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국의 조정선수 스티븐 레드그레이브입니다. 아마도 제 이름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듯 싶네요. 조정이라는 게 한국에서 그다지 활성화된 종목은 아니잖아요. 한 마디로 조정은 노를 저어서 먼저 도착하는 보트가 이기는 경기랍니다. 간단하죠?^^ 저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올림픽 5연패를 달성한 후 은퇴했고, 지금은 영국의 스포츠 외교관으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아테네 올림픽 성화봉송행사 땐 최종 점화자로 나서기도 했죠. 그래도 제가 누군 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럼 지금부터 제 얘기 해드릴게요.

'조정 신화'. 제 이름 앞에는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다니죠. 84년 L.A올림픽 유타포에서 처음 금메달을 딴 이후 2002년 시드니올림픽 무타포 우승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올림픽에서 5회 연속 정상에 올랐으니까요. 요즘도 집 거실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금메달을 보면서 혼자 배시시 웃곤 한답니다. 사실 어렸을 땐 멋모르고 노를 잡았죠. 하지만 금세 조정의 매력에 빠졌고, 16살 때 아예 학업을 마친 뒤 조정에 미쳐 지냈죠. 동료와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물살을 가를 때의 느낌, 결승선을 등진 채 노를 젓다가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짜릿함.. 아마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거에요. 평생 '노'와 함께 해온 인생. 그래서 저는 '영원한 조정인'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제가 선수로 출전한 마지막 올림픽이었죠. 또한 제게 5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대회이기도 했구요. 저희 팀은 시종일관 리드를 지켜나갔지만 이탈리아, 호주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죠. 마침내 상대팀의 거센 도전을 뿌리치고 1위로 골인한 순간, 가슴 저만치서부터 뭔가가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동료들(매튜 핀셋, 팀 포스터, 제임스 크락넬)과 뜨겁게 포옹을 했죠. 2위에 오른 이탈리아 선수들도 제게 다가와 축하의 인사말을 건네줬구요.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함께 그 황홀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금메달을 걸어줬더니 아들 녀석이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이 저한테 우르르 몰려와서 물었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도 출전하나요?" 저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어요. “이제 은퇴하고 다른 일을 찾아볼 거”라구요. 올림픽 5연패는 게레비치(헝가리)의 6회(32~60년) 연속 우승에는 금메달 한 개가 모자라는 기록이죠. 주변에서 기록을 깨볼 생각이 없냐고 했지만 저는 애초에 시드니 올림픽이 은퇴무대라고 생각하고 뛰었어요. 제가 처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게 84년 L.A대회니까 무려 18년 동안 정상을 고수한 셈이네요.^^ 솔직히 선수로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죠. 후배들한테도 길을 터줘야 했구요.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는 시드니 금멤버들이 또 한 번 일을 저질렀으면 좋겠네요.

영국에서도 조정은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죠. 훈련비가 없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은 적도 많구요. 하지만 '아, 조정하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훨씬 많았어요. 시드니 올림픽 영국팀 개,폐막식 기수는 조정선수가 모두 독식했죠. 개먁식에선 저의 동료인 매튜 핀셋이 깃발을 들었고, 폐막식에선 제가 영국 선수단을 대표해 올림픽주경기장을 당당히 행진했답니다. 92, 96년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나섰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군요. 설레이고, 가슴이 벅차올랐죠. 영국팀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80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올렸어요. 덕분에 전 엘리자베스 여왕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답니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죠.^^

사람들은 저를 가리켜 '위대한 올림픽언'이라고 합니다. 정말이지 저는 조정을 통해서 너무도 많은 걸 얻었어요. 명예, 부, 지위… 하지만 많은 분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도 있답니다. 지금의 영광 뒤에는 숱한 좌절과 실패가 있었다는 사실을.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후 저는 운동선수에게는 치명적인 당뇨병 진단을 받았죠. 30분 간격으로 혈당치를 체크하고, 매일 5~6회씩 인슐린 주사를 맞았어요. 주위에서 “이제 레드그레이브의 선수생명은 끝났다”고도 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당뇨 증세 때문에 훈련량을 모두 소화해내는 게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에 임했답니다. 보란 듯이 재기하고 싶었어요. 결국 이겨냈죠. 병마도 저의 굳은 의지를 꺾지 못했나 봅니다.

이쯤해서 제 동료인 매트 핀셋 얘기를 해야 겠군요. 핀셋과 처음 한 팀을 이룬 건 90년대 초반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앤디 홈즈와 짝꿍을 이뤘었죠. 홈즈와는 84, 88년 올림픽에서 함께 금메달을 일궈냈어요. 그야말로 '찰떡호흡'을 자랑했는데, 88년 올림픽 후 홈즈가 은퇴하자 저는 '짝 잃은 외기러기' 신세가 됐죠. 의욕을 잃어버린 저는 조정을 포기하고 봅슬레이 선수로 변신했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물을 떠나서 살 수 있겠어요. 그 다음 맞이한 파트너가 바로 핀셋이었어요. 저보다 훨씬 어린 핀셋과는 92, 96, 2000년 올림픽에 한 팀을 이뤄 출전해서 모두 금메달을 따냈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레드그레이브가 펠레라면 핀셋은 가린샤다'. 하지만 전 확신한답니다. 핀셋은 저를 뛰어넘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흔히 그런 말을 많이 하죠. '올림픽보다 세계선수권이 더 어렵다'구요. 저는 처음 출전했던 81세계선수권에서는 8위에 그쳤어요. 출발은 좋지 않았죠.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연습 뿐이었어요. 팔팔한 나이에 주위의 '달콤한 유혹'을 견뎌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오로지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노를 젓고 또 저었죠. 5년 여간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전 86세계선수권 유타페어에서 드디어 우승을 했답니다. 아, 그때의 감격이란!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죠.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97~99년 세계선수권 무타포어 3연패를 달성한 것을 비롯, 세계선수권에서만 총 9번 우승했답니다.

영화 제목도 있지만 흔히 '성공한 사람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죠. "올림픽 5연패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냐”는 질문에 굳이 답변을 한다면 '강한 정신력'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저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었죠. “만약 누군가가 나를 다시 조정경기장에서 본다면 총을 쏴도 좋다”고 하면서.^^ 하지만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시드니 올림픽에 나간 건, 물론 올림픽 5연패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제가 병마를 이겨내고 정상에 선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고맙게도 목표를 이뤘구요.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선수로서는 은퇴했지만 저는 영원히 조정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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