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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양,유다 ㅣ 세계사 시인선 26
이연주 지음 / 세계사 / 1993년 3월
평점 :
품절
흔히 90년대를 여성시의 확립 시기라고 한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여성의 교육 기회 증대와 중간계급으로의 편입,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유입 등의 요인이 밑거름이 되어 90년대에는 많은 여성 시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당시 여성 시인들은 가부장제 중심사회의 제 모순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과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는 것의 두 가지의 양상을 보였다. 이들보다 뒷 세대의 시인들은 에코 페미니즘적 성향으로 여성성과 아울러 모성성을 새롭게 제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대에 데뷔한 여성시인들에게서는 이전의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피해의식을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여성이 살만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시선이 페미니즘에서 휴머니즘으로, 여성해방에서 남녀평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비평문에서 다룰 이연주는 이들 양상 중에서 '가부장제 중심사회의 제 모순을 비판'하는 양상을 보였다. 여성적 의미 생산은 일단 여성적 자리에서 남성적 담론들에 대한 해체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남성들은 여성을 자연과 죽음의 동의어로 보면서 육체라는 물질성만을 가진 존재로 취급했다. 여성은 자신의 초월을 위한 방해물이거나 혹은 내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수동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초월을 위해 딛거나 버리거나 해야만 했다.
이연주의 시는 위악적이다. 시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이 위악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여성은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내면의 목소리의 실존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자신이 삶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음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실재하는 내면의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자신의 현실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인이 느끼는 죽음은 단순한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매일 새로운 시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유기시켜버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녀의 유기된 몸, 육체는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날짐승에게 훼손되어 버린다. 몸을 유기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시인이 느끼는 것은 '지독한 냄새'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쉬기를 원한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기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위악적인 태도는 시인이 이 세상에서는, 이런 현실 속에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여성시의 경우, 그곳엔 여성적인 전체성만이 충만하다. 그곳에서 여성시인은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타자와의 차이가 무시되고, 대화가 증발하며, 신비주의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경계가 선험적으로 무시된 또 다른 가상의 동일자의 사랑이다. 이런 시들의 화자에겐 현실적 타자는 필요 없고, 어쩌면 자신의 육체도 필요 없다. 다만 자신만의 에로스의 공간, 항홀경이 필요할 뿐이다. 그 화자가 그려낸 세상은 여성이라는 이름의 밀도로 모든 아이들을 하나로 채워버린, 녹아버린 버터 속 같은 곳이다. 이런 시 속의 여성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외부에서만 살아 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언어로 영적 체험을 현재화하는 언어, 신비주의에 사로잡힌 여성적 제스처의 언어는 남성적 세계를 표면적이고 외부적으로만 극복한다.
이연주는 당당히 '유토피아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시인의 시는 '절망의 노래'인 것이다. 현실 속에서 유토피아는 단지 신기루일 뿐이다.
그녀의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찾지 못하고 죽음에서 찾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숨막히는 절망의 구조 속에서도 점점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던 다른 여성시인들과 달리 그녀는 왜 변하지 못하고 이승을 져버린 것일까. 남성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격렬하게 파헤치고 비판하던 90년대의 여성시인들 중에서 그녀는 남성의 사회에 편입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