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있었다. 4살짜리 꼬마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유도장을 찾았다. 84년 L.A올림픽에서 하형주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린 외할머니는 손자를 훌륭한 유도선수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유도가 뭔지도 몰랐던 아이는 노란색 유치원복 대신 도복을 입었다. 본격적으로 유도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겨우 9살 때였다. 다른 애들보다 유도입문이 훨씬 빨랐던 아이는 매일같이 유도매트에서 땀을 쏟았다. 갈수록 유도에 흥미를 느꼈다. 노력했는 데도 안 될 땐 자신에게 실망도 했다. 그러나 곧 극복해냈다. 유도의 매력에 풍덩 빠졌다. 올림픽 금메달을 가슴에 품었다. 아이는 어느덧 24살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지금은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태릉선수촌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아이의 이름은 권영우(남자유도 81kg급)다.

♦ 이 기회, 놓치고 싶지 않아요

지난 6월 16일 용인에서 있었던 아테네올림픽 최종선발전 81kg급 결승. 권영우는 종료 1분 47초 전 민성호를 호쾌한 업어치기 한판승으로 꺾은 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우승과 함께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국제대회보다 국내선발전이 더 어렵다'는 말처럼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고비는 1차 선발전. "그때 시합이 말렸어요. 김수경(용인대) 선수한테 졌을 땐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패자전이 남아있었지만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 "김석규(한양대) 감독님의 격려가 힘이 됐어요. 그래도 그때 3등을 해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것 같아요". 자신감을 회복한 권영우는 2,3차 선발전에서 모두 우승했다.

권영우를 비롯, 국가대표팀은 지난 20일 선수촌에 입촌했다. 일단 훈련조건은 '굿~!'이라고. 남자대표팀 권성세 감독과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 권 감독은 권영우의 보성중·고 시절 은사다. "선수들 마음을 너무 잘 아세요. 기술적인 면에서도 잘 가르쳐 주시구요". 실력 짱짱한 선배들도 든든한 존재다. 특히 보성고 동문인 장성호(100kg급)는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조언을 해준다. 난생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된 권영우의 각오는 아주 다부지다. "4년마다 한 번씩 있는 대회니까 기회 놓치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하고 있고 있어요. 꼭 금메달 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친구야, U-대회 기억나지?

"누구랑 닮은 것 같은데.." 권영우와 얘기를 나누면서 슬쩍슬쩍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코 앞에 두고서 괜히 엄한 사람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았군. 딩동댕~ 정답이다. 이원희 선수랑 닮았다! 척 보면 알겠지만 일단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똑같다. "같이 다니면 쌍둥이냐고 그래요. 하도 붙어 다니다 보니까 말투나 행동도 비슷해졌어요".(웃음) 권영우와 '한판승의 마술사' 이원희(73kg급)는 절친한 친구 사이. 두 사람은 보성중·고 동기동창인데다가 현재 실업팀(마사회)에서도 한솥밥을 먹고 있다. 물론 아테네 올림픽에도 동반출전 한다. 얼마나 좋을까. 어릴 적 옆집 살았던 애가 올림픽에 나간다는 말만 들어도 설레발 치며 좋아할 텐데, 중학교 때부터 유도장에서 동고동락해온 친구랑 같이 올림픽에 출전하니 말이다. "힘들 때마다 옆에서 격려해주고, 자세 잘못되면 고쳐주고 그래요". 두 사람은 서로 힘이 되어 주는 존재다. "원희는 어쩔 땐 제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독할 때가 있어요. 생활이나 운동 면에서 절제력도 강하구요". 두 사람은 서로 배울 점이 많은 친구이기도 하다.

두 사람에겐 잊을 수 없는 대회가 있다. 바로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권영우와 이원희는 이 대회에서 나란히 2관왕(단체전, 개인전)에 올랐다. 사실 두 사람은 '엇갈린 승부' 때문에 고민 깨나 했다. "이상하게 원희랑 같이 나가는 대회에서는 제가 1등 하면 원희가 못하고, 원희가 1등 하면 제가 못하고 그래요". 이어지는 권영우의 말. "이때도 제가 먼저 금메달을 땄었거든요. 근데 원희가 컨디션이 너무 안 좋다는 거에요. 걱정이 너무 많이 됐죠". 하지만 웬 걸. 이원희는 젼 경기를 한판승으로 장식하며 여유 있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오만 가지 기술을 다 써가면서 말이다. "정말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입가에 미소를 살포시 머금고 있던 권영우의 입이 어느새 귀에 걸려있다. "우리 뽕빨나게 한 번 해보자꾸나". 두 사람은 지난해 헝가리오픈과 U-대회에 이어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 번째 동반우승을 꿈꾼다.

♦ 부돌린은 없다

"남자 81kg급 결승. 이제 12초 남았습니다. 유효 1개로 뒤지고 있는 권영우 선수, 부돌린에게 자신의 주특기인 업어치기를 시도합니다. 아, 한판! 5,4,3,2,1. 금메달! 권영우 선수, 금메달입니다". 요즘 이런 상상을 자주 한다는 권영우. 그러나 절대 상상만은 아니다. 현재 남자 81kg급은 '절대 강자'가 없는 상황. 어떻게 보면 정상을 꿰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라이벌로는 에스토니아의 부돌린(2001세계선수권 준우승)과 독일의 위너(2003세계선수권 우승)를 꼽을 수 있어요". 요즘 비디오를 보면서 전력 탐색에 한창인 권영우는 나름대로 대비책을 강구해놓고 있다. "유럽선수들이 자주 구사하는 들어메치기는 초반에 체력소모가 많아요. 3분 정도만 잘 버틴 다음 후반에 승부를 걸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봐요". 다만 비디오를 봐도 '정답'이 안 나오는 부돌린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선배들한테 차근차근 물어봐야죠". 그러나 일본 국내선발전에서 추성훈을 꺾고 올림픽 티켓을 따낸 토노우치에 대해서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대학시절 교환경기도 많이 해봤고, 4월 한·일 합동 전지훈련(태릉선수촌)에서도 많이 잡아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파악이 된 상태에요". 한 가지 아쉽다면 추성훈이 탈락했다는 것. 권영우와 추성훈이 올림픽 결승에서 맞붙는다고 생각해보라. 상상만해도 멋지지 않은가. "저도 추성훈 선수가 출전하길 바랐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권영우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만약 포상금을 받게 되면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냉큼 "십일조 헌금을 낼 거"란다.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있는 세리머니도 '기도 세리머니'. 혹시 기도의 주내용이 '금메달 따게 해달라'는 게 아닐까. "아니요. 구체적으로 해야 들어주세요. 저는 기술을 달라고 해요. 무조건 금메달 따게 해달라고 하면 안 들어주시더라구요".(웃음) '가식없이 소탈한 순둥이', '생각 바르고, 진중한 멋쟁이', 권영우. 그런데 '아무리 봐도 괜찮은' 이 남자, 갑자기 핏대를 올리더니 단호하게 한 마디 한다. "TV에서 50일 남았다고 하니까 저희가 50일 '바짝' 해서 나가는 거라고 생각 하시는데요. 저희는 1년 넘게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 안 되면 진짜 죽는다는 각오로 하고 있습니다".

♦ 프로필

생년월일: 1981년 4월 10일 신장, 몸무게: 176cm, 84kg 출신교: 강동초-보성중-보성고-한양대-마사회 국가대표 경력: 2001년(대학교 2학년)부터 현재까지 주요대회 경력: 2001년 베이징유니버시아드 금메달, 2003년 헝가리오픈 금메달,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2관왕, 2003년 코리아오픈 금메달 가족관계: 부모님, 1남1녀 중 장남 종교: 기독교 별명: 권띵 취미: 음악감상 징크스: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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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영국의 조정선수 스티븐 레드그레이브입니다. 아마도 제 이름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듯 싶네요. 조정이라는 게 한국에서 그다지 활성화된 종목은 아니잖아요. 한 마디로 조정은 노를 저어서 먼저 도착하는 보트가 이기는 경기랍니다. 간단하죠?^^ 저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올림픽 5연패를 달성한 후 은퇴했고, 지금은 영국의 스포츠 외교관으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아테네 올림픽 성화봉송행사 땐 최종 점화자로 나서기도 했죠. 그래도 제가 누군 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럼 지금부터 제 얘기 해드릴게요.

'조정 신화'. 제 이름 앞에는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다니죠. 84년 L.A올림픽 유타포에서 처음 금메달을 딴 이후 2002년 시드니올림픽 무타포 우승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올림픽에서 5회 연속 정상에 올랐으니까요. 요즘도 집 거실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금메달을 보면서 혼자 배시시 웃곤 한답니다. 사실 어렸을 땐 멋모르고 노를 잡았죠. 하지만 금세 조정의 매력에 빠졌고, 16살 때 아예 학업을 마친 뒤 조정에 미쳐 지냈죠. 동료와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물살을 가를 때의 느낌, 결승선을 등진 채 노를 젓다가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짜릿함.. 아마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거에요. 평생 '노'와 함께 해온 인생. 그래서 저는 '영원한 조정인'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제가 선수로 출전한 마지막 올림픽이었죠. 또한 제게 5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대회이기도 했구요. 저희 팀은 시종일관 리드를 지켜나갔지만 이탈리아, 호주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죠. 마침내 상대팀의 거센 도전을 뿌리치고 1위로 골인한 순간, 가슴 저만치서부터 뭔가가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동료들(매튜 핀셋, 팀 포스터, 제임스 크락넬)과 뜨겁게 포옹을 했죠. 2위에 오른 이탈리아 선수들도 제게 다가와 축하의 인사말을 건네줬구요.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함께 그 황홀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금메달을 걸어줬더니 아들 녀석이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이 저한테 우르르 몰려와서 물었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도 출전하나요?" 저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어요. “이제 은퇴하고 다른 일을 찾아볼 거”라구요. 올림픽 5연패는 게레비치(헝가리)의 6회(32~60년) 연속 우승에는 금메달 한 개가 모자라는 기록이죠. 주변에서 기록을 깨볼 생각이 없냐고 했지만 저는 애초에 시드니 올림픽이 은퇴무대라고 생각하고 뛰었어요. 제가 처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게 84년 L.A대회니까 무려 18년 동안 정상을 고수한 셈이네요.^^ 솔직히 선수로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죠. 후배들한테도 길을 터줘야 했구요.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는 시드니 금멤버들이 또 한 번 일을 저질렀으면 좋겠네요.

영국에서도 조정은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죠. 훈련비가 없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은 적도 많구요. 하지만 '아, 조정하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훨씬 많았어요. 시드니 올림픽 영국팀 개,폐막식 기수는 조정선수가 모두 독식했죠. 개먁식에선 저의 동료인 매튜 핀셋이 깃발을 들었고, 폐막식에선 제가 영국 선수단을 대표해 올림픽주경기장을 당당히 행진했답니다. 92, 96년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나섰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군요. 설레이고, 가슴이 벅차올랐죠. 영국팀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80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올렸어요. 덕분에 전 엘리자베스 여왕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답니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죠.^^

사람들은 저를 가리켜 '위대한 올림픽언'이라고 합니다. 정말이지 저는 조정을 통해서 너무도 많은 걸 얻었어요. 명예, 부, 지위… 하지만 많은 분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도 있답니다. 지금의 영광 뒤에는 숱한 좌절과 실패가 있었다는 사실을.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후 저는 운동선수에게는 치명적인 당뇨병 진단을 받았죠. 30분 간격으로 혈당치를 체크하고, 매일 5~6회씩 인슐린 주사를 맞았어요. 주위에서 “이제 레드그레이브의 선수생명은 끝났다”고도 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당뇨 증세 때문에 훈련량을 모두 소화해내는 게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에 임했답니다. 보란 듯이 재기하고 싶었어요. 결국 이겨냈죠. 병마도 저의 굳은 의지를 꺾지 못했나 봅니다.

이쯤해서 제 동료인 매트 핀셋 얘기를 해야 겠군요. 핀셋과 처음 한 팀을 이룬 건 90년대 초반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앤디 홈즈와 짝꿍을 이뤘었죠. 홈즈와는 84, 88년 올림픽에서 함께 금메달을 일궈냈어요. 그야말로 '찰떡호흡'을 자랑했는데, 88년 올림픽 후 홈즈가 은퇴하자 저는 '짝 잃은 외기러기' 신세가 됐죠. 의욕을 잃어버린 저는 조정을 포기하고 봅슬레이 선수로 변신했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물을 떠나서 살 수 있겠어요. 그 다음 맞이한 파트너가 바로 핀셋이었어요. 저보다 훨씬 어린 핀셋과는 92, 96, 2000년 올림픽에 한 팀을 이뤄 출전해서 모두 금메달을 따냈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레드그레이브가 펠레라면 핀셋은 가린샤다'. 하지만 전 확신한답니다. 핀셋은 저를 뛰어넘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흔히 그런 말을 많이 하죠. '올림픽보다 세계선수권이 더 어렵다'구요. 저는 처음 출전했던 81세계선수권에서는 8위에 그쳤어요. 출발은 좋지 않았죠.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연습 뿐이었어요. 팔팔한 나이에 주위의 '달콤한 유혹'을 견뎌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오로지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노를 젓고 또 저었죠. 5년 여간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전 86세계선수권 유타페어에서 드디어 우승을 했답니다. 아, 그때의 감격이란!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죠.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97~99년 세계선수권 무타포어 3연패를 달성한 것을 비롯, 세계선수권에서만 총 9번 우승했답니다.

영화 제목도 있지만 흔히 '성공한 사람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죠. "올림픽 5연패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냐”는 질문에 굳이 답변을 한다면 '강한 정신력'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저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었죠. “만약 누군가가 나를 다시 조정경기장에서 본다면 총을 쏴도 좋다”고 하면서.^^ 하지만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시드니 올림픽에 나간 건, 물론 올림픽 5연패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제가 병마를 이겨내고 정상에 선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고맙게도 목표를 이뤘구요.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선수로서는 은퇴했지만 저는 영원히 조정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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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올림픽 금메달은 천운'이라고 한다. '금메달은 떼논 당상'이라고 할만큼 출중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이상하게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는 선수가 있다. 반면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참가했다가 덜컥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선수도 있다.

올림픽에서 불운했던 선수로는 우선 '인간새' 세르게이 부브카(장대높이뛰기)가 있다. 세계기록 35차례 경신, 세계선수권 6연패. 그의 삐까번쩍한 경력만 본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 3~4개쯤은 너끈히 땄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절대 아니다. 부브카가 4차례 올림픽에 출전해 목에 건 메달은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이 유일하다.

'불운'하면 여자육상 단거리 스타 게일 디버스도 빼놓을 수 없다. 디버스는 92, 96년 올림픽 100m 2연패를 달성했지만 사실 그녀의 주종목은 100m 허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올림픽 100m 허들에서는 무관에 그쳤다. 특히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m 허들에서는 계속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허들에 걸려 비틀거리는 바람에 5위에 그쳤다. 당시 그녀의 안타까운 눈빛을 어찌 잊으랴.

이 외에도 지독한 불운 때문에 눈물 뿌린 선수는 숱하게 많다. 하지만 '불운'하면 딱 오르는 선수 한 명이 있다. 바로 마라토너 도란도 피에트리(이탈리아)다. 1908년 런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경기. 가장 먼저 경기장 입구에 들어선 선수는 도란도였다. 경기장 1마일(약 1,600m) 앞에서 찰스 헤프론을 추월한 그는 줄곧 선두를 내달렸다. 그의 우승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 도란도가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는 계속 쓰러졌다. 보다 못한 심판들이 그를 일으켜 세워 골인점에 도착할 수 있도록 부축했다. 덕분에 도란도는 가장 먼저 결승선을 끊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2등으로 들어온 존 헤인즈(미국)는 “레이스 도중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며 강하게 어필했다. 결국 주최측은 헤인즈가 제기한 이의를 받아들여 도란도를 실격 처리 했고, 헤인즈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얼떨결에 금메달을 박탈당한 도란도는 심판들에게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도움 때문에 억울하게 실격된 그는 속으로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금메달은 빼앗겼지만 도란도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영국의 알렉산드라 여왕은 그에게 특별 제작한 골드컵을 수여했고, 위대한 작곡가 어빙 벌린도 직접 작곡한 노래를 그에게 헌정했다. 무엇보다도 일명 '도란도 금메달 강탈사건'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마라톤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로부터 96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도란도는 많은 사람들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어찌보면 도란도는 '비운의 선수'라기 보단 '마라톤 전도사'라는 별명이 더 잘 어울릴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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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KT 천안지점 임계숙입니다". 사전에 임계숙 씨가 근무하는 곳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전화를 건 거였지만 임계숙 씨가 직접 전화를 받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하마터면 "어머머, 하키선수 임계숙 씨세요?"라며 호들갑을 떨 뻔 했다. 지금 나이가 20대 후반 이상인 사람이라면 '임계숙'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여자 하키의 불모지였던 한국을 일약 하키 강국으로 변모시킨 한국 여자하키의 간판스타, 16년 선수생활 중 14년을 태극마크를 달고 뛰며 120골 이상을 넣은 세계 최고의 골게터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이제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고 있는 임계숙(41)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 88년 올림픽- 아쉬움은 없어요

여자하키팀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강훈련에 돌입했다. 목표는 금메달. 절대 욕심이 아니었다. 한국은 86년 아시안게임에서 인도, 파키스탄 등 강팀을 모두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한 터. 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이듬해 열린 각종 국제대회에서도 줄곧 3위권을 유지했다. 올림픽 출전국 중 호주를 제외하곤 다 이겨본 적이 있는 팀이었다. 더구나 우리의 홈그라운드에서 열리는 대회가 아닌가. '한 번 해보자' 16명의 여전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매서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필승의지를 다졌다. 88년 가을, 드디어 '붉은 땅벌'의 세계 정벌이 시작됐다.

9월 30일 여자하키 결승전이 열린 성남공설운동장은 3만 여 관중이 빼곡이 들어찼다. 한국과 금메달을 놓고 격돌한 팀은 예상대로 호주였다. 역시 호주는 강했다. 철저한 대인방어로 한국의 공격리듬을 뚝뚝 끊었다. 미드필드를 완전장악 해 한국의 주무기인 속공 플레이를 무력화 시켰다. 한국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아쉽게도 경기는 0-2 호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결승이라 부담이 좀 됐어요. 그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구요"(웃음) 하지만 은메달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단다. 오히려 짧았던 준비과정에 비하면 은메달도 대단한 성적이라는 자평. "결과에서는 졌지만 게임 내용에는 만족했어요. 무엇보다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었지요".

특히 예전 B조 마지막 경기였던 호주전은 명승부 중의 명승부로 꼽힌다. 3-4로 뒤진 채 후반전을 맞은 한국은 연거푸 2골을 넣으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종료 6분 전 동점골을 허용해 결국 경기는 5-5 무승부로 끝이 났다. 임계숙은 양 팀 통틀어 총 10골이 폭발한 이 경기에서 혼자서 3골을 책임졌다. 관중들도 일진일퇴의 '박 터지는' 공방전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경기 내용도 비슷비슷하고, 골도 많이 넣어서 참 재밌었죠". 뭇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준 이 경기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 훈련 또 훈련

임계숙에게 물었다. "하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고". 사실 '내 인생', '올림픽 은메달' 같은 대답이 나오겠지 싶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임계숙 왈. "박영조 감독님이요".^^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얼마나 훈련이 힘들었으면..' 순간 기자는 무릎을 탁 쳤다. '한국 여자하키의 힘이 바로 훈련에서 나오는 거구나'. 전후반 70분 동안 쉴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하키는 체력소모가 많은 운동이다. "유럽선수들은 부딪혀보면 남자처럼 단단해서 아파요". 덩치 좋고, 기운 센 유럽선수들과 대적하기 위해선 체력이 필수인 셈. 한국 여자하키팀은 체격, 체력에서의 열세를 끊임없는 훈련으로 커버했던 것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성남공설운동장을 뛰고 또 뛰었다. 발이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도 남한산성 로드워크는 계속됐다. "그냥 쓰러지고 싶었어요. 그럼 조금이라도 쉴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훈련이 고되고 힘들었다는 얘기다. 유난히 까만 피부와 근육질의 딴딴한 장딴지는 여자하키 선수들이 훈련을 통해 얻은 '훈장'인 셈이다.

♦ 92년 올림픽- 눈물 '펑펑'

"막상 손때 묻은 스틱을 놓아야 했을 땐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많았죠". '하키여왕' 임계숙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끝으로 16년간 정들었던 필드를 떠났다. 풋풋했던 소녀시절부터 '여인의 향기'가 물씬 나는 서른 무렵까지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하키. 지난날의 영광과 좌절과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하키와 '이별의 입맞춤'을 할 때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한국팀의 전력은 역대 최강.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한국은 4위에 머물렀다. 스페인과의 준결승에서 연장 2분 여를 남기고 뼈아픈 결승골을 허용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고, 3,4위전에서도 영국과 연장 접전 끝에 3-4로 패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워요". 90년 북경아시안게임 이후 은퇴를 결심했던 그가 다시 스틱을 잡은 것은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대회 직전 당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던 것도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별무대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29살 노장, 임계숙의 꿈은 와르르 무너졌다. "대회 끝나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당시 누구보다 진한 눈물을 펑펑 쏟아냈던,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버린 임계숙을 보면서 마음 숙연해 졌던 사람들도 있으리라. 임계숙은 '바르셀로나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은퇴했다. 하지만 은퇴한 후 그녀는 '레전드'가 되었다.

♦ 최선을 다해라

현역시절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에너자이저'를 연상시켰던 임계숙. '하키 부부'이기도 한 그는 어느덧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가 됐다. 혹시 아이들을 운동선수로 키울 생각은 없냐고 했더니 "안그래도 학교에서 자꾸 운동시키라고 난리에요"라며 웃는다. 마지막으로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 힘들게 올림픽 티켓을 땄다고 들었다"고 운을 땐 그는 "사실 하키는 메달 따고 못 따고의 차이가 많잖아요. 올림픽에서의 성적이 하키에 대한 관심과 발전으로 이어지니까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의 하키 여전사들이 또 한번 가슴을 후벼파는 감동을 선사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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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코마네치, 메리 루 레튼, 안드레아 라두칸, 스베틀라나 호르키나.. 모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체조요정들이다. 하지만 라비니아 밀로소비치(루마니아)를 빼놓고는 90년대 체조를 논할 수 없다. 비록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같은 메이저대회에서 개인종합 타이틀을 차지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특유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기로 전 세계 체조팬을 매료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루운동에서 보여준 만점 연기였다. 그 현장 속으로…

92년 8월 2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체조 종목별 결승전이 벌어진 상조르디 체육관. 밀로소비치(루마니아)의 마루연기가 끝난 뒤 점수판이 공개되자 관중석은 한순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10점 만점. 이미 뜀틀에서 공동우승을 차지한 밀로소비치는 마루운동 금메달로 2관왕이 확정되자 환하게 웃으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Perfect'! 그녀의 마루연기는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완벽했다. 다이내믹한 동작과 우아한 몸놀림의 환상적인 조화! 1분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쉴새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판타스틱한 묘기에 완전히 매혹됐다. 마루가 마치 놀이터 인양 신나게 뛰어다는 모습에 덩달아 흥이 났다. 왜 마루운동을 '여자체조의 꽃'이라고 하는 지 새삼 깨달았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의 이단평행봉 만점 연기를 봤던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혹자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올림픽에서 만점 연기 펼치는 선수들이 수두룩 한데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냐고". '무식이 통통 튀는' 그대를 면박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치지만 간신히 참는다. 물론 오도방정 떠는 이유가 다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체조 종목에서는 무려 42개(남자: 25개, 여자: 17개)의 만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실리바스(루마니아)와 슈슈노바(구소련)는 둘이 합쳐 총 15번의 만점연기를 선보였다. 물론 아무한테나 만점 주는 거 아니지만 너무 남발되다 보니 만점에 대한 값어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체조계는 고심 끝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만점 주는 걸 자제하겠다". 다시 말하면 "선수들이 만점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가 될 거라는 말이었다.

점수판에 '10'이 찍히는 순간의 환희를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된 선수들은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점 홍수'를 이뤘던 88년 올림픽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팬들도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밀로소비치는 당당히 만점을 받았던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너무도 완벽해서 만점 외에 다른 점수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만점 자제' 약속을 어기고 밀로소비치에게 10점을 준 심사위원들이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했던 말이다. 그후로는 세계체조연맹 공식대회에서 10점 만점이 나오지 않고 있다.

밀로소비치는 참 꾸준했다. 91~96년까지 6년간 벌어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전한 선수는 그녀가 유일했다. 게다가 참 잘했다. 올림픽에서 2회 연속 개인종합 메달(92, 96년 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건 코마네치 이후 그녀가 처음이었다.

"나의 목표는 올림픽 메달이다. 색깔은 상관없다. 사람들은 25년 전 세계선수권 챔피언은 모르지만 100년 전 올림픽 챔피언은 기억한다". 2번의 올림픽에서 금2, 은1, 동 3개를 목에 건 밀로소비치. 기자랑 동갑이라서 더 정이 가고, 맷 데이먼(영화배우)이랑 웃는 모습이 닮아서 더 좋은 그녀는 위대한 체조선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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