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짜릿한 승부였다. 4년 전, 시드니 올림픽 남자육상 1만m 결승.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았을 때까지도 승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골인지점을 몇 미터 앞두고 하일레 게브리셀라시에(에티오피아)가 폴 터갓(케냐)을 앞질렀고, 가장 먼저 결승점을 밟았다. 간발의 차였다. 진짜 아슬아슬했다.

힘겹게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게브리셀라시에는 시상대에서 이를 다 드러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에티오피아는 환호성으로 물결쳤다. '언젠간 나도 저 자리에 서리라'. 그 순간 가슴 졸이며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18세 에티오피아 소년 케네니사 베켈레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제 그 꿈을 이루려 한다.

하일레 게브비셀라시에를 잇는 남자 장거리의 간판스타, 베켈레(22). 그는 아테네 올림픽 5천m, 1만m 두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실 두 종목 모두 출전하기로 마음먹기까지는 갈등과 고민이 많았다. 물론 이미 경험이 있긴 하다. 그는 지난해 파리세계선수권에서 10만m 금메달, 5천m 동메달을 땄다. 하지만 올림픽은 세계선수권과는 차원이 또 다르다.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대회. 경쟁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게 뻔하고, 아테네의 '살인더위'도 염려된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지만 또 한편으론 자신감이 울끈불끈 솟는다. 그도 그럴 것이 베켈레는 5천m, 1만m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량은 최절정기를 맞고 있다. 기록 경신 속도는 놀랍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다.

지난 6월 1일 베켈레는 육상그랑프리 FBK게임(네덜란드, 헹겔로) 5천m에서 12분37초37로 세계기신기록을 세웠다. 6년 전 게브리셀레시에가 수립한 종전기록을 2초 이상 앞당긴 것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8일 후에는 1만m 세계기록도 갈아치웠다. 6월 9일 슈퍼그랑프리 골든스파이크대회(체코 오스트라바) 남자 1만m 결승. 그는 26분20초31을 기록, 또 다시 게브리셀라시에의 세계기록(26분22초75초)를 깨뜨렸다. 이 역시 6년 만이었다.

베켈레가 5천m에서 세계기록을 세우자 게브리셀라시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곳(헹겔로)은 내가 10년 전 5천m 첫 세계기록을 세웠던 장소다. 이 곳에서 팀동료인 베켈레의 아름다운 질주를 보게 돼서 너무 기쁘다. 나는 베켈레가 너무 자랑스럽다". 이제 그는 자신의 우상인 게브리셀라시에를 뛰어넘으려 한다.

"올림픽 후 결혼할 내 피앙세에게 금메달을 바치겠다". 베켈레가 금메달을 따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연 올림픽 2관왕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그의 찬란한 미래는 아테네 올림픽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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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재연한 개막식 식전행사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자 가슴 뭉클한 역사의 현장이 아테네올림픽 개막식에서 재연됐다. '신들의 도시' 아테네에서 열리는 올림픽답게 개막식은 그리스 문명과 인류의 발전상을 한 눈에 보여주는 대서사시로 꾸며진 것.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바다의 신' 페가수스, '태양의 신' 아폴로를 비롯해 제우스, 에로스, 헤라, 니케, 갑옷을 입은 병정까지 금방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이 아테네올림픽의 개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한국축구, 반세기 8강 염원 성취

올림픽 축구 사상 첫 조별예선 통과와 56년만의 8강 진출 등 한국축구가 이번 대회를 통해 이룬 업적은 대단하다는 평가. 한국은 조별예선 1차전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무승부, 다소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멕시코전에서 1승을 올려 8강 진출 가능성을 높였고, 말리와는 극적인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8강 테이프를 끊었다.

그러나 세계의 벽에 도전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했던 대회이기도 했다. 선수들의 개인능력 뿐만 아니라 전술 이해능력이나 작전 소화능력에서도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미흡한 모습을 보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렀던 말리, 8강전 상대 파라과이가 이번 대회에서 상대팀에 따라 포백, 스리백 등 상대에 따라 다양한 전술을 펼치는 데 비해 한국의 전술은 너무나 단순했다.

일, 중 도약...미, 러시아 쇠퇴

미국-러시아의 스포츠 양강 체제가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 반면 중국과 호주의 강세와 일본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이후 종합순위 1,2위를 나눠 가졌던 미국과 러시아는 스포츠 강국의 면모는 유지했지만 예전처럼 다른 나라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미국은 수영(12개)과 육상(8개)에서 20개의 금메달을 가져갔지만 금메달 수가 30개를 겨우 넘는 수준. 특히 믿었던 여자육상에서 단 2개의 금메달에 그친 것이 부진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러시아는 더욱 심각하다. 수영 경영과 기계체조는 노메달. 종합순위도 3위로 내려앉았다.

반면 중국은 당초 목표(금메달 20개, 종합순위 3위)를 초과달성하며 러시아를 추월해 미국을 위협하는 스포츠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대회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의 1위 질주를 '탓잔 속 태풍'이라고 폄하하는 시각이 많았던 것이 사실. 그러나 중국은 사격, 역도, 다이빙 등 전통적인 강세종목 뿐만 아니라 카누, 테니스, 육상 등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각 종목에서 고른 기량을 과시했다.

일본의 선전도 눈부시다. 유도(금8 은2개)가 효자종목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기초종목에서 도 뚜렷한 강세를 보였다. 기타지마 고스케가 남자수영 2관왕에 오르는 등 수영에서 금메달 3개를 수확해냈고, 육상 여자마라톤에 출전한 미즈키 노구치도 아테네의 폭염을 뚫고 우승했다. 일본이 기초종목에서 이 같은 결실을 맺은 것은 과학전인 훈련시스템과 아낌없는 투자 덕분.

아테네 뜬 별

수많은 별들이 뜨고 지는 올림픽.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난히 반짝반짝 빛난 별들이 있다. 단연 돋보이는 스타는 '수영신동' 마이클 펠프스(미국). 당초 목표로 했던 8관왕의 꿈은 무산됐지만 6관왕에 오르며 이번 대회 최다관왕에 등극했다. 나머지 자유형 200m와 계영 800m에서도 동메달을 보태 단일 올림픽 최다 메달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연일 이변이 속출했던 육상 트랙에서도 스타탄생이 이어졌다. 22세의 신예 게이틀린은 남자 100m에서 9.85의 기록으로 프란시스 아비크웰루(9.86), 모리스 그린(9.87) 등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공인받았다. 여자 100m에 출전한 리야 네스테렌코(벨로루시)도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먄들며 '무명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육상스타 히참 엘 게루즈도 빼놓을 수 없다. 게루즈는 중거리인 1,500m와 장거리인 5,000m를 동시에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두 종목을 동시에 석권한 것은 1924년 파리올림픽의 파보 누르미(핀란드) 이후 8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5,000m에서는 10,000m 우승자이자 5,0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케네시아 베켈레(에티오피다)를 꺾어 더욱 값졌다. '중거리 제왕'이 진정한 트랙의 지존으로 우뚝 선 것이다. 루마니아의 17세 소녀 카탈리나 포노르는 새로운 체조여왕으로 등극했다. 포노르는 단체전 금메달에 이어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도 금빛 연기를 선보이며 3관왕에 올랐다. 체조경기장이 연일 오심과 항의로 얼룩졌지만 포노르는 침착함과 대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100% 발휘했다.

비운의 스타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바로 이 선수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대표적인 선수는 '마라톤 여제' 폴라 래드클리프(영국).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인 래드클리프는 아테네의 살인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여자 마라톤 36km지점에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던 래드클리프는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1만m 출전을 강행했지만 9바퀴를 남기고 포기,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일본 남자유도의 자존심 이노우에 고세이(100kg급)도 불운에 울었다. 사실 이노우에는 우승여부 보다 전 경기를 한판승으로 이기고 금메달을 따느냐가 더 큰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8강전에서 허무하게 낙마하고 말았다. 아무도 예상 못한 결과였다. "이노우에와 꼭 한 번 붙고 싶었다"는 장성호(100kg급 은메달리스트)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한 채 말이다. 그 순간 일본 관중석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였다.

러시아의 체조요정 스베틀라나 호르키나도 쓸쓸히 퇴장했다. 개인종합에서 미국의 칼리 패터슨에 1위를 내주며 2위에 그쳤을 때만해도 호르키나는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올림픽 개인종합 우승은 물 건너 갔지만 그녀에게는 이단평행봉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믿었던 탓일까. 호르키나는 이단평행봉 결승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며 출전자 8명 가운데 최하위에 그쳤다. 올림픽 이단평행봉 3연패의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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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배구 '추억의 올스타전'이 열린다. 고려증권 OB팀과 통합 OB팀간의 '꿈의 대결'이 펼쳐지는 것. 특히 98년 팀 해체 이후 6년만에 다시 뭉친 고려증권 선수들은 일주일에 세 차례 모여 맹연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지라 예전만큼 점프도 잘 안되고, 마음만큼 몸도 안 따라 주지만 무슨 상관이랴. 올드팬이라면 추억의 스타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에 매일밤 잠 못 이루지 않을까.

"김호철 토스하고, 강만수 공격하는 것도 보고 싶고, 이쪽에서는 장윤창 스파이크 하는 거. 돌고래 타법, 그게 얼마나 멋졌는데. 정의탁 개인시간차도 보고 싶구요."

그런데 선수들과 팬들 못지 않게 '추억의 올스타전'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배구중계의 대명사' 유수호(58) 아나운서다.

"그 양반이랑 하면 세상 편하지"

"배구 중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콤비는?"

학창시절, 백구의대제전(현 슈퍼리그 전신)과 함께 주말 오후를 만끽한 기억이 있다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오관영(성결대 교수)-유수호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오-유 콤비는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 유수호 아나운서와 구수한 입담이 일품이었던 오관영 해설위원은 찰떡 호흡을 자랑했다.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춘 건 80년 라디오 중계였다. 그리고 나서 9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18년 동안 같이 했으니까 '배구중계=오관영-유수호'라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이 콤비 중의 한 명인 유수호 아나운서를 만났다.

사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는 훨씬 더 오래됐다고 한다. 70년에 처음 안면을 텄으니 '30년 지기'다. 나이로는 9살 차이가 나지만(오관영 교수가 윗사람이다) 죽이 잘 맞는 '술친구'였고, 평상시에는 형님, 아우처럼 격의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원체 친하기도 했지만 중계할 때 두 사람 모두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타협형'이라서 호흡이 척척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송에는 안 나갔지만 처음에는 중계하다가 싸운 적도 있다고 한다.

"제가 "이거 이건 뭐 아닙니까"라고 하면 동조를 해줘야 되는데 "아니다"라고 나와요. 그럼 싸우는 거예요. 일단 제가 주(主)니까 강하게 나가면 슬쩍 피해서 가고, 자기 의견하고 다르면 대답 안 하고. 그런 적도 좀 있었어요."(웃음)

하지만 좀 지나고 난 후에는 '척 하면 착'이라서 싸울 일도 없고,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 재밌게 했어요. 근데 오관영씨가 내용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의견에 반대하는 게, 경기를 그렇게 흥미롭고, 재밌게 해주는 건 그 양반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고려증권 팬이라면 오관영씨가 해설할 때 유독 고려증권을 심하게 다그치고, 호되게 야단치곤 했던 것에 대해 다소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법도 한데 사실은 그게 다 '작전'이었다는 걸 아는가.

오관영씨는 고려증권 팀을 만든 주인공으로 단장을 역임했었다. 아무래도 고려증권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반대로 했다고 한다.

"고려증권이랑 현대가 결승전에서 붙으면 오관영 씨는 자기도 모르게 고려증권 편들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제가 그래요. "나는 고려증권 편든다. 오 선배는 현대 편을 드시오." 짜고 들어가. 그럼 중립이 되잖아요. 오관영씨가 팀 책임자니까 잘 하면 그냥 내버려두는데 못하면 또 화를 내요. "저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그러면 제가 고려증권 편을 들어주면서 균형을 맞추는 거죠."(웃음)

2월 15일에 열리는 '추억의 올스타전'에서 오관영-유수호 콤비의 감칠맛 나는 중계를 다시 듣고픈 사람이 어디 기자 한 사람 뿐이랴.

"드디어 일본을 꺾었습니다"

유수호 아나운서가 처음 배구중계를 시작한 것은 79년이었다. 69년 TBC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71년부터 고교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60년대 당시 배구로 유명했던 학교(덕수상고)를 나온 덕분에 배구중계 마이크도 함께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배구 중계를 해왔지만 '가장 기억나는 경기'를 말할 때 항상 첫 손가락에 꼽는 경기가 있다. 바로 79년 바레인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다.

이 대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대회였다. 우선 유수호 아나운서의 배구 중계 데뷔 무대였고,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남자 배구가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격파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일본에 두 세트를 먼저 내주고, 3세트를 내리 따내면서 통쾌한 역전승을 거뒀다.

"바레인 체육관이 거의 울음 바다였어요. 그때 한창 중동에 건설붐이 일 때라서 우리 게임 있을 때면 한국 사람들이 최소 1천 명씩 왔어요. 그날은 건설 현장 다 노는 거예요. 체육관이 거의 한국 응원단으로 꽉 들어찼어요. 그런데 일본을 이겼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어요."

그 당시 국제대회는 민·관 합동중계방송을 했었다. 아나운서는 KBS에서 무조건 한 사람, 나머지 4개(TBC, 문화방송, 동아방송, 기독교방송) 방송사에서 돌아가면서 한 명씩 갔는데, 마침 TBC 차례였다. 유수호 아나운서에게 기회가 왔다. 또한 그때만 해도 아나운서가 한 세트씩 바꿔가면서 중계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운 좋게도 5세트는 유수호 아나운서 순서. 덕분에 감격적인 순간을 국민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1시 무렵이었는데, 중동 지역에 우리 나라 방송단이 최초로 가서 중계를 한 거였어요. 다 들었죠. 눈물도 참 많이 흘렸어요. 이기고 나서 해설가가 막 우는 거예요. "드디어 이겼습니다." 마무리 하면서 같이 울어야지 어떡해. 저는 엉엉 울 수는 없으니까 계속 울먹거렸어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경기로는 한·일전을 든다. 배구가 한창 인기 절정이었을 무렵, 1만 명의 관중들이 잠실학생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경기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데 1만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애국가를 따라부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나는 외국 선수는 누구일까?

"나까가이치죠. 나까가이치는 뻔히 알면서도 못 막았어요. 후위에 갔다 그러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백어택 준비하고 있어요. 걔는 수비 절대 안 해요. 바로 앞에 와도 도망가. 옆에 놈이 받아주지. 그럼 백어택을 하는 거야. 나중엔 체력이 달려서 점프를 못해서 잡았지만 그 놈 전성기 때는 아무도 못 막았지."

"10분이면 끝납니다"

중계 방송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참 많이 생긴다. 특히 스포츠는 시시각각 경기 양상이 바뀌고, 승부를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베테랑인 유수호 아나운서도 예외는 아니다. 중계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참 많다.

시청자들이 중계 방송 보다가 가장 김빠질 때는 박빙의 순간, 한참 손에 땀을 쥐어가며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나운서로부터 이런 멘트가 흘러나올 때다.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경기 결과는 스포츠뉴스 시간에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때마다 시청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손바닥에 '참을 인'자를 새기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지만 한 번 난 화를 누그러 뜨리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어디 시청자들만 답답하랴. 중계하는 입장에서도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기는 마찬가지다. 승패의 갈림길,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울까. 유수호 아나운서는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공개했다.

"예전에는 정규 방송 시간이 5시였잖아요. 4시 50분, 풀세트 간다 그러면 의도적으로 그래요. "5세트는 15점제이니까 10분이면 끝납니다. 10분." 그럼 편성팀에서 5분만 연장해 주면 되겠냐 방법을 찾자 그래요. 그렇게 해서 끝까지 중계한 적도 있어요. 기분 좋지. 그 다음엔 "경기 끝났습니다." 바로 이름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저도 불만이 그거예요. 중간에 끊었으면 제발 자막이라도 넣어달라."(웃음)

유수호 아나운서는 중계방송 할 때 조심해야될 사항 두 가지를 알려준다. 우선 선수들의 기량이나 감독의 작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 것. 왜냐하면 중계방송은 파급 효과가 엄청 나서 함부로 말했다간 본의 아니게 선수나 감독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점수차가 많이 나더라도 '어느 팀이 이겼다'고 앞질러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일방적인 경기에서 승패가 뒤집히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고려증권이 믿기 어려운 '뒤집기쇼'를 곧잘 연출했었고, 91년 독일월드컵 한·독전에서도 5세트에서 11-14로 지다가 역전시킨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은가.

요즘처럼 남자부, 여자부 모두 독주체제일 때는 특히 아나운서의 역할이 중요할 듯 싶다. 유수호 아나운서에게는 재미 없는 경기도 재밌는 것처럼 중계하는 나름의 비법이 있다.

"예전에 서브권제였을 때는 15-0 게임 중계도 몇 번 해봤어요. 그때는 재미없다고 안 해요. 간단해요. 한 점을 나느냐, 한 점 나면 마치 그 팀이 이긴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한 점 났습니다' 그러는 거죠."(웃음)

스포츠 캐스터 계보 잇고파

"종목 중계는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이 했을 거예요. 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17개까지 했고, 86년 아시안게임부터는 2년마다 아시안게임, 올림픽은 빼놓지 않고 다 했어요."

그래서 가끔씩 '스파이크' 해야 되는데 '스매싱'하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용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던 적도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생소한 종목을 중계할 때면 마치 '비인기종목 전도사'가 된 것 같아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중계하면서 눈물 날 뻔한 적은 숱하게 많다. 그 중에서도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땄을 때, 당연히 진다고 생각했는데 이겼을 때가 가장 감격스럽다. 특히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에서 여갑순이 우리 나라 대회 1호 금메달을 땄을 때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김영호가 펜싱 금메달을 확정짓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한다.

"그때는 정말 목이 메이는데 전 그걸 피하지 않아요. 그냥 울먹이면서 방송해요. 감격적인 순간에 논리정연, 침착함을 유지한다는 건 말이 안 돼죠. 그래야 듣는 사람들도 같이 울고요. 국제대회인데 편드는 건 당연하지."

그렇다면 사전에 감동적인 멘트를 준비할까.

"88서울올림픽 때 탁구에서 유남규(남자단식), 양영자-현정화(여자복식) 조가 금메달 땄을 때 중계를 다 했어요. 그땐 감격적인 멘트를 미리 준비했었어요. 근데 녹화해 놓은 걸 보니까 미사여구는 좋은데 왠지 흥이 안 나더라구요. 그 후로는 말이 엉키든 씹히든 무조건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해요. 신기한 건 나중에 들어보면 '준비도 안 했는데 내 입에서 어떻게 저렇게 좋은 얘기가 나오지' 싶을 정도로 술술술…."(웃음)

유수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세월이 비껴간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낭랑한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스포츠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보낸 것이 어느덧 반 평생.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친숙한 목소리로 우리 곁에서 때로는 감격의 순간을, 때로는 안타까운 순간을 전해주고 있는 유수호 아나운서도 내년(9월)이면 정년을 맞는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심혈을 기울일 마지막 대회가 될 거"라고 말하는 유수호 아나운서는 "앞으로 어떤 스포츠 캐스터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그 전까지 시원시원하게 답변하던 것과는 달리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직나직 말을 잇는다.

"그동안 '스포츠' 한 우물을 팠고, 제 천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바란다면 스포츠 캐스터 계보를 잇고 싶고, 어느 방송이 됐든 앞으로도 계속 목소리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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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한 미술관 옆에 자리한 멋들어진 기와집. 금방이라도 갓 쓰고, 턱수염 늘어뜨린 훈장 선생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휘적휘적 걸어나올 것 같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그러나 그곳엔 훈장도 없고, 천자문 외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올 뿐.

도무지 씨름단 숙소로는 보이지 않았던 터라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반갑게도 빅 사이즈 운동화가 빼곡이 들어찬 신발장이 기자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잠시 후 황규연(30·신창건설)이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덕분에 1시간 가량 '미술관 옆 숙소'에서 낭만적인(?)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2001천하장사대회 vs 2003천하장사대회

2003년은 황규연과 '궁합'이 잘 맞지 않은 한 해였다. 97년 이후 매년 빠짐없이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유독 이 해만은 '무관'에 그쳤다. 2002년 8월 올스타 장사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니까 꽃가마 타본 지도 꽤 됐다.

하지만 황규연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만든 것은 2003천하장사대회였다. 98년부터 천하장사대회 '단골손님'이었던 황규연은 이 대회에서 16강 예선탈락했다. 당시 이성원(LG)이 금강급 선수로는 19년 여만에 천하장사대회 8강에 진입, 모래판이 떠들썩했는데, '대이변'의 희생양이 다름 아닌 황규연이었던 것이다.

사실 팀의 기둥 선수라는 책임감에 출전은 했지만 대회 전 연습 도중 부상을 입어 제 켠디션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황규연은 몇 년째 부상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001년 3월, 훈련 도중 허리 부상(척추분리증)을 당했는데, 연습하다보면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겠지 싶었다. 하지만 웬걸. 다음날 아파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 뿐인가. 어째 요 놈이 거머리마냥 착 달라붙어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안한더란다. 쿡쿡 찌르고, 콕콕 쑤셔대는 것이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수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재활에 온 힘을 쏟는 수밖에.

반면 2001년은 황규연과 아주 좋은 '금실'을 자랑했다. 6월 광양 지역장사, 10월 영암 백두장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황규연은 마침내 난생 처음 천하장사에 등극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결승전에서는 김영현과 맞붙었다. 2-2 상황. 결국 21세기 첫 천하장사의 향방은 다섯 번째 판에서 가려졌다. 두 선수는 거의 동시에 떨어졌는데 주심은 지체없이 황규연의 손을 들어줬다.

자신의 승리가 선언되자 황규연은 눈물과 모래로 뒤범벅된 채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흐느끼다가 나중엔 아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펑펑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운동 시작한 후 처음 천하장사가 됐고, 그동안 힘들었던 것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아주 팅팅 부었어요. 계속 우니까 나중에 총재님이 그래요. '그만 울어라. 텔레비전에 나간다'(웃음)."

게다가 신봉민(8강), 이태현(4강), 김영현(결승) 등 한 가닥하는 선수들을 죄다 꺾고 거머쥔 우승이기에 더욱 값진 승리로 기억된다.

"그때는 생각지도 않게 게임이 잘 풀렸어요. 경기하는 날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음날 되니까 '아, 내가 전 천하장사들을 다 이겼구나' 싶더라구요."

반짝반짝 빛나는 씨름판의 보석, 황규연

그의 귀공자풍 외모만 보고, 그동안 거둔 화려한 성적만 보고 황규연이 탄탄대로를 달려왔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따지고 보면 민속씨름판에서 그만큼 쓴 맛, 단 맛 다 본 선수도 드물다.

황규연은 95년 10월 당시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고 세경진흥에 입단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맛봤고, 그후로도 이런 저런 이유로 현대, 삼익 캐피탈, 신창건설 등으로 옮겨 다녔다.

좀 할 만하면 보따리 싸고, 좀 적응됐다 싶으면 다른 팀으로 이적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렸으니 성적은 둘째 치고라도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듯 싶다.

"당시엔 정말 정신 없었죠. 운동을 그만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던 거 같아요. 왜냐하면 한 팀에 오래 있으면 조금 나태해졌을 수도 있고, 여러 팀 거치면서 다양한 훈련 방법과 감독님을 접할 수 있었거든요."

황규연의 신체 사이즈는 187cm, 136kg. 백두급에서는 정민혁, 원종수 선수 정도를 제외하고는 체구가 가장 작다. 하지만 허리가 아파서 무작정 체중을 늘릴 수도 없는 처지. 그러니 150kg 넘는 선수들이 득시글한 요즘, 불리한 체격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신체 조건 때문에 밀리면 정말 회의를 느껴요. 체구가 비슷하면 '내가 좀 안 되는구나' '기술로 졌구나' 싶을 텐데 원체 217cm, 160kg이러니까.'(웃음)"

그렇다고 남들처럼 힘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다만 황규연에게는 그만의 무기가 있다. 바로 유연성과 기술. 이만기(KBS 해설가)씨가 황규연만 나오면 으레 하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허리를 갖고 있는 선수에요."

"남들보다 제가 유연하다는 느낌은 갖고 있어요. 근데 유연성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이 받쳐줬을 때 발휘되는 거지 암만 유연해도 힘이 없으면 안 되요."

유연성 말고도 황규연은 '기술 씨름의 달인'으로 불릴 정도로 구사하는 기술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에이, 기술 씨름의 달인은 아니구요. 왜냐하면 한라급, 금강급 가면 화려하고 멋진 기술 쓰는 선수가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기술이 좋은 게 아니라 남들이 그걸 못하니까 그런 거지. 다 크고 그러니까 기술이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는데 저는 좀 작으니까 활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이적의 설움, 신체 조건 상의 불리함,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타고난 유연성과 다양한 기술로 극복해낸 황규연은 그야말로 민속 씨름판의 '보석'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냥 묵묵히 제 할 일 하면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요"

요즘 '스포츠 얼짱'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씨름은 예로부터 미남선수가 많기로 유명한데, 황규연도 그 계보를 잇는 선수다. 살포시 미소를 머금을 때마다 양 볼에 푹 패이는 보조개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 앞에는 '모래판의 귀공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몇 년 전 씨름장 장내 아나운서가 지어준 별명이라고 하는데, 본인도 썩 마음에 드는 눈치다.

'노랑머리'하면 한때 '노랑머리'였던 백승일이나 지금의 최홍만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기자는 황규연이 떠오른다. 비록 '전통 스포츠에 노랑머리가 웬 말이냐?'는 총재의 불호령(?)에 금방 검정머리로 원상복귀시켰지만, 황규연의 '노랑머리'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무엇보다도 잘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보수적이던 씨름판도 몇 년 새 많이 변했다. 요즘은 개성 있는 머리 스타일과 독특한 세리모니를 오히려 적극 권장하는 추세다. 특히 신인 선수 최홍만은 덩치와는 달리 앙증맞은'테크노춤 세레모니'로 큰 호응을 얻었다.

"저도 그런 주문을 많이 받아요. 근데 성격 탓인지 잘 안돼요. 이젠 나이도 있고…. 물론 그런 걸로 인식되는 것도 좋지만 전 그냥 무덤덤하게 제 할 일 하면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요."

2004년은 황규연 '부활의 해'

오는 21일부터 이틀간 장충체육관에서 2004년 마수걸이 대회인 설날장사대회가 열린다. 99년 설날대회에서 장사를 차지했던 황규연은 5년만에 이 대회 정상을 노린다.

사실 2003 설날장대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였다. 판정시비 끝에 8강전에서 김동욱에게 1-2로 아깝게 졌던 것. 그렇게 지고 나면 허무하기도 하고, 내심 억울한 마음도 들지 않았을까.

"에이, 졌으니까 변명은 못하구요. 어차피 어느 스포츠나 오판은 있거든요. 그리고 씨름은 다른 스포츠보다 눈으로 감지하기가 힘들어요. 지면 바로 위에서 승부가 뒤집어지는 경우도 허다하거든요. 뭐 어쩌겠어요. 이길려면 더 열심히 해서 확실히 처박고, 안 그러면 암말 안 하고 있어야지.(웃음)."

황규연은 지난 한 해, 부상과 씨름하느라 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다. 올 시즌 첫 대회를 앞두고 각오를 들어봤다.

"작년에는 부상 때문에 겨우 겨우 시합장에 나와서 시합하고 그랬는데, 몸이 괜찮아지고 있거든요. 일단 성적을 내야죠. 운동 선수는 결과인 거 같아요. 좋은 결과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씨름판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17년.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씨름 생각만 하며 부지런히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선수로서 책임감이 앞서는 고참급이 됐다.

예전에 황규연에게는 '번외 대회의 강자'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녔다. 유독 번외대회(97, 98, 2002 올스타장사, 99설날장사, 2000백제장사)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들이 신경 별로 안 쓰는 번외 대회조차 소홀히 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영광스런 칭호가 아닐까 싶다.

어릴적 우상이었던 이만기(인제대 시절), 이준희(신창건설)씨한테서 모두 가르침을 받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씨름 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다'는 '억세게 행복한 사나이', 독서(요즘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재밌게 읽었다)와 스노우 보드를 즐기는 '미지의 사나이' 황규연.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는 사람들 식상하지 않게 앞으로 잘하는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지금보다 팀이 늘었으면 좋겠어요."

듬직한 체구만큼이나 우렁찬 웃음 소리가 인상적인 황규연. 언제나 묵묵히 씨름 인생을 꾸려 나가는, 10년을 한결 같이 우리 곁에 머물면서 씨름의 묘미를 한껏 선사해 주는 황규연. 10년 후쯤에는 지도자로 활약하는 모습을 모래판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늘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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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KT&G 여자배구단 체육관에서는 전지훈련 차 방문한 일본 도레이 팀과 KT&G와의 친선게임이 열렸다. 코트에서는 양팀 선수들이 한창 몸풀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체육관 한 켠에서 코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선수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최광희였다.

최광희(KT&G·30)는 얼마전 일본에서 개최됐던 여자배구 월드컵(11월 1일~11월 15일) 폐막 전날인 14일, 폴란드전에서 3세트 초반, 리시브 하는 도중 양쪽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부상으로 교체된 뒤 무릎에 붕대를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최광희의 모습이 TV중계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히기도 했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듯했다.

이번 대회는 1~3위 입상팀에게 2004아테네 올림픽 본선 직행티켓이 주어지는 중요한 대회였다. 우리나라는 직행티켓은 고사하고 12개 출전국 중 최종순위 9위(3승8패)에 그쳤다. 95년 5위, 99년 4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실망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풀세트까지 가서 진 경기도 많았고, 월드컵에서 성적이 이렇게 저조한 경우도 이번이 처음이라서 아쉬움이 커요. 준비기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풀세트 경기는 승리해서 지금보다는 성적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이번 대회는 보름 동안 각 팀당 11게임을 소화해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보다 우리가 부진했던 가장 큰 원인은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전국체전(10월 11일~10월 16일), 실업대제전(10월 21일~10월 26일)이 끝나고 난 뒤 다음날 바로 일본으로 출국했기 때문에 선수간에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4일에 불과했다.

"국내볼이랑 국제볼이랑 볼도 달라요. 볼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2~3주정도 지나야 되는데, 선수들이 다 피로한 상태니까 체력 소모도 컸고, 볼적응도 늦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 대회 막바지에 가서는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 따지고 보면 최광희의 부상도 준비기간 부족 탓이 크다. 체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부상도 입기 쉬우니까 말이다. 또한 세 차례의 풀세트 경기(미국, 일본, 쿠바전)를 모두 내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올해 4월부터 대표팀 완장을 차고 있는 최광희로서는 더욱 아쉬움이 크다. 사실 그녀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쉴 틈이 없었다. 국내경기건 국제경기건 자신을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묵직한 스파이크를 때려대고, 코트에 부지런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오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힘들어도 어디서든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감사해요. 근데 이번처럼 성적도 안 나고, 다치기까지 했을 때는 정말 의욕이 상실돼요. 힘들어도 성적이 좀 나고, 주위에서 '수고했다', '잘했다' 이런 말 들으면 보람도 있고, 극복하기 쉬울텐데…."

체력도 달렸지만 정신적으로도 무척 피곤하고 힘든 대회였다고 고백한다.

"보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저런 미스를 할까' 말을 하지만 하는 사람들도 너무 속상하고 답답한 거예요. 이렇게밖에 못하니까. 더구나 국내에서 혹평을 들었을 땐 사기저하 되고, 코트에 서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어찌보면 1라운드 첫 경기였던 미국전부터 어긋났다. 세트 스코어 2-3(21:25 19:25 25:21 25:22 13:15)으로 패했던 미국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상쾌하게 스타트를 끊었다면 다음날 이탈리아, 일본전에서 흥에 겨워 했을텐데 결과적으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게 연패의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전도 아쉬움이 많이 남기는 매한가지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실력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당일 컨디션에 따라서 경기결과가 많이 좌우되는데, 객관적인 전력상 50:50 또는 60:40으로 우리가 일본을 다소 앞선다는 것이 최광희의 평가다. 하지만 미국전과 마찬가지로 풀세트(25:23 21:25 28:26 15:25 12:15)끝에 역전패 당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됐던 팀은 일본이에요. 우리나라 정서가 일본한테 지면 거의 매국노 분위기니까(웃음). 그리고 일본은 배구인기가 좋아서 관중들의 호응도가 크거든요. 아무래도 경기할 때 좀 위축이 되죠. 실력차가 확 나는 게 아니라서 저희가 준비기간이 좀 있었으면 덜 했을텐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나갔으니까 아무래도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죠"

경기는 패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서 얻은 소득도 있다. 대표팀에 어린 선수들이 많아 결정적인 순간, 경험 부족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경기를 거듭할 수록 선수들이 자신감이 붙는 것 같다고 최씨는 말한다. 특히 한국배구가 발전하려면 장신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대표팀 새내기인 임유진(180cm), 김향숙(190cm)의 성장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아시아는 약게 했어요. 근데 요즘은 유럽도 아시아 스타일을 많이 따라와요. 암만해도 아시아 쪽은 수비가 든든하고, 유럽이나 남미 쪽은 신체적인 조건이 좋으니까 블로킹이랑 서브가 강한데, 요즘엔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신장도 좋은데다가 배구도 '낮게 빠르게' 하니까 갈수록 유럽이나 남미 쪽 상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광희는 "한국배구의 장점인 수비와 리시브를 더욱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팀이 장신화 되는 건 바람직하지만 아무래도 경력이 짧아지고, 키가 커지다 보니 예전과 비교했을 때 수비에서 헛점이 많이 보이는 까닭이다.

94년에 처음 태극마크를 단 최광희는 1996년, 2000년 올림픽에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달권 진입에는 실패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선수로서는 마지막 올림픽인 만큼 각오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96년에는 진짜 얼떨결에 나갔던 것 같아요. 2000년 올림픽 때는 미국한테 2-3으로 져서 4강에 못 들어갔어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자다 깰 정도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 일단 내년 5월에 있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티켓을 따는 게 급선무고요. 올림픽에 나가게 되면 다시 마음 합쳐서 4강에 들 수 있도록 죽어라 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죠. 진짜 연습밖에 없는 거 같아요.(웃음)"

본인은 순전히 '짬밥' 때문이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실력적으로나 실력 외적인 면에서 최광희가 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때로는 '카리스마'로, 때로는 '자상함'으로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최광희. 혹시 주장으로서 힘든 점은 없을까.

"나도 아픈데, 나도 쉬고 싶을 때 있죠.(웃음) 내색을 못하니까 속상할 때도 있어요. 근데 팀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애들 입장에서는 '언니가 말해줬으면…'하는 게 있잖아요. 중간에서 그런 역할 하는 게 힘들지만 애들이 잘 따라줘요. 참고 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면 고맙죠"

최광희의 눈빛에선 오기와 독기가 뚝뚝 묻어난다. 평소 말할 때는 털털함과 인간미가 넘치는 여유있는 모습이지만 경기할 때만큼은 악바리 근성으로 똘똘 뭉쳐 눈매가 매섭기 그지 없다. 대표팀에서 최고참인 만큼 체력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보다도 체력훈련에 열심인 모습은 후배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다.

"웨이트를 열심히 해요. 지금은 테크닉보다는 파워, 높이가 안 되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자사제품인 홍삼 많이 먹고(웃음). 나이 들어서 못하면 서럽잖아요"

일단 최광희로서는 재활훈련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다. 2004V-투어대회(전신 슈퍼리그)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제 컨디션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올해 실업 12년차인 최광희의 최우선 목표는 팀 우승. 지금까지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MVP나 인기상 같은 개인상도 꼭 한 번 타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미래의 실업팀 감독을 꿈꾸는 최광희는 올해 대학원(경희대 체육교육)에 입학했다. 이날도 1주일에 2번 있는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총총히 체육관을 떠났다. 얼굴에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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