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포크라테스 흉상 - 신상웅 전집 1
신상웅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책임회피'로 점철된 군 의료기관의 무성의함과 미련함, 그리고 타성에 젖은 군의관의 자질 문제와 비신뢰성을 복막염을 앓고 있는 한 병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전우 구영구 일병이 송문집에게 던지는, 다소 현학적(衒學的)인 질문과 골린답시고 내뱉는 '그렇게 쉬운 걸 못 알아내면, 넌 늘 움켜잡고 돌아가는 배앓이로 칵 뒈질 것'이란 악담에 대한 송문집의 강박 관념이 나타나 있다. 송문집이 급성 맹장염으로 쓰러지는 시점은 리어왕이 배가 갈려 죽는 장면에서이다. 그 후로도 그는 배가 찢겨져 죽는 장면을 자주 상상한다.
작품을 이렇게 시작한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허약한 회의(懷疑)를 간과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그 허약 증세의 극복은 '인간 긍정의 정신'으로 가능함을 제시하고 있다. 즉, 송문집이 밤중에 복통을 일으켰을 때 걱정을 하며 거드는 동료들, 눈 덮인 밤길에 후송을 강행하는 주번사관 정 소위의 의지 등을 통해서 인간 긍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달리 의무대-야전병원-후송병원 순으로 여러 절차를 거치며 후송되는 과정에서 의무관들의 책임 회피와 거친 응급 처리 등은 결코 긍정적 모습이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급성 맹장염은 급성 복막염으로 또 다시 횡경막염으로 번져 송문집은 몇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국 병실 동료가 선의의 동기로 진통제로 알고 잘못 준 약이 그를 죽게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 조직사회의 타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요구한다. 송문집의 말대로 '의사가 두 개의 얼굴을 가졌건 천의 얼굴을 가졌건 군의관은 의사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처형권을 가진 군대의 상관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군 의무조직의 비인간성을 생생히 보여 준다. 송문집 일병의 '분노가 있는 한 우린 죽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작가의 작품의 주된 모토인 '현실에 마주서기'의 자세가 잘 드러난다. 주인공이 마주치는 후송병원에서의 모순, 즉 의병 제대를 노리는 꾀병 환자, 거짓 파월 유족 수혜 환자, 병원 종사자 가족들에 대한 불법적인 특혜, 후송 특명을 따낸 군인들의 허위성, 비민주적인 군대 횡포, 군의관의 근무 태만 및 안일성, 사망서의 허위 작성 외에도 후송 병원 입원 환자의 절반이 허위로 작성된 민간인이라는 사실은 군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정황은 병원의 부조리를 자기 고향 선거구의 무질서 등에 연관짓는 병실 동료 김환석의 잡담으로 인해서 상황악(狀況惡)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이런 복합적 상황의 와중에서 인간 송문집은 고독하고 신랄한 투병 끝에 허무하게 죽어갔다.
작가는 문단에 데뷔한 이래 가장 관심을 많이 기울인 영역인 군대 조직과 같은 현대의 조직 메커니즘이 초래하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조직 메커니즘의 기계적인 억압에 항거하면서 전체 속에 처한 개인의 문제의식을 통해 그것의 위선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고발해 왔다.「히포크라테스 흉상」에서 보여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주체를 그 군대 현장에 밀착시키기를 포기한 채 그 시간 그 담당 직책만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드는 군의관들의 책임 회피와 같은 현상들은 군대 조직 속에서의 삶이란 결국 허위의 삶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근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군대 조직이란 그 배후의 존재하는 무형의 거대한 어떤 힘의 조작을 받고 있으므로 거기서는 아무도 개인의 주체를 밀착시킬 어떤 실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