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하면 못 알아볼 뻔 했다. 16년 전, 고등학생 시절의 앳된 모습만 생각하고 만나러 간 왕희경 씨. "얼굴이 많이 변했죠".(웃음) 그의 말마따나 처음엔 딴 사람인 줄 알았다.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고, 사실은 너무 이뻐져서 말이다. 마침 주말 내내 심술을 부리던 장마비도 얌전해지고, 직사광선을 뿜어대던 햇님도 꼭꼭 숨었다. '날씨 한 번 끝내주는' 7월의 어느날 오후, 성이 '왕' 씨라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왕년의 명궁사' 왕희경(35)을 만났다.
♦ '눈물' 88년 서울올림픽 개인전
"김수녕 선수가 워낙 잘해서요". 왕희경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표정에선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김수녕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때 많이 울었죠". 사실 왕희경에겐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였다. 88년 대회는 그랜드FITA방식이 처음 채택된 올림픽. 이것은 오픈라운드를 통과한 선수들이 24강부터 6명씩 커트되어 '최후의 8명'이 메달을 놓고 대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8강 최종결승을 앞두고서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활 쏠 때 가운데 손가락에 끼우는 걸 잃어버렸어요". 어디에 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경기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마음도 초조해졌다. "결국 찾다가 없어서 다른 걸 끼고서 경기를 했어요". 시합 중간에 찾아서 바꿔 끼긴 했지만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렸다. "꼭 그것 때문에 진 건 아닐 수도 있는데 자꾸만 아쉬움이 들죠".
당시 한국 여자팀(김수녕-왕희경-윤영숙)은 개인전 금, 은, 동메달을 모조리 휩쓸었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3개의 태극기가 동시에 게양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정말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다. 그런데 왕희경에겐 '안 좋은 추억'이 있다고. 김수녕의 마지막 화살이 과녁에 꽂혀 금메달이 확정되자 사람들이 죄다 그 쪽으로 몰려갔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그런데 슛오프(3발로 승부를 겨루는 연장전) 끝에 윤영숙이 아르자니코바(구소련)를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자 사람들은 또 그 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은메달리스트 왕희경만 중간에 덩그라니 남은 것이다."2등도 잘 한 거지만 그때는 많이 서러웠죠".(웃음)
♦ '웃음' 88년 서울올림픽 단체전
개인전 다음날 열린 단체전에서 한국 남녀팀은 동반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여자팀은, 미국과 엎치락 뒤치락 시소게임 끝에 금메달을 거머쥔 남자팀과 달리 초반부터 독주하며 여유있게 우승했다. 일찌감치 우승을 확신한 탓인지 선수들은 그저 밝은 표정으로 악수만 교환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더라구요".(웃음) 왕희경은 개인전에서 은메달에 그친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무엇보다도 동료들과 함께 일궈낸 금메달이라 더욱 값졌다. "개인전과 달리 단체전은 한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면 안 되거든요". 아무리 '퍼펙트 골드'를 수 십 번씩 명중시켜도 한 번 '삑사리' 내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 아닌가. '여고생 트리오'는 시상대에서 손을 맞잡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백만 불짜리 웃음이었다. 한국양궁은 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3, 은2, 동1개의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
♦ 부담감 극복하는 게 가장 힘들었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밥 먹듯이’ 따는 양궁.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양궁은 올림픽 나가면 무조건 금메달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선수들에게는 주변의 지나친 기대가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금메달은 당연히 따는 거고, 오히려 누가 따느냐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죠". 내색은 안 했지만 성적에 대한 압박을 견뎌내는 게 쉽지 않았다고. "남들이 봤을 땐 아무나 금메달 따면 되는 거겠지만 선수들은 또 자기 욕심이 있잖아요".(웃음) '올림픽 메달보다 더 어렵다'는 국내선발전을 거쳐 난생 처음 밟은 올림픽 무대. 금메달에 대한 욕심이 왜 안 생기겠는가. 더구나 왕희경은 당시 대표팀 맏언니였다. 그래 봤자 다 같은 고등학생이었지만.^^ '87년 세계선수권 때까지 막내였다가 갑자기 최고참이 된' 그는 운동 하랴, 후배들 챙기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 명심할지어다. 선수들한테 부담감 주지 말길.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도대체 한국 양궁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세계양궁연맹은 귀신같이 활을 잘 쏘는 한국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심심하면 경기방식을 바꿨다. 하지만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숱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코리아 궁사들은 꿋꿋하게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다. "운동량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궁금증은 일시에 풀렸다. "지구력 강화를 위해서 운동장도 많이 뛰었구요. 담력 기르려고 새벽 산행도 많이 했죠". 한국양궁이 세계를 쥐락 펴락 하는 비결은 역시 '빡센' 훈련에 있었다.
♦ 저희도 양궁부부랍니다
유난히 커플 많기로 소문난 양궁. 알고보니 왕희경도 '양궁부부'였다. 그의 반쪽은 임희식(현 IN스틸 코치) 씨.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다. 언제 처음 만났냐고 물었더니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사실은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 했었어요". 앗,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지는 걸. 대체 언제부터 가까워졌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꽃 핀 시기'는 왕희경이 일본 긴키대학에서 2년 여 간 코치생활을 하던 94년 가을 무렵부터. "당시 제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때 전화로 위로도 많이 해주고 그래서 친해졌죠". 부럽다, 부러워~ 그쪽에서 재계약을 원했지만 거절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97년에 결혼했단다. 왕희경은 어느덧 두 형제(성환, 수환)를 키우는 엄마가 됐다. "올해 초등학교 들어간 첫째 애가 활 쏘는 걸 좋아해요"라며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는 그를 보자 갑자기 후훗~ 하고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누가 양궁선수 아니었댈까봐'.^^ 아울러 그는 "기회가 되면 지도자로 활약하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