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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배구 '추억의 올스타전'이 열린다. 고려증권 OB팀과 통합 OB팀간의 '꿈의 대결'이 펼쳐지는 것. 특히 98년 팀 해체 이후 6년만에 다시 뭉친 고려증권 선수들은 일주일에 세 차례 모여 맹연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지라 예전만큼 점프도 잘 안되고, 마음만큼 몸도 안 따라 주지만 무슨 상관이랴. 올드팬이라면 추억의 스타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에 매일밤 잠 못 이루지 않을까.

"김호철 토스하고, 강만수 공격하는 것도 보고 싶고, 이쪽에서는 장윤창 스파이크 하는 거. 돌고래 타법, 그게 얼마나 멋졌는데. 정의탁 개인시간차도 보고 싶구요."

그런데 선수들과 팬들 못지 않게 '추억의 올스타전'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배구중계의 대명사' 유수호(58) 아나운서다.

"그 양반이랑 하면 세상 편하지"

"배구 중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콤비는?"

학창시절, 백구의대제전(현 슈퍼리그 전신)과 함께 주말 오후를 만끽한 기억이 있다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오관영(성결대 교수)-유수호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오-유 콤비는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 유수호 아나운서와 구수한 입담이 일품이었던 오관영 해설위원은 찰떡 호흡을 자랑했다.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춘 건 80년 라디오 중계였다. 그리고 나서 9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18년 동안 같이 했으니까 '배구중계=오관영-유수호'라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이 콤비 중의 한 명인 유수호 아나운서를 만났다.

사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는 훨씬 더 오래됐다고 한다. 70년에 처음 안면을 텄으니 '30년 지기'다. 나이로는 9살 차이가 나지만(오관영 교수가 윗사람이다) 죽이 잘 맞는 '술친구'였고, 평상시에는 형님, 아우처럼 격의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원체 친하기도 했지만 중계할 때 두 사람 모두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타협형'이라서 호흡이 척척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송에는 안 나갔지만 처음에는 중계하다가 싸운 적도 있다고 한다.

"제가 "이거 이건 뭐 아닙니까"라고 하면 동조를 해줘야 되는데 "아니다"라고 나와요. 그럼 싸우는 거예요. 일단 제가 주(主)니까 강하게 나가면 슬쩍 피해서 가고, 자기 의견하고 다르면 대답 안 하고. 그런 적도 좀 있었어요."(웃음)

하지만 좀 지나고 난 후에는 '척 하면 착'이라서 싸울 일도 없고,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 재밌게 했어요. 근데 오관영씨가 내용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의견에 반대하는 게, 경기를 그렇게 흥미롭고, 재밌게 해주는 건 그 양반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고려증권 팬이라면 오관영씨가 해설할 때 유독 고려증권을 심하게 다그치고, 호되게 야단치곤 했던 것에 대해 다소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법도 한데 사실은 그게 다 '작전'이었다는 걸 아는가.

오관영씨는 고려증권 팀을 만든 주인공으로 단장을 역임했었다. 아무래도 고려증권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반대로 했다고 한다.

"고려증권이랑 현대가 결승전에서 붙으면 오관영 씨는 자기도 모르게 고려증권 편들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제가 그래요. "나는 고려증권 편든다. 오 선배는 현대 편을 드시오." 짜고 들어가. 그럼 중립이 되잖아요. 오관영씨가 팀 책임자니까 잘 하면 그냥 내버려두는데 못하면 또 화를 내요. "저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그러면 제가 고려증권 편을 들어주면서 균형을 맞추는 거죠."(웃음)

2월 15일에 열리는 '추억의 올스타전'에서 오관영-유수호 콤비의 감칠맛 나는 중계를 다시 듣고픈 사람이 어디 기자 한 사람 뿐이랴.

"드디어 일본을 꺾었습니다"

유수호 아나운서가 처음 배구중계를 시작한 것은 79년이었다. 69년 TBC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71년부터 고교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60년대 당시 배구로 유명했던 학교(덕수상고)를 나온 덕분에 배구중계 마이크도 함께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배구 중계를 해왔지만 '가장 기억나는 경기'를 말할 때 항상 첫 손가락에 꼽는 경기가 있다. 바로 79년 바레인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다.

이 대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대회였다. 우선 유수호 아나운서의 배구 중계 데뷔 무대였고,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남자 배구가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격파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일본에 두 세트를 먼저 내주고, 3세트를 내리 따내면서 통쾌한 역전승을 거뒀다.

"바레인 체육관이 거의 울음 바다였어요. 그때 한창 중동에 건설붐이 일 때라서 우리 게임 있을 때면 한국 사람들이 최소 1천 명씩 왔어요. 그날은 건설 현장 다 노는 거예요. 체육관이 거의 한국 응원단으로 꽉 들어찼어요. 그런데 일본을 이겼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어요."

그 당시 국제대회는 민·관 합동중계방송을 했었다. 아나운서는 KBS에서 무조건 한 사람, 나머지 4개(TBC, 문화방송, 동아방송, 기독교방송) 방송사에서 돌아가면서 한 명씩 갔는데, 마침 TBC 차례였다. 유수호 아나운서에게 기회가 왔다. 또한 그때만 해도 아나운서가 한 세트씩 바꿔가면서 중계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운 좋게도 5세트는 유수호 아나운서 순서. 덕분에 감격적인 순간을 국민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1시 무렵이었는데, 중동 지역에 우리 나라 방송단이 최초로 가서 중계를 한 거였어요. 다 들었죠. 눈물도 참 많이 흘렸어요. 이기고 나서 해설가가 막 우는 거예요. "드디어 이겼습니다." 마무리 하면서 같이 울어야지 어떡해. 저는 엉엉 울 수는 없으니까 계속 울먹거렸어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경기로는 한·일전을 든다. 배구가 한창 인기 절정이었을 무렵, 1만 명의 관중들이 잠실학생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경기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데 1만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애국가를 따라부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나는 외국 선수는 누구일까?

"나까가이치죠. 나까가이치는 뻔히 알면서도 못 막았어요. 후위에 갔다 그러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백어택 준비하고 있어요. 걔는 수비 절대 안 해요. 바로 앞에 와도 도망가. 옆에 놈이 받아주지. 그럼 백어택을 하는 거야. 나중엔 체력이 달려서 점프를 못해서 잡았지만 그 놈 전성기 때는 아무도 못 막았지."

"10분이면 끝납니다"

중계 방송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참 많이 생긴다. 특히 스포츠는 시시각각 경기 양상이 바뀌고, 승부를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베테랑인 유수호 아나운서도 예외는 아니다. 중계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참 많다.

시청자들이 중계 방송 보다가 가장 김빠질 때는 박빙의 순간, 한참 손에 땀을 쥐어가며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나운서로부터 이런 멘트가 흘러나올 때다.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경기 결과는 스포츠뉴스 시간에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때마다 시청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손바닥에 '참을 인'자를 새기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지만 한 번 난 화를 누그러 뜨리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어디 시청자들만 답답하랴. 중계하는 입장에서도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기는 마찬가지다. 승패의 갈림길,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울까. 유수호 아나운서는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공개했다.

"예전에는 정규 방송 시간이 5시였잖아요. 4시 50분, 풀세트 간다 그러면 의도적으로 그래요. "5세트는 15점제이니까 10분이면 끝납니다. 10분." 그럼 편성팀에서 5분만 연장해 주면 되겠냐 방법을 찾자 그래요. 그렇게 해서 끝까지 중계한 적도 있어요. 기분 좋지. 그 다음엔 "경기 끝났습니다." 바로 이름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저도 불만이 그거예요. 중간에 끊었으면 제발 자막이라도 넣어달라."(웃음)

유수호 아나운서는 중계방송 할 때 조심해야될 사항 두 가지를 알려준다. 우선 선수들의 기량이나 감독의 작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 것. 왜냐하면 중계방송은 파급 효과가 엄청 나서 함부로 말했다간 본의 아니게 선수나 감독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점수차가 많이 나더라도 '어느 팀이 이겼다'고 앞질러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일방적인 경기에서 승패가 뒤집히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고려증권이 믿기 어려운 '뒤집기쇼'를 곧잘 연출했었고, 91년 독일월드컵 한·독전에서도 5세트에서 11-14로 지다가 역전시킨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은가.

요즘처럼 남자부, 여자부 모두 독주체제일 때는 특히 아나운서의 역할이 중요할 듯 싶다. 유수호 아나운서에게는 재미 없는 경기도 재밌는 것처럼 중계하는 나름의 비법이 있다.

"예전에 서브권제였을 때는 15-0 게임 중계도 몇 번 해봤어요. 그때는 재미없다고 안 해요. 간단해요. 한 점을 나느냐, 한 점 나면 마치 그 팀이 이긴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한 점 났습니다' 그러는 거죠."(웃음)

스포츠 캐스터 계보 잇고파

"종목 중계는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이 했을 거예요. 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17개까지 했고, 86년 아시안게임부터는 2년마다 아시안게임, 올림픽은 빼놓지 않고 다 했어요."

그래서 가끔씩 '스파이크' 해야 되는데 '스매싱'하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용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던 적도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생소한 종목을 중계할 때면 마치 '비인기종목 전도사'가 된 것 같아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중계하면서 눈물 날 뻔한 적은 숱하게 많다. 그 중에서도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땄을 때, 당연히 진다고 생각했는데 이겼을 때가 가장 감격스럽다. 특히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에서 여갑순이 우리 나라 대회 1호 금메달을 땄을 때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김영호가 펜싱 금메달을 확정짓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한다.

"그때는 정말 목이 메이는데 전 그걸 피하지 않아요. 그냥 울먹이면서 방송해요. 감격적인 순간에 논리정연, 침착함을 유지한다는 건 말이 안 돼죠. 그래야 듣는 사람들도 같이 울고요. 국제대회인데 편드는 건 당연하지."

그렇다면 사전에 감동적인 멘트를 준비할까.

"88서울올림픽 때 탁구에서 유남규(남자단식), 양영자-현정화(여자복식) 조가 금메달 땄을 때 중계를 다 했어요. 그땐 감격적인 멘트를 미리 준비했었어요. 근데 녹화해 놓은 걸 보니까 미사여구는 좋은데 왠지 흥이 안 나더라구요. 그 후로는 말이 엉키든 씹히든 무조건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해요. 신기한 건 나중에 들어보면 '준비도 안 했는데 내 입에서 어떻게 저렇게 좋은 얘기가 나오지' 싶을 정도로 술술술…."(웃음)

유수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세월이 비껴간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낭랑한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스포츠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보낸 것이 어느덧 반 평생.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친숙한 목소리로 우리 곁에서 때로는 감격의 순간을, 때로는 안타까운 순간을 전해주고 있는 유수호 아나운서도 내년(9월)이면 정년을 맞는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심혈을 기울일 마지막 대회가 될 거"라고 말하는 유수호 아나운서는 "앞으로 어떤 스포츠 캐스터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그 전까지 시원시원하게 답변하던 것과는 달리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직나직 말을 잇는다.

"그동안 '스포츠' 한 우물을 팠고, 제 천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바란다면 스포츠 캐스터 계보를 잇고 싶고, 어느 방송이 됐든 앞으로도 계속 목소리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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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한 미술관 옆에 자리한 멋들어진 기와집. 금방이라도 갓 쓰고, 턱수염 늘어뜨린 훈장 선생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휘적휘적 걸어나올 것 같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그러나 그곳엔 훈장도 없고, 천자문 외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올 뿐.

도무지 씨름단 숙소로는 보이지 않았던 터라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반갑게도 빅 사이즈 운동화가 빼곡이 들어찬 신발장이 기자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잠시 후 황규연(30·신창건설)이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덕분에 1시간 가량 '미술관 옆 숙소'에서 낭만적인(?)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2001천하장사대회 vs 2003천하장사대회

2003년은 황규연과 '궁합'이 잘 맞지 않은 한 해였다. 97년 이후 매년 빠짐없이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유독 이 해만은 '무관'에 그쳤다. 2002년 8월 올스타 장사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니까 꽃가마 타본 지도 꽤 됐다.

하지만 황규연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만든 것은 2003천하장사대회였다. 98년부터 천하장사대회 '단골손님'이었던 황규연은 이 대회에서 16강 예선탈락했다. 당시 이성원(LG)이 금강급 선수로는 19년 여만에 천하장사대회 8강에 진입, 모래판이 떠들썩했는데, '대이변'의 희생양이 다름 아닌 황규연이었던 것이다.

사실 팀의 기둥 선수라는 책임감에 출전은 했지만 대회 전 연습 도중 부상을 입어 제 켠디션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황규연은 몇 년째 부상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001년 3월, 훈련 도중 허리 부상(척추분리증)을 당했는데, 연습하다보면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겠지 싶었다. 하지만 웬걸. 다음날 아파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 뿐인가. 어째 요 놈이 거머리마냥 착 달라붙어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안한더란다. 쿡쿡 찌르고, 콕콕 쑤셔대는 것이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수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재활에 온 힘을 쏟는 수밖에.

반면 2001년은 황규연과 아주 좋은 '금실'을 자랑했다. 6월 광양 지역장사, 10월 영암 백두장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황규연은 마침내 난생 처음 천하장사에 등극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결승전에서는 김영현과 맞붙었다. 2-2 상황. 결국 21세기 첫 천하장사의 향방은 다섯 번째 판에서 가려졌다. 두 선수는 거의 동시에 떨어졌는데 주심은 지체없이 황규연의 손을 들어줬다.

자신의 승리가 선언되자 황규연은 눈물과 모래로 뒤범벅된 채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흐느끼다가 나중엔 아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펑펑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운동 시작한 후 처음 천하장사가 됐고, 그동안 힘들었던 것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아주 팅팅 부었어요. 계속 우니까 나중에 총재님이 그래요. '그만 울어라. 텔레비전에 나간다'(웃음)."

게다가 신봉민(8강), 이태현(4강), 김영현(결승) 등 한 가닥하는 선수들을 죄다 꺾고 거머쥔 우승이기에 더욱 값진 승리로 기억된다.

"그때는 생각지도 않게 게임이 잘 풀렸어요. 경기하는 날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음날 되니까 '아, 내가 전 천하장사들을 다 이겼구나' 싶더라구요."

반짝반짝 빛나는 씨름판의 보석, 황규연

그의 귀공자풍 외모만 보고, 그동안 거둔 화려한 성적만 보고 황규연이 탄탄대로를 달려왔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따지고 보면 민속씨름판에서 그만큼 쓴 맛, 단 맛 다 본 선수도 드물다.

황규연은 95년 10월 당시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고 세경진흥에 입단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맛봤고, 그후로도 이런 저런 이유로 현대, 삼익 캐피탈, 신창건설 등으로 옮겨 다녔다.

좀 할 만하면 보따리 싸고, 좀 적응됐다 싶으면 다른 팀으로 이적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렸으니 성적은 둘째 치고라도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듯 싶다.

"당시엔 정말 정신 없었죠. 운동을 그만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던 거 같아요. 왜냐하면 한 팀에 오래 있으면 조금 나태해졌을 수도 있고, 여러 팀 거치면서 다양한 훈련 방법과 감독님을 접할 수 있었거든요."

황규연의 신체 사이즈는 187cm, 136kg. 백두급에서는 정민혁, 원종수 선수 정도를 제외하고는 체구가 가장 작다. 하지만 허리가 아파서 무작정 체중을 늘릴 수도 없는 처지. 그러니 150kg 넘는 선수들이 득시글한 요즘, 불리한 체격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신체 조건 때문에 밀리면 정말 회의를 느껴요. 체구가 비슷하면 '내가 좀 안 되는구나' '기술로 졌구나' 싶을 텐데 원체 217cm, 160kg이러니까.'(웃음)"

그렇다고 남들처럼 힘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다만 황규연에게는 그만의 무기가 있다. 바로 유연성과 기술. 이만기(KBS 해설가)씨가 황규연만 나오면 으레 하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허리를 갖고 있는 선수에요."

"남들보다 제가 유연하다는 느낌은 갖고 있어요. 근데 유연성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이 받쳐줬을 때 발휘되는 거지 암만 유연해도 힘이 없으면 안 되요."

유연성 말고도 황규연은 '기술 씨름의 달인'으로 불릴 정도로 구사하는 기술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에이, 기술 씨름의 달인은 아니구요. 왜냐하면 한라급, 금강급 가면 화려하고 멋진 기술 쓰는 선수가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기술이 좋은 게 아니라 남들이 그걸 못하니까 그런 거지. 다 크고 그러니까 기술이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는데 저는 좀 작으니까 활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이적의 설움, 신체 조건 상의 불리함,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타고난 유연성과 다양한 기술로 극복해낸 황규연은 그야말로 민속 씨름판의 '보석'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냥 묵묵히 제 할 일 하면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요"

요즘 '스포츠 얼짱'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씨름은 예로부터 미남선수가 많기로 유명한데, 황규연도 그 계보를 잇는 선수다. 살포시 미소를 머금을 때마다 양 볼에 푹 패이는 보조개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 앞에는 '모래판의 귀공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몇 년 전 씨름장 장내 아나운서가 지어준 별명이라고 하는데, 본인도 썩 마음에 드는 눈치다.

'노랑머리'하면 한때 '노랑머리'였던 백승일이나 지금의 최홍만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기자는 황규연이 떠오른다. 비록 '전통 스포츠에 노랑머리가 웬 말이냐?'는 총재의 불호령(?)에 금방 검정머리로 원상복귀시켰지만, 황규연의 '노랑머리'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무엇보다도 잘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보수적이던 씨름판도 몇 년 새 많이 변했다. 요즘은 개성 있는 머리 스타일과 독특한 세리모니를 오히려 적극 권장하는 추세다. 특히 신인 선수 최홍만은 덩치와는 달리 앙증맞은'테크노춤 세레모니'로 큰 호응을 얻었다.

"저도 그런 주문을 많이 받아요. 근데 성격 탓인지 잘 안돼요. 이젠 나이도 있고…. 물론 그런 걸로 인식되는 것도 좋지만 전 그냥 무덤덤하게 제 할 일 하면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요."

2004년은 황규연 '부활의 해'

오는 21일부터 이틀간 장충체육관에서 2004년 마수걸이 대회인 설날장사대회가 열린다. 99년 설날대회에서 장사를 차지했던 황규연은 5년만에 이 대회 정상을 노린다.

사실 2003 설날장대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였다. 판정시비 끝에 8강전에서 김동욱에게 1-2로 아깝게 졌던 것. 그렇게 지고 나면 허무하기도 하고, 내심 억울한 마음도 들지 않았을까.

"에이, 졌으니까 변명은 못하구요. 어차피 어느 스포츠나 오판은 있거든요. 그리고 씨름은 다른 스포츠보다 눈으로 감지하기가 힘들어요. 지면 바로 위에서 승부가 뒤집어지는 경우도 허다하거든요. 뭐 어쩌겠어요. 이길려면 더 열심히 해서 확실히 처박고, 안 그러면 암말 안 하고 있어야지.(웃음)."

황규연은 지난 한 해, 부상과 씨름하느라 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다. 올 시즌 첫 대회를 앞두고 각오를 들어봤다.

"작년에는 부상 때문에 겨우 겨우 시합장에 나와서 시합하고 그랬는데, 몸이 괜찮아지고 있거든요. 일단 성적을 내야죠. 운동 선수는 결과인 거 같아요. 좋은 결과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씨름판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17년.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씨름 생각만 하며 부지런히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선수로서 책임감이 앞서는 고참급이 됐다.

예전에 황규연에게는 '번외 대회의 강자'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녔다. 유독 번외대회(97, 98, 2002 올스타장사, 99설날장사, 2000백제장사)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들이 신경 별로 안 쓰는 번외 대회조차 소홀히 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영광스런 칭호가 아닐까 싶다.

어릴적 우상이었던 이만기(인제대 시절), 이준희(신창건설)씨한테서 모두 가르침을 받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씨름 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다'는 '억세게 행복한 사나이', 독서(요즘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재밌게 읽었다)와 스노우 보드를 즐기는 '미지의 사나이' 황규연.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는 사람들 식상하지 않게 앞으로 잘하는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지금보다 팀이 늘었으면 좋겠어요."

듬직한 체구만큼이나 우렁찬 웃음 소리가 인상적인 황규연. 언제나 묵묵히 씨름 인생을 꾸려 나가는, 10년을 한결 같이 우리 곁에 머물면서 씨름의 묘미를 한껏 선사해 주는 황규연. 10년 후쯤에는 지도자로 활약하는 모습을 모래판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늘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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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KT&G 여자배구단 체육관에서는 전지훈련 차 방문한 일본 도레이 팀과 KT&G와의 친선게임이 열렸다. 코트에서는 양팀 선수들이 한창 몸풀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체육관 한 켠에서 코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선수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최광희였다.

최광희(KT&G·30)는 얼마전 일본에서 개최됐던 여자배구 월드컵(11월 1일~11월 15일) 폐막 전날인 14일, 폴란드전에서 3세트 초반, 리시브 하는 도중 양쪽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부상으로 교체된 뒤 무릎에 붕대를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최광희의 모습이 TV중계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히기도 했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듯했다.

이번 대회는 1~3위 입상팀에게 2004아테네 올림픽 본선 직행티켓이 주어지는 중요한 대회였다. 우리나라는 직행티켓은 고사하고 12개 출전국 중 최종순위 9위(3승8패)에 그쳤다. 95년 5위, 99년 4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실망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풀세트까지 가서 진 경기도 많았고, 월드컵에서 성적이 이렇게 저조한 경우도 이번이 처음이라서 아쉬움이 커요. 준비기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풀세트 경기는 승리해서 지금보다는 성적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이번 대회는 보름 동안 각 팀당 11게임을 소화해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보다 우리가 부진했던 가장 큰 원인은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전국체전(10월 11일~10월 16일), 실업대제전(10월 21일~10월 26일)이 끝나고 난 뒤 다음날 바로 일본으로 출국했기 때문에 선수간에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4일에 불과했다.

"국내볼이랑 국제볼이랑 볼도 달라요. 볼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2~3주정도 지나야 되는데, 선수들이 다 피로한 상태니까 체력 소모도 컸고, 볼적응도 늦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 대회 막바지에 가서는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 따지고 보면 최광희의 부상도 준비기간 부족 탓이 크다. 체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부상도 입기 쉬우니까 말이다. 또한 세 차례의 풀세트 경기(미국, 일본, 쿠바전)를 모두 내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올해 4월부터 대표팀 완장을 차고 있는 최광희로서는 더욱 아쉬움이 크다. 사실 그녀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쉴 틈이 없었다. 국내경기건 국제경기건 자신을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묵직한 스파이크를 때려대고, 코트에 부지런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오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힘들어도 어디서든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감사해요. 근데 이번처럼 성적도 안 나고, 다치기까지 했을 때는 정말 의욕이 상실돼요. 힘들어도 성적이 좀 나고, 주위에서 '수고했다', '잘했다' 이런 말 들으면 보람도 있고, 극복하기 쉬울텐데…."

체력도 달렸지만 정신적으로도 무척 피곤하고 힘든 대회였다고 고백한다.

"보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저런 미스를 할까' 말을 하지만 하는 사람들도 너무 속상하고 답답한 거예요. 이렇게밖에 못하니까. 더구나 국내에서 혹평을 들었을 땐 사기저하 되고, 코트에 서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어찌보면 1라운드 첫 경기였던 미국전부터 어긋났다. 세트 스코어 2-3(21:25 19:25 25:21 25:22 13:15)으로 패했던 미국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상쾌하게 스타트를 끊었다면 다음날 이탈리아, 일본전에서 흥에 겨워 했을텐데 결과적으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게 연패의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전도 아쉬움이 많이 남기는 매한가지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실력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당일 컨디션에 따라서 경기결과가 많이 좌우되는데, 객관적인 전력상 50:50 또는 60:40으로 우리가 일본을 다소 앞선다는 것이 최광희의 평가다. 하지만 미국전과 마찬가지로 풀세트(25:23 21:25 28:26 15:25 12:15)끝에 역전패 당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됐던 팀은 일본이에요. 우리나라 정서가 일본한테 지면 거의 매국노 분위기니까(웃음). 그리고 일본은 배구인기가 좋아서 관중들의 호응도가 크거든요. 아무래도 경기할 때 좀 위축이 되죠. 실력차가 확 나는 게 아니라서 저희가 준비기간이 좀 있었으면 덜 했을텐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나갔으니까 아무래도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죠"

경기는 패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서 얻은 소득도 있다. 대표팀에 어린 선수들이 많아 결정적인 순간, 경험 부족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경기를 거듭할 수록 선수들이 자신감이 붙는 것 같다고 최씨는 말한다. 특히 한국배구가 발전하려면 장신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대표팀 새내기인 임유진(180cm), 김향숙(190cm)의 성장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아시아는 약게 했어요. 근데 요즘은 유럽도 아시아 스타일을 많이 따라와요. 암만해도 아시아 쪽은 수비가 든든하고, 유럽이나 남미 쪽은 신체적인 조건이 좋으니까 블로킹이랑 서브가 강한데, 요즘엔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신장도 좋은데다가 배구도 '낮게 빠르게' 하니까 갈수록 유럽이나 남미 쪽 상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광희는 "한국배구의 장점인 수비와 리시브를 더욱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팀이 장신화 되는 건 바람직하지만 아무래도 경력이 짧아지고, 키가 커지다 보니 예전과 비교했을 때 수비에서 헛점이 많이 보이는 까닭이다.

94년에 처음 태극마크를 단 최광희는 1996년, 2000년 올림픽에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달권 진입에는 실패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선수로서는 마지막 올림픽인 만큼 각오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96년에는 진짜 얼떨결에 나갔던 것 같아요. 2000년 올림픽 때는 미국한테 2-3으로 져서 4강에 못 들어갔어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자다 깰 정도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 일단 내년 5월에 있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티켓을 따는 게 급선무고요. 올림픽에 나가게 되면 다시 마음 합쳐서 4강에 들 수 있도록 죽어라 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죠. 진짜 연습밖에 없는 거 같아요.(웃음)"

본인은 순전히 '짬밥' 때문이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실력적으로나 실력 외적인 면에서 최광희가 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때로는 '카리스마'로, 때로는 '자상함'으로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최광희. 혹시 주장으로서 힘든 점은 없을까.

"나도 아픈데, 나도 쉬고 싶을 때 있죠.(웃음) 내색을 못하니까 속상할 때도 있어요. 근데 팀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애들 입장에서는 '언니가 말해줬으면…'하는 게 있잖아요. 중간에서 그런 역할 하는 게 힘들지만 애들이 잘 따라줘요. 참고 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면 고맙죠"

최광희의 눈빛에선 오기와 독기가 뚝뚝 묻어난다. 평소 말할 때는 털털함과 인간미가 넘치는 여유있는 모습이지만 경기할 때만큼은 악바리 근성으로 똘똘 뭉쳐 눈매가 매섭기 그지 없다. 대표팀에서 최고참인 만큼 체력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보다도 체력훈련에 열심인 모습은 후배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다.

"웨이트를 열심히 해요. 지금은 테크닉보다는 파워, 높이가 안 되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자사제품인 홍삼 많이 먹고(웃음). 나이 들어서 못하면 서럽잖아요"

일단 최광희로서는 재활훈련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다. 2004V-투어대회(전신 슈퍼리그)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제 컨디션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올해 실업 12년차인 최광희의 최우선 목표는 팀 우승. 지금까지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MVP나 인기상 같은 개인상도 꼭 한 번 타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미래의 실업팀 감독을 꿈꾸는 최광희는 올해 대학원(경희대 체육교육)에 입학했다. 이날도 1주일에 2번 있는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총총히 체육관을 떠났다. 얼굴에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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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배구팀은 지난 82년 2월 창단돼 20여년 동안 수많은 배구팬들에게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아쉬움을 안겨준 전통 있는 팀이다.

80년대 후반에는 각종 대회에서 수 차례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박삼용, 이성희, 오욱환, 서남원 등 국가대표 선수들도 여럿 배출해냈다. 특히 89년 대통령배대회 3차 대회에서 사실상 대학팀인 서울시청이 내로라 하는 실업팀들을 죄다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 감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올드 팬들도 많으리라.

하지만 서울시청 배구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11월 5일 서울시 체육회는 "4일 시장단 회의에서 비인기 종목 육성을 위해 배구, 축구팀을 해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인 해체통보를 받은 배구, 축구팀 선수단은 망연자실해 있다. 선수들은 하루아침에 운동을 그만둬야 될 처지에 놓여 있고, 앞으로의 진로도 '안개 속'이다. 가만있다 뒤통수를 얻어맞아서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해체 통보를 받았지만 서울시청 배구팀 이문섭 감독과 선수들은 모두 숙소에 남아 있었다.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일단 계약기간이 끝나는 12월 31일까지는 협상안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7일 서울시청 배구팀 숙소 근처에서 이문섭 감독과 선수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 중에도 이문섭 감독의 전화는 쉴새없이 울려댔다.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가방은 갖가지 서류뭉치들로 가득했다. 억울해서 밤잠도 안 오고, 말을 하도 많이 해서 목도 아프다고 한다. 말하는 중간 중간 목이 메이는지 울컥하길 수 차례. 하지만 상황이 너무 절박한지라 사람들에게 팀 해체의 부당성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하루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서울시청 배구팀이 갑작스런 해체통보를 받은 것은 지난 11월 5일. 말 그대로 통보였다. 사전에 해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더구나 선수단은 전국체전과 실업배구대제전을 마치고 10일간 휴가 중이었다.

하지만 숙소로 복귀한 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전국체전 3위 입상에 대한 '보너스'가 아니라 어이없는 '해체통보'였다. 그것도 숙소에서 밥 먹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문섭 감독이 더욱 분통을 터뜨린 건 서울시 체육회의 성의 없는 자세 때문이다.

"선수들이 1년 계약직이니까 12월 25일까지 월급 주고 위로금 조로 두 달치를 더 주겠대요. 배구 스카우트 기간도 지났고, 당장 배구를 그만둬야 되는데 진로 결정할 틈도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내쳐버리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죠."

선수들도 서울시 체육회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문 보면 서울시 체육회에서 선수들의 향후 진로를 모색해준다고 나왔던데 사실 그 부분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군대 가는 애들은 군대 간다고 쳐도 나머지 군대 면제된 선수에 대한 대책이나 군대 갔다오고 나서 '남아라' 이런 얘기도 전혀 없었고요."(김상기 선수)

서울시 체육회에서 내세우는 명분은 '비인기종목 육성'이다. 하지만 지난 대구 U대회에서 남자 대표팀이 금메달도 땄고, 2년여 동안 질질 끌어오던 LG화재 이경수 문제도 해결되어 배구 붐이 다시 일어나려는 지금, 서울시청 팀 해체 결정은 분명 배구 인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비인기종목은 뭐고, 인기종목은 뭐예요? 전 구분이 안 가요. 그런 명분이 맞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런 처사나 방법에는 정말 화가 나요. 어떻게 감독 허락도 없이 선수들한테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떻게 밥 먹지 말고 나가라고 그래요."

현재 남자실업팀은 여섯 개에 불과한 상황. 팀 수가 부족한 탓에 프로화 작업은 매년 제자리걸음이다. 서울시청이 해체되면 대학졸업생들이 갈 곳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되면 꿈나무 선수들도 배구를 점점 외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서울시청 해체 여파가 다른 공사 팀으로 확산되는 것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그냥 손놓고 있는 걸까?

"협회에서 12월에 개막하는 V-투어리그에는 참가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기간동안 인수할 팀을 찾아보자고 하면서…. '노'라고 했어요. 우리가 잘하는 팀도 아니고. 차라리 각 구단에서 선수 1~2명씩 받아주는 게 낫다고 했어요."(이문섭 감독)

그래도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선수들한테서도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해체통보를 받은 이상 번복은 될 수가 없어요. 통보가 난 이상 해체되는 건 어쩔 수 없죠. 협회에서는 V-투어리그만 나가달라고 하는데 거기 나가면 선수들을 두 번 죽이는 게 돼요."(신지현 선수)

"다들 배구 너무 하고 싶어하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근데 시합을 나가면 서울시민구단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갔지 서울시청 이름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김상기 선수)

이문섭 감독은 해체의 부당성 외에도 그동안 배구부가 받았던 숱한 차별과 극심한 냉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색도 점점 붉게 변해갔다.

서울시 체육회에서는 연초에 운동부 감독들에게 예산서를 제공해 준다. 이문섭 감독은 2003년 직장운동경기부 세출 예산(2003년 1월, 서울특별시) 문서에 근거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원래 서울시청팀에 5개부(축구, 배구, 육상, 복싱, 양궁)가 있었어요. 5개부 인원을 최대 60명으로 정해놨어요. 작년부터 운동부 운영이 시청에서 서울시 체육회 쪽으로 넘어오면서 사이클부를 새로 만들었어요. 전체 인원은 60명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우선 각 부 코칭 스태프를 2명에서 1명으로 줄였는데, 유독 배구팀만 선수까지 12명에서 9명으로 축소시킨 거예요. 대신 사이클은 선수 7명을 새로 뽑았고요."

"선수연봉이 A, B, C급 3개 등급으로 나눠져 있어요. 시청에서 운영했을 때는 배구부는 전부 B급으로 통일했어요. 근데 지금 배구는 다 C급이에요. 다른 부는 형평성에 맞게 A, B, C급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일방적으로 '야, 배구는 다 C급이야' 그런 거예요."

"장비비 예산이 올해 삭감됐거든요. 그럼 부마다 어느 정도 같은 비율로 삭감해야 되는데 배구부가 5588만원으로 가장 많이 삭감됐어요."

조용히 이문섭 감독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선수들도 그동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왔던 불만들을 쉴새없이 토해냈다.

"대형버스가 있는데 축구부랑 같이 써요. 축구가 인원수(20명)가 많으니까 거의 축구부가 쓰죠. 저희는 감독님 차(9인승 카니발)랑 박광열 선수 밴이 있거든요. 거기에 10명이 끼어 타요. 밴에 볼이랑 네트 싣고, 체구 작은 선수 한 명은 짐칸에 타고요. 덩치나 작으면…."

"전용체육관이 없으니까 잠실체육관 보조경기장에서 훈련을 하는데 예산이 없다고 겨울에 운동할 때 히터도 안 틀어줘요. 그나마 체육관도 마음대로 못 써요. 행사 관계로 사용 못할 때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요.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참으면서 했는데…."

"선수들이 9명밖에 안 되잖아요. 이번 체전 때도 삼성이랑 하는데 세터 2명, 리베로 1명 빼면 6명이서 공격을 해요. 한 번씩 때리면 공이 없어요. 볼 주우러 가면 또 공격할 사람이 없어요. 공격하다 보면 볼이 없고.(웃음)"

지난 전국체전 대 삼성화재 전. 비록 지긴 했지만 서울시청은 악착같은 플레이로 그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로부터 승리한 팀보다 오히려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선수가 9명밖에 안 되니 쉴 틈이 없었다. 후반 급격한 체력 저하가 이날 패인 중 하나였다.

"진짜 어디가 부러져서 깁스를 하거나 심하게 다치지 않으면 그냥 참고 운동해요. 아파도 내색을 못하죠. 다쳤을 때 치료비도 저희가 부담하고요. 대학원 다니는 선수도 있는데 학비도 저희들이 내요."

연초에 이문섭 감독은 '배구단 활성화 계획안'을 작성해서 윗선에 올렸다고 한다. 다른 실업팀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어느 정도 지원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잠깐 내용을 살펴보자면 1) 최소한의 엔트리 구성(감독1, 코치1, 선수 12명) 2) 선수 대학원 등록금 지원 3) 선수급료 인상 4) 여건이 허락되면 선수 스카우트 비 지급 등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요구사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수들이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면서도 어금니 꽉 깨물고 견뎌왔던 것은, '만년 꼴찌'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것은, 배구를 사랑하고 배구를 하고픈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선수들의 이런 '소박한 꿈'이 온통 짓밟히고, 마구 짓이겨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82년 서울시청 창단 멤버로 21년간 서울시청에 몸담아온 이문섭 감독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 없이 열심히 따라와 준 선수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에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어요"라면서 '선수들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야, 밥 악착같이 먹어."

인터뷰를 마친 후 이문섭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서울시는 배구팀을 버렸지만 팬들은 버리지 않았다. 그동안 숨어있던 배구팬들도 '서울시청 살리기'에 팔 다리 걷어붙이고 나섰다. 서울시청 배구팀의 부활을 위해서! 선수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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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2014-10-03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234

서울시청 2014-10-03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거에 서울특별시청에서
남자배구단을 만든적이있었다!
지금의 쌍방울레이더스(프로야구단)
가 생기기이전부터
 

- 그러고 나서 2001년 국제그랑프리대회 나가서 드몽 포콩 선수랑 붙어서 이겼었죠?
"예. 그때 이기고도 되게 기분 나쁘더라고요. 이 놈, 세계선수권대회 때 좀 지지. 그러니까 별명을 바꿔줘야 돼요. 자꾸 '비운', '비운' 그러니까 세계선수권 때는 지고, 별로 안 중요한 대회에서는 이기고… 이러는 게 자꾸 연결이 되는 거 같아요."

- 대구 U-대회랑 2003세계선수권 때 MBC에서 해설하셨잖아요. 해설은 처음 하시는 거였을텐데 해보시니까 어떠셨어요?
"처음 할 때는 긴장된 상태에서 하니까 진짜 떨리더라고요. 대구 U-대회 때 첫날은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둘째날, 셋째날 되니까 조금 감이 잡히고, 넷째날에는 농담도 던지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했던 캐스터가 '윤 코치, 이젠 농담도 하네' 그러더라고요. 유도만 하다가 새롭게 해설을 해보니까 제 시각도 넓어진 거 같고요.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해보고 싶어요."

-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근데 솔직히 '너 왜 그렇게 못하냐?' 그렇게 말은 못하죠. 대부분 잘 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은 정말 좋았어요. 제 생각에 유도는 동작이 순간 순간 바뀌기 때문에 다른 종목보다 해설하기가 힘든 거 같아요. 처음에는 아나운서가 말을 하면 제가 빠져줘야 되는데 타이밍을 못 잡아서 부딪힐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나아지더라고요. 방송사에서 농담으로 그래요. '윤 코치, 올림픽 대표로 선발 안 되면 해설로 가면 되겠네'. 보내주면 가면 좋죠.(웃음)"

- 주위에서 윤동식 선수를 두고 '편파판정의 최대 희생양'이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변 사람들한테서 '네가 어느 학교를 갔다면 네가 바라는 메달을 진작에 땄을 텐데…' 이런 얘기 들으면 마음이 안 좋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요. 근데 제가 한양대를 나와서 도움이 됐던 것도 진짜 많거든요. 한양대 나와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요.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 그러고 보니 올해에는 선수, 코치, 해설 등 세 가지 역할을 다 하신 거 같아요. 어떤 게 제일 힘드신가요?
"가장 힘든 건 운동이죠.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건 정말 힘들어요. 힘들다는 생각이 단 하루도 떠나질 않아요. 몸이 피곤하니까. 어느 정도냐면 눈만 딱 뜨면 영양가 있고 좋은 음식만 찾게 돼요. 제가 영양제를 대 여섯 개 복용하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몇 알, 점심에 몇 알… 정말 영양제 먹다가 하루가 다 가요. 콜라 같은 탄산음료나 커피도 안 마셔요. 이왕이면 몸에 좋은 걸 찾게 되지. 그렇게 먹고도 운동하기 진짜 힘들어요.(웃음)"

- 유도하시면서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인가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땄을 때요. 그 당시가 군 면제가 되느냐, 안 되느냐 그 시기였거든요. 제가 남자 유도선수 중에서는 첫 금메달을 땄고, 군대도 면제됐고, 실업팀(마사회)도 결정됐고, 뭐 더할 나위 없었죠. 94년에는 정말 좋은 일이 많았던 거 같아요."

- 전기영 선수랑 상대 전적이 어떻게 되세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그걸 따로 체크하진 않았거든요. 기영이하고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서른 번 정도 싸우지 않았나 싶어요. 초반에는 제가 많이 졌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제가 4번인가 연속해서 이겼거든요. 그 전에는 두 번 지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면 한 번 이기고 이런 식이어서 전체적인 전적에선 제가 좀 딸리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기영이가 한 체급 올리게 된 게, 제가 4번을 연달아 계속 이기니까 체중도 많이 나가는 상태여서 '체급을 올려야겠다' 그래서 올렸고, 전체 전적으로 봤을 땐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근데 마지막에 내가 많이 이겼으니까 내가 한 두 번 더 이기지 않았나.(웃음)"

- 96애틀랜타 올림픽, 2000시드니 올림픽 때 조인철, 유성연 선수가 나갔는데 결국 두 선수 모두 금메달을 못 땄잖아요. 그래서 더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을 거 같은데요.
"제 욕심일지 모르지만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제가 나갔어야 했어요. 97세계선수권은 아니고요. 그때는 인철이 기량이 많이 향상됐었기 때문에 충분히 나갈 만했고, 금메달도 땄잖아요. 96년 올림픽에서 인철이의 실력은 동메달이면 최상의 성적이었거든요.

인철이는 올림픽 금메달이나 메달권 진입보다는 출전하는 거 자체에 만족했었지만 저는 금메달이 목표였기 때문에 96애틀랜타 올림픽은 제가 나가는 게 정상적인 거였어요.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제가 나갔으면 어떻게 됐을 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국제대회에서 90kg으로 우승도 몇 번 하고 잘했거든요.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 땄던 후이징가 선수도 같이 한 체급 밑에 있을 때 저랑 두 번 싸워서 두 번 다 졌거든요.

그때 동메달 딴 선수랑 전부 다 보면 저한테 졌던 선수들이에요. 96년 올림픽 때 금, 은, 동메달 땄던 선수들도 전부 저한테 졌던 선수들이고요. 유도 선수들은 대체로 자기랑 한 번 해서 이겼던 사람들한테는 잘 안 지거든요. 특히 저는 그랬어요. 한 번 딱 이기면 잘 안 졌거든요. 그런 게 굉장히 아쉽더라고요."

- 조인철 선수가 96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동메달 따고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 안 하던가요?
"저한테 와서 미안하다고 얘기 한 번 하더라고요. 잘 했다고 그랬지요. 2000시드니 올림픽 때는 유성연 선수한테서 시드니 현지에서 전화가 왔어요. '죄송하다'고. 뭐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도 대표선발전 때 선의의 경쟁을 펼쳤어요. 제가 전략적인 부분을 약간 잘못 세웠던 게 패인이었던 거 같고요.

크게 보면 96년이나 2000년에는 대회 준비를 잘 못했어요. 모든 정성을 거기에 다 쏟아야 되는데 그렇게 못했던 거 같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정성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근데 한편으로는 마음 편하게 갖고 있어요. 안 되면 코치하면 되니까.(웃음)"

- 2003세계선수권 때 81kg급 선수들 경기하는 모습 많이 보셨을텐데요. 보니까 어떠세요?
"제가 81kg급으로 내리기로 결심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세계적으로 순위권 안에 있는 선수들이 다들 오른쪽 잡기를 하고 있거든요. 오른쪽 잡기를 하는 유럽선수들은 변칙기술을 많이 쓰는데, 같은 오른쪽 선수들하고 싸울 땐 변칙기술이 잘 먹히지만 왼쪽 선수들이랑 했을 때는 그런 기술을 성급하게 못해요. 근데 저는 왼쪽이거든요. 그래서 얘네들이랑 하게 되면 손쉽게 경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오히려 국내대회 보다 올림픽이 훨씬 쉬울 거 같아요."

- 국내 선수 중에 라이벌로는 누가 있나요?
"압축시키면 두 명 정도 되는데, 2003세계선수권에 출전했던 최선호 선수가 있고, 대구-U대회에서 개인전, 단체전 우승했던 권영우 선수가 있는데, 대진표는 나왔어요. 권영우 선수랑 준결승, 최선호 선수랑 결승. 어차피 넘어야 될 산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있어요. 체력만 된다면 해볼 만한 거 같아요."

-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 대한 각오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가장 걱정되는 게 있어요. 1차 선발전에서 우승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 2차전, 3차전이 남아 있지만 심적으로 안정이 돼서 탄력 받고 더 열심히 할 거 같아요. 근데 만약에 3등, 4등, 5등 이렇게 되면 하긴 하겠지만 의욕도 떨어지고 맥이 빠질 거 같아요. 아예 1회전에서 탈락하면 딱 씻고 그만 할텐데, 3등, 4등, 5등 이렇게 돼버리면 어느 정도 점수는 받겠지만 1등한 선수랑 점수차이가 많이 나니까 따라가기 벅찰 거 같아요.
질 거면 아예 초반 탈락, 올라갈 거면 아예 1등, 이게 나을 거 같아요. 근데 제가 보기엔 저의 이런 비운의 스토리가 올림픽에서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스토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가끔 들어요.(웃음)"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올림픽 때만 반짝해서 호응해주시지 말고, 평소 때도 유도를 많이 사랑해주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보니까 유도선수 팬 까페도 많이 생겼더라구요. 까페에 응원글도 많이 남겨줬으면 좋겠고요. 유도팀이 지금보다 많이 창단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아무래도 경쟁팀이 있으면 선수 복지 수준도 높아지지 않겠어요?

정말 유도만큼 땀 흘리면서 운동한다면 프로 선수의 반 정도 대우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연봉 1억 이상 대우받는 선수 나와봐요. 학생들도 서로 배우려고 하고, 학부모들도 자녀들한테 많이 시킬거예요. 유도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거라고 봐요."

그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을 이제는 보상받을 때가 왔다. '오뚝이 스타' 윤동식의 마지막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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