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명 신청합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읽을 때마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을 줍니다. 내년 정도에 일본을 갈 계획이 있어서 더 좋습니다. 유흥준 교수님의 입담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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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저녁에 찾은 태릉선수촌. 오후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저녁을 먹은 뒤 모두 숙소로 들어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선수촌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몸은 천근 만근. 피곤할 텐데도 시종일관 자상한 답변으로 기자를 감동시킨 선수. '체조스타' 김동화(29)를 만났다.

♦ 부상을 이겨내다

김동화는 지난해 6월 유니버시아드 대표선발전 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체조선수에게 아킬레스건 부상은 치명타나 마찬가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링 금메달, 개인종합 은메달을 딴 후 한창 상승세를 타던 김동화는 깊은 실의에 빠졌다. 주위에서는 '재기가 힘들지 않겠냐'고 했고, 본인도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었다. "몇 십 년 동안 체조를 했는데도 당시에는 TV나 신문에 체조가 나오면 보기조차 싫었어요".

아킬레스건 수술을 한 후 5개월 정도 운동을 중단했다. 깁스를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스스로 재기에 대해서 반신반의 하던 상태라 많이 쉬었다. 그런데 푹 쉰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동안 쉼 없이 운동했던 터라 몸은 휴식이 절실했던 것. 쉬면서 아픈 부분도 낫고, 몸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도 됐다.

'국내시합만 조금씩 나가겠다'는 김동화의 마음을 다잡아 준 사람은 소속팀(울산동구청) 김무근 감독. "되든 안 되든 간에 한 번 더 시도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워줬다. 아내의 격려도 큰 힘이 됐다. '그래, 도전해보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모교인 한양대에서 후배들과 함께 연습을 했다. 젊고 활기찬 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침체됐던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활력도 되찾았다. "제가 힘들 때 많이 도와준 학교 후배들에게 너무 고마워요".

김동화가 재기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렇다. "후배들에게 아킬레스건이 끊어져도 체조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후배들이 나중에 다치더라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올림픽 대표에 선발되다

김동화는 지난 14일 끝난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5위를 차지하며 대표로 선발됐다. 세 번째 밟는 올림픽 무대지만 이번에는 각오가 남다르다. 정말 힘들게 태극마크를 달았기 때문. 솔직히 떨어진 줄 알았다고 한다. 1차 선발전을 4위로 통과했지만 2차 선발전 안마 종목에서 실수를 많이 했다. 대충 점수 계산을 해보니 힘들 것 같았다. 경기를 마친 후 체조장 밖으로 나가 최선을 다 한 것을 위안 삼으면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웬 걸. 심판을 봤던 여홍철이 다가오더니 김동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는 말. "축하한다. 동화야. 5등 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부분들이 죄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정말 기뻤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정말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 부상악몽

"예전에는 좋은 성적 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시합에 임했는데 이젠 안 다치고 시합을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요". 체조선수는 고난도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부상이 잦다. 김동화는 유독 심했다. 2001년 11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 결승. 주종목인 링 연기 도중 팔목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개인종목 철봉, 링 결승에 들었는데 링은 충분히 메달을 바라볼 수 있었고, 철봉도 해 볼만 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이었다. "거기에서는 의사가 괜찮다고 했어요. 계속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수술을 해야 된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재활훈련에 매달렸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 마지막 도전

김동화가 기대를 걸고 있는 부분은 단체전과 개인종목 링. 전망은 밝은 편이다. 선수들 스스로가 역대 최강의 멤버(김승일, 김대은, 양태영, 이선성, 김동화, 조성민)라는 자부심을 갖고 훈련하고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예선 조 편성(중국, 일본, 우크라이나, 독일)도 유리하다. '일본만 잡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자체평가다. 대표팀에서 항상 막내였던 김동화는 어느덧 맏형이 되었다. 그만큼 책임감도 많이 느끼는 듯 했다. "후배들과 합심해서 꼭 단체전 메달을 일구고 싶어요".

올림픽에 3회 연속 출전하는 김동화에겐 이번이 마지막 올림픽 무대다. 사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멋 모르고 뛰었다. 실수투성이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도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러나 아테네 올림픽은 다를 거라고 확신한다. 힘들게 대표로 선발된 만큼 본인의 마음가짐이 차돌처럼 단단하다. 그는 "저한테 뜻밖의 행운이 주어진 게 기쁜 소식이 있으려고 그런 것 같다"며 "삼 세 번 이라는 말도 있듯 세 번째 도전에서 좋은 성적 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메달을 따면 그동안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께 가장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 프로필

생년월일: 1976년 2월 21일 신장,몸무게: 165cm, 58kg 출신교: 성호초-마산중-경남체고-한양대-한양대교육대학원 박사과정(스포츠마케팅)-울산동구청 국가대표 경력: 92년부터 현재까지 주요경력: 98방콕아시안게임 마루운동 은메달, 2001유니버시아드 링 은메달, 2002부산아시안게임 링 금메달, 개인종합, 단체전 은메달 가족관계: 부모님, 3남 중 막내, 부인(윤정아) 별명: 민감, 예민 징크스: 시합 당일날 미역국, 계란을 안 먹음

-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정아야, 오랜만에 편지 띄운다. 이제 올림픽이 3개월 여 밖에 남지 않았네. 세 번째 나가는 올림픽이지만 긴장되고 떨리는 건 항상 똑같은 거 같아. 선수촌에 들어온 지 5일. 11개월 여 만에 선수촌에 들어와서 그런지 10년 넘게 생활한 곳인데도 무척 생소하게 느껴져. 그래서 요즘엔 몸도 마음도 무척 분주해.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 2차 선발전 때 내가 예민해져 있으니까 말도 잘 못 걸고, 내가 하는 대로 다 따라 하고.. 너무 고마웠어. 내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까 안 그럴 거라고 하는데도 그게 자꾸 눈에 보이니까 너무 미안했어. 아마도 네가 체조를 해서 나를 더 잘 이해해주는 것 같아.

정아야, 아킬레스건 부상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건 네 힘이 컸어. 내가 포기하려고 했을 때 네가 그랬지. '최선을 다해서 다시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사실 너한테 얼마나 미안 했는 지 몰라. 작년 3월에 결혼하고 6월에 바로 아킬레스건을 다쳤잖아. 주변에서는 '결혼하자 마자 다쳤다'고 말들이 좀 있었구. 그때 마음에 상처 많이 받았지? 대표로 선발 되고 너의 짐을 좀 덜어준 것 같아서 좋았단다.

남은 기간 동안은 정말 내 모든 걸 쏟아 부을 생각이야. 그리고 항상 나를 염려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한테 꼭 메달을 선사해주고 싶어. 이 다음에 태어날 우리 아가에게도 보여주고 싶구. 하루 하루 고된 훈련을 견뎌내는 건 네가 있기 때문이란 거 잊지마. 연습시간이네. 다음에 또 쓸게.

PS) 올림픽 끝나면 '이웃사촌' (여)홍철이 형네랑 파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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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쨍쟁 내리쬐는 뜨거운 날씨.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솟고,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러니 몇 시간 째 배드민턴 코트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선수들은 오죽이나 더울까. 연신 땀을 닦아내던 기자는 민망한 나머지 슬그머니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27일 태릉선수촌 배드민턴 연습장에서 손승모 선수를 만났다.

♦ 끝까지 최선 다할 터

'쉴 틈이 없어요'. 국가대표팀 일정을 보면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올 법도 하다. 스케줄이 정말 빡빡하다. 손승모는 올해 한국배드민턴최강전(1월 7일~10일)을 시작으로 지난 25일 끝난 전국봄철실업배드민턴연맹전까지 줄잡아 10여 개 대회에 출전했다. 국내대회가 있을 땐 밀양시청 소속으로, 국제대회가 있을 땐 태극마크를 달고서 연신 코트를 누볐다. 부지런히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느라 좀 야윈 모습이었다. "많이 뛰다 보니까 피곤한 상태에요. 처음에는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가 지금은 거의 원상복귀 됐어요".

28일부터 3일간 쉬고 나면 31일에 다시 선수촌에 복귀한다. 앞으로는 체력훈련을 중점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제가 처음에는 괜찮은데 시합을 계속 하다 보면 금방 지치는 편이거든요" 스피드와 체력이 좋은 중국 선수들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키우는 게 필수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 운동화 끈을 더욱 바짝 조여 맬 생각이다.

♦ 성실하고 노력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손승모는 평상시와 경기할 때 모습이 사뭇 대조적이다. 평소에는 장난기 많고, 수줍은 듯 순박한 미소가 인상적인 털털한 청년이지만 시합 때는 터프한(?) 선수로 변신한다. 벌써 눈빛부터 다르다. 선해 보이는 눈망울은 온 데 간 데 없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상대방을 쏘아본다. 진지한 표정에서도 오기와 독기가 뚝뚝 묻어나긴 마찬가지.

평소 연습벌레로 소문난 그이기에 플레이 할 때도 묵묵한 '포커 페이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정반대다. 온 힘을 다해서 내리꽂는 '불꽃 스매싱'과 공격 성공 후 주먹을 불끈 쥐며 기합을 불어넣는 세리머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자세와 시원시원하고,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은 손승모의 인기 비결이기도 하다.

'지고는 못 사는' 승부근성도 빼놓을 수 없다. "잠을 못자면 다음날 몸 상태가 달라요. 그런데 8강쯤 올라가면 잠 잘 때 시합 생각하느라 잠이 안 오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이땐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상대 선수 공치는 모습도 자꾸 생각나구요".

♦ 꼭 메달 따겠습니다

생애 두 번째 올림픽에 출전하는 손승모. "주변에서 올림픽 나간다 그러면 당연히 메달 따는 줄 알아요"라며 웃는다. 다들 하는 얘기가 "부담 갖지 말고 메달 따오라"고 한다나. 내색은 안 하지만 '부담 만빵'이다. 아닌 게 아니라 손승모의 목표는 메달권 진입이다. 뭣 모르고 가서 일만 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와는 사정이 영 딴판이다. 지난 4년간 손승모는 쑥쑥 컸고, 어느새 한국 남자 단식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차 목표는 시드를 받는 것이다. 그래야 초반에 강적들을 피해갈 수 있다. 세계랭킹 8위까지 시드가 배정되는데 손승모는 현재 9위다. 올림픽 전에 말레이시아오픈이 남아 있지만 참가 여부는 미지수. 하지만 상황은 희망적이다. 시드는 국가당 3명까지 받을 수 있는데 8위 안에 중국선수 4명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이 된 배드민턴에서 지금까지 금4, 은3, 동메달 3개를 수확해 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남자단식만 노메달이었다. 손승모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일단 감은 좋다. 손승모를 비롯, 이현일, 박태상 등 최정예 멤버가 출동하고, 배드민턴이 경기 일정 상 앞쪽(8월 14일~21일)에 있는 것도 유리한 부분이다. 순위 다툼이 치열해질 막판보다는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 할 테니까 말이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역시 중국 선수들. 린 단(1위), 첸 홍(2위), 바오 춘라이(4위)가 출전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중에서도 상대전적 1승5패로 뒤져있는 린 단이 가장 까다로운 상대다. 또한 왕 충 한(3위, 말레이시아), 히다얏 타우픽(11위, 인도네시아)도 경계대상이다. 하지만 세계랭킹 10위 이내 선수들의 실력은 백지 한 장 차이다. 어차피 당일 컨디션에 따라서 성적이 좌우될 공산이 크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꼭 메달 따겠습니다" 손승모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 쇼핑 하는 거 좋아해요

'배드민턴으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6년 째 선수촌 밥을 먹고 있는 손승모. 하지만 운동복을 벗으면 그도 젊고 건강한 25살 보통 청년으로 돌아간다. 운동하고 쉬는 시간에는 스타와 고스톱 같은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시합 없는 날은 동료들과 영화도 본다('트로이'도 벌써 봤단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즐거운 시간은 동갑내기 여자친구(김나미)와 데이트 할 때. 같이 쇼핑도 하고, 맛난 것도 먹으러 다닌다. 오랜만에 나오면 '세상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나. 운동도, 데이트도 열심히 하는 손승모는 한 마디로 멋진 청년!

손승모에게는 그동안 숱한 좌절과 영광이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때, 셔틀콕에 오른쪽 눈을 맞아 시력을 거의 잃었지만 이름 모를 뇌사자의 안구를 기증 받아 시력을 되찾았던 일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극적으로 단체전 우승을 일궈냈던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한다.

이제 올림픽이 2개 월 앞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아킬레스건 염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꾹 참고 견디는 것도 올림픽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 그렇기에 오늘도 손승모는 선수촌에서 셔틀콕을 친다. 묵묵히,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 프로필

생년월일: 1980년 7월 1일 신장: 181cm 출신교: 밀양초-밀양중-밀양고-원광대-밀양시청(경남대학원 재학 중) 국가대표 경력: 99년부터 현재까지 주요경력: 2001년 홍콩오픈 단식 우승, 2002년 코리아오픈 단식 준우승, 2002년 아시안게임 단체전 우승, 단식 3위, 2003년 세계선수권 단식 3위 가족관계: 부모님, 누나 별명: 해효 징크스: 시합 전 잠을 못 자면 몸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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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5일 새벽, 전 세계는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뮌헨 올림픽이 한창 진행 중이던 이날,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올림픽 선수촌에 잠입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습격한 것이다. 현장에서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잡은 이들은 인질 석방 조건으로 이스라엘에 억류 중인 팔레스타인 정치범 200 여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서독-이스라엘 간 협상이 깨진 후 테러리스트들은 탈출용 비행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탈출 직전 서독 특수부대요원과 테러리스트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9명의 인질, 테러리스트 5명, 서독 특수부대요원 1명이 숨졌다. '평화의 제전' 뮌헨 올림픽은 피로 물들었고, 정치위협으로 얼룩졌다.

당시 에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이 '대회는 계속 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사건 발생 34시간 만에 대회는 속개됐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선수단을 철수한 이스라엘은 즉각 피의 보복을 감행했고, 이것은 이듬해 중동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죄 없는 젊은이들은 또 다시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어갔다. 이것이 바로 '검은 9월단 사건'의 전모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2개 월 여 앞으로 다가온 지금, '검은 9월단' 악몽이 서서히 되살아 나고 있다. 이번 대회는 108년 만에 근대올림픽의 발상지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최근 세계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는 테러로, 안전문제에 대해서 걱정 어린 시선과 우려 섞인 시각이 많다.

실제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아테네 올림픽이 전쟁이나 테러, 자연재난 등을 이유로 취소될 경우에 대비해 영국 보험사 신디케이트에 1억7천만 달러의 보험에 가입했고, 아테네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ATHOC)는 4년 전 시드니대회 때의 3배에 달하는 8억2000만달러(한화 9500억원)를 안전예산으로 책정했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역시 미국이다. 이라크 포로 학대파문 여파로 반미감정이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의 올림픽 불참설 마저 나돌고 있다. 72년 뮌헨올림픽에서 7관왕에 오른 '전설적인 수영스타' 마크 스피츠(미국)는 최근 "테러 위협으로 미국이 올림픽에 불참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국 내 스포츠스타들도 몸을 사리기는 마찬가지. 린제이 대븐포트(여자 테니스),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이상 농구) 등이 이미 불참을 선언했다. 테러의 표적이 되느니 기꺼이 올림픽 메달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테러 노이로제'에 걸린 미국이 조용히 묻고 있다. "나, 떨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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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나디아 코마네치에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은퇴한 지가 벌써 20년이 됐네요. 선수생활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정말 빠르네요.(나이 드니까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사실 한국은 제게 낯설지만은 않답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따뜻하고 정이 많아서 또 오고 싶더라구요. 아테네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네요. 한국 체조 대표팀 선전하시길 바래요. 파이팅! 그럼 지금부터 얘기 보따리를 풀어보도록 하죠.

제 인생에서 체조는 '모든 것'이에요. 체조 없는 인생은 생각해본 적도 없구요. 체조에 처음 입문한 건 6살 때였어요. 벨라 카롤리 코치 눈에 띄어서 '카롤리 체조학교'에 들어갔고, 하루 4~5시간씩 훈련하면서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나갔지요. 그때만해도 제가 이렇게 '거물 선수'가 될 줄은 몰랐답니다. 7살 때 국내대회에 처음 나갔는데 13등에 그쳤죠.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하지만 카롤리 코치는 꾸중 대신 격려를 해주셨죠. 귀여운 에스키모 인형을 사주시면서. 그 후로 저는 국내외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고, 75년 유럽선수권 4관왕에 오르면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답니다.

아~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대회잖아요. 후훗~ 그때 이단평행봉 연기를 끝내고 점수표가 공개됐을 때 잠깐 당황했었답니다. 전광판에 '1.0'이라는 수치가 나왔거든요. 내심 '9.9대'를 기대했건만 '1.0'이라니…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죠. 당시 전광판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점수는 '9.99'가 최고였거든요. 10점! 올림픽체조 사상 최초의 만점이었죠. 체육관은 관중들의 우뢰와 같은 함성과 열광적인 환호로 뒤덮였고, 전 세계가 찬탄으로 물결쳤죠. 사실 저는 그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답니다. 일종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멍~ 했어요.

저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개인종합, 이단평행봉, 평균대에서 금메달 3개를 땄구요. 총 7차례 만점을 받았어요. 당시 여론은 찬반으로 팽팽히 갈렸답니다. 신도 아닌데 만점이라니.. 구 소련 코치 라리사 라티니나는 "그 누구도 완전할 순 없다"고 딱 잘라 말했죠.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거든요. 반면 '타임'지는 저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날아다니는 요정’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 글쎄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네요. "제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심판들도 10점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저의 체조인생은 찬란하고 화려했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후 조국 루마니아로부터 '사회주의 영웅' 칭호를 선사 받았고, 84년에 은퇴했을 땐 부쿠레시티 스포츠광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가졌지요. 루마니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 음~ 물질적으로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꼈죠. 자유가 그리웠어요. 결국 89년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직전에 헝가리로 탈출한 뒤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답니다. 96년에는 천생배필도 만났어요. L.A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버크 코너가 제 신랑이에요. 지금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남편이랑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오순도순 잘 살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체조를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요즘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 '참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선수시절 고난도 연기로 여겼던 기술이 이젠 워밍업 수준이 됐더라구요.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선수는 안드레아 라두칸(루마니아)이에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인종합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제 일처럼 기뻤죠. 저랑 비슷하지 않나요? 작은 체구,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얼굴, 힘이 넘치는 연기.. 감기약을 잘못 복용해 금메달을 박탈당했을 땐 또 제 일처럼 슬펐죠. '당시 라두칸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분명한 건 "체조선수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기술뿐"이라는 겁니다.

얼마전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딕 파운드 전 IOC부위원장이 자신의 저서 '인사이드 올림픽스'에서 언급한 내용 때문인데요. 그 내용이 뭐냐면 "코마네치가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단평행봉에서 기록한 10점은 당시 국제체조연맹(FIG)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구 소련이 자국 선수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점수를 높게 매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는군요. 너무 어이가 없더군요. 사실 몬트리올 올림픽 3개월 전에 열렸던 아메리카컵에서도 저는 2번이나 만점을 받았었거든요. 왜 그런 말을 지어냈는 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저는 체조로 이룰 것은 다 이룬 것 같습니다. 올림픽체조 사상 최초로 만점을 받았고, 남들은 하나 따기도 힘들다는 올림픽 금메달을 5개나 주렁주렁 목에 걸었으니까요. 물론 명예도 얻었죠. 93년 국제체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98년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100명의 여성'에 선정되기도 했죠. 언젠인가부터 '제2의 코마네치'라는 칭호는 여자 체조선수에게는 최고의 찬사가 됐구요. 하지만 제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코마네치를 보고서 체조선수의 꿈을 키웠다"는 선수들을 볼 때랍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제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거 였어요. "집에 가서 햄버거랑 사탕을 실컷 먹으면 좋겠어요" 훈련하는 동안 살찌는 음식은 먹을 수가 없거든요 14살 소녀답죠?^^ 그동안 체조 덕분에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이젠 베풀어야 할 때가 온 거죠. 2000년부터는 라우레우스 재단 소속으로 전 세계를 방문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참, 2004년 라우레우스 스포츠 어워드 신인상 수상자는 미셸 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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