파니샤드'가 갖고 있는 뜻과는 조금 다르다. 서울은 그녀에게 부정적인 공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월 초파일, 서울의 흥부, 서울의 방주에서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또, 서울 곳곳의 정경과 시간에 따른 서울의 모습을 그녀만의 독특한 묘사와 역설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서울의 모습뿐만 아니라, 서울과 함께 변하는 다른 도시 혹은 다른 고장의 모습도 부정적인 면을 그리고 있다.

서울의 정경묘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이미 서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시인의 마음이 자라 서울특별시가 되었는가 하면 그 마음의 미로 안에는 골목마다 유리문이 있어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시인은 서울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서 합일점을 찾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시인의 몸짓은 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불의 긍정성, 불빛의 긍정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은 열과 빛을 함께 발산하는 것이고 그 스스로 에너지를 갖고 있다. 「너와 함께 쓴 시」에서 종이꽃, 물꽃과 함께 불꽃 역시 유한성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그 스스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것은 불꽃뿐이다. 또, 별 중에서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태양뿐이다. 그녀 안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그녀의 이상향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긍정적인 몸짓은 마치 현실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의 이상향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문을 지나 도달하는 곳은 '돈황'이나 '백제'와 같은 이미 역사적으로, 실존 적으로 사라져버린 곳이다. 이런 현실에는 없는 이상향은 환하다.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시인의 생각은 서울에서의 행동은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는(「서울」에서)' 몸짓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분명한 서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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