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드디어 터졌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광복 이후 첫 금메달이 나왔다. 영광의 주인공은 양정모. 그는 레슬링 페더급에서 오이도프(몽골)를 꺾고 그토록 염원하던 금메달을 땄다. 1976년 7월 31일 캐나다 몬트리올 하늘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양정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은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금메달을 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결승에서 오이도프에 10-8로 판정패한 양정모는 벌점 3점을 받았다. 그러나 오이도프는 예선에서 이미 3벌점을 기록하고 있던 상황. 당시에는 이겨도 근소한 차로 이기면 벌점 1점을 주는 룰이 적용됐다. 따라서 양정모에 가까스로 판정승한 오이도프에게 벌점 1점이 추가됐다. 결국 양정모는 벌점 1점 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집집마다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장하다 양정모'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양정모는 한국의 스포츠 영웅으로 우뚝 솟았다.

한국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1, 은1, 동메달 4개를 따내며 종합 19위에 올랐다. 특히 여자배구팀은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올림픽 구기사상 최초로 메달을 따내는 감격을 맛봤다. 당시 여자배구 동메달의 주역인 '나르는 작은 새' 조혜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도 동메달리스트 조재기에 관한 일화도 유명하다. 조재기는 헤비급에서 메달 사냥에 실패하자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기 위해 머리를 확 밀어버렸다. 삭발이 효험을 발휘한 것일까. 그는 무제한급에 나가 동메달을 따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 1984년 L.A 올림픽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던 한국은 8년 만에 84년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A 올림픽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보이콧으로 '반쪽대회'로 치러졌다. 그러나 한국이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대회이기도 하다. 한국은 21개 종목에 28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보냈는데, 규모에 걸맞게 성적도 좋았다. 금6, 은6, 동7개를 획득, 당당히 종합순위 10위에 올랐다. 올림픽 출전 사상 최초로 '톱10' 안에 진입하는 쾌거였다. 한국이 48년 런던 올림픽부터 76년 올림픽까지 8차례의 올림픽에서 딴 메달은 총 18개(금1, 은6, 동11개). 이번 대회에서 한 방에 그 기록(18개)을 깬 것이다.

유도에서는 안병근(라이트급)과 하형주(하프헤비급)가 나란히 금메달을 메쳤다. 김원기(레슬링 그레꼬로만형 62kg급)는 한국팀 대회 1호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유인탁(레슬링 자유형 68kg급)도 부상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신준섭(미들급)은 복싱에서 유일하게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서향순은 양궁에서 금과녁을 맞춰 한국 최초의 여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서향순은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팥죽이 먹고 싶다"고 대답해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특히 여자 핸드볼, 여자 농구에서 따낸 은메달은 '금메달 못지 않게 값진 은메달'이었다.

▲ 1988년 서울 올림픽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유통기간(?)이 한참 지났건만 가사와 멜로디가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진짜 지겹도록 불렀다. 정말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질리지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오! 필승코리아'처럼 말이다. 1988년 9월 17일, 잠실종합운동장에 '손에 손잡고'(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울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역대 최다인 160개국이 출전하고, 12년 만에 동-서 진영이 한 자리에 모인 지구촌 축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대회 슬로건처럼 전 세계 50억 인구가 하나 되는, 가슴 찌릿찌릿한 순간이었다.

개최국인 우리나라는 올림픽 역사를 다시 썼다. 놀라지 마시라. 한국은 금12, 은11, 동10개로 종합순위 4위를 차지했다. 자유진영 국가 중에서는 미국 다음이었고, 아시아권에선 성적이 가장 좋았다. 한국은 폐막 하루 전(10월 1일)까지만 해도 7위 였지만 마지막 날 불가리아, 헝가리, 서독을 추월해 4위로 올라섰다. ‘여고생 궁사’ 김수녕은 여자양궁 2관왕에 오르며 '신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특히 여자양궁 단체전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금,은,동을 모조리 휩쓰는 위업을 달성했다. 남자유도 60kg급 금메달리스트 김재엽은 추석날 멋드러진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가 국민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했고, 한국 선수끼리 금메달을 다툰 탁구 남자단식도 명승부 중의 명승부로 꼽힌다. 또한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메달을 일궈낸 남녀핸드볼, 여자하키 경기는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이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라 브라이트만-호세 카레라스는 녹아들 듯, 빨려들 듯 감미로운 음성으로 올림픽 공식 주제가 '영원한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 제목처럼 바로셀로나 올림픽은 인종, 종교, 정치를 초월한 '화합의 올림픽'이었다. 서울올림픽을 보이콧했던 북한, 쿠바 그리고 인종차별문제로 추방됐던 남아공이 24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6년 간 '절름발이' 신세였던 올림픽은 이제서야 똑바로 섰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12, 은5, 동12개를 따내며 종합순위 7위를 기록, 3회 연속 ‘톱10’에 올랐다.

'한국에서 한국으로 끝난 대회'. 한국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회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을 모두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여갑순은 사격 공기소총에서 대회 1호 금메달을 땄고,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는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월계관을 쓰며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했다. 역도 56kg급에 출전한 전병관은 한국역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작은 거인'이 마침내 세계를 번쩍 들어올렸던 것이다. 투기종목의 강세도 여전했다. 한국의 메달밭, 레슬링에서는 안한봉(그레꼬로만형 57kg급)-박장순(자유형 74kg급)이 금메달을 보탰다. 특히 안한봉은 결승전에서 리파트일디츠(독일)를 맞아 치열한 접전 끝에 6-5 역전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따냈다. 처음 정식종목이 된 배드민턴에서도 금메달 2개를 거둬들였다. 박주봉-김문수 조, 황혜영-정소영 조가 남녀복식 동반우승을 차지한 것. 그야말로 '환상적인 호흡' 이었다. 또한 여자핸드볼은 결승에서 노르웨이를 누르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건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황영조는 끈질기게 따라붙은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리고 가장 먼저 결승점에 골인했다. 그 순간 대한민국 국민 모두 만세를 불렀다. 눈시울은 점점 불거지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오늘은 내가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어". (고) 손기정 옹은 92년 8월 9일 황영조가 우승한 직후 소감을 이렇게 밀했었다.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대회. 한국은 금7, 은15, 동5개로 종합순위 10위를 차지했다. 4회 연속 '톱10'에 들었지만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 이번 대회는 한국 엘리트체육 정책의 한계를 절감한 대회였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투혼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양궁은 84년 L.A 올림픽 이후 개인전 4연패, 단체전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여자양궁 2관왕 김경욱은 수 차례 골드 정중앙에 있는 카메라를 명중시켜 '퍼펙트 골드'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전기영-조민선은 유도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메쳤다. 특히 전기영은 알고서도 당한다는 업어치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상대선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시상대에 섰는데, 이것이 2002년 월드컵 '태극기 패션'의 원조라는 '설'도 있다. 또한 지난 대회에서 은메달에 그친 방수현은 '숙적' 수지 수산티에 통쾌한 설욕전을 펼치며 '셔틀콕 여왕'으로 등극했다. 김동문-길영아 조도 예상을 뒤엎고 결승에서 박주봉-라경민 조를 물리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북한은 여자유도의 계순희가 일본 유도영웅 다무라 료코를 꺾고 우승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금2, 은1, 동2개로 종합 33위를 차지했다. 계순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57kg급에 출전,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노린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드니 올림픽은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대회였다. 남,북한은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흔들며 동시입장 했다. 근대올림픽에서 분단국이 각각 출전해 동시입장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TV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시울은 점점 불어졌다. 올림픽 남북 동시입장은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의 국기인 태권도가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 스포츠사에 한 획을 긋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은 금8, 은10, 동10개로 종합 12위를 차지했다. 5회 연속 '톱10' 진입이 좌절된 것도 아쉽지만 그보다도 메달이 극소수 종목에 편중되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금메달 분포를 살펴보면 태권도 3, 양궁 3, 펜싱 1, 레슬링 1개다. 태권도가 아니었다면 종합 12위는 어림도 없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김영호가 남자펜싱 플뢰레 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비스도르프를 꺾고 플로어에 주저 않아 함성을 지르는 순간, 국민들도 덩달아 포효했다. 펜싱 불모지에서 일궈낸 금메달. 그것은 아름다운 이변 이었다. '작은 거인' 심권호는 한국 올림픽 역사를 다시 썼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그레꼬로만형 48kg급에서 우승했던 그는 이번 대회에서는 54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한국 레슬링 사상 첫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현재 대표팀 트레이너로 있는 심권호는 자신을 꺾고 대표로 선발된 임대원에게 열심히 금메달 비법을 전수해주고 있다. '만년 2위' 남자양궁도 오교문-장용호-김청태 트리오가 환상적인 팀워크를 과시하며 금과녁을 뚫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아깝게 은메달에 그친 문의제-김인섭(이상 레슬링), 이동수-유용성 조(배드민턴)는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다. 기필코 '시드니의 한'을 푼다는 각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년 올림픽은 108년 만에 근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다. 한국의 목표는 금메달 13개 획득-종합 10위권 진입. 한국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태극기를 휘날리며 출전한 이래로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빼곤 모두 참가했다. 1932년 L.A올림픽에 일장기를 달고 처음 출전했던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다. 1980년대 이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한국의 올림픽 출전사를 두 차례로 나눠 싣는다.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제 치하였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선수단에는 한국선수 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24세 청년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월계관을 썼다. 그것도 2시간29분19초, 세계최고기록이었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도 3위(2시간31분32초)를 차지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시상대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계속 땅만 쳐다봤다. 그의 가슴엔 일장기가 박혀 있었고, 스타디움에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승 직후 손기정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마침내 우승은 했으나 웬일인지 울고만 싶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기정-남승룡의 쾌거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북돋워 주었고, 이것은 민족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손기정은 86년에 국적을 되찾았고, 당시 부상으로 받은 투구도 다시 받았다. 또한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히틀러는 손기정에게 그리스의 월계수 한 그루를 선물했는데, 이것은 지금 손기정공원(서울시 중구 만리동 소재)에 '손기정의 월계관수'(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남아 있다. '한국의 스포츠 영웅' 손기정 옹은 2000년 향년 90세로 작고했다.

▲ 1948년 런던 올림픽

2차 세계대전 여파로 12, 13회 대회는 취소됐고, 12년 만인 1948년에 올림픽이 다시 열렸다. 이 대회는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참가한 올림픽. 한국은 7개 종목에 67명의 선수단을 파견했고, 동메달 2개를 따내 59개국 중 32위를 차지했다. 해방 조국에 첫 올림픽 메달을 선사한 선수는 김성집 이었다. 당시 28세 휘문고 체육교사였던 김성집은 역도 미들급에 출전, 인상, 용상, 추상(이후 폐지) 합계 380kg을 들어올려 동메달을 따냈다. 은메달리스트와는 불과 1.5kg 차이. 복싱 플라이급 경기에 나선 한수안(작고)도 동메달을 보탰다. 첫 출전 치고는 큰 성과였다. 무엇보다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 1952년 헬싱키 올림픽

헬싱키 올림픽이 열린 1952년 7월, 한반도는 한국전쟁으로 포연에 휩싸여 있었다. 올림픽 출전 여부를 놓고도 찬반양론이 갈라졌는데, 결국 국회는 만장일치로 올림픽 파견 건의를 가결해 6개 종목에 4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전 대회와 똑같은 동메달 2개의 성적을 거뒀다. 김성집은 런던 올림픽에 이어 이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강준호도 복싱 밴텀급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두 달 전 보스턴 마라톤에서 3위에 입상해 많은 기대를 모았던 최윤칠은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에 밀려 아깝게 4위에 그쳤다. 한국은 참가국 69개국 가운데 39위로 대회를 끝마쳤다. 그러나 순위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올림픽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국 선수단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국민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던 것이다.

▲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은 한국이 올림픽에서 처음 은메달을 딴 대회다. 복싱 밴텀급에 출전한 송순천은 결승전에서 서독의 베렌트와 맞섰다. 1m58의 파이터 송순천은 베렌트를 거세게 몰아 부쳤고, 아무도 송순천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판정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베렌트의 3-2 판정승. 금메달을 눈 앞에서 도둑맞은 송순천과 한국 선수단은 망연자실해 했다. 잠시 후 시상식이 거행됐다. 묵묵히 시상에 오른 송순천은 태극기가 게양대에 올라가는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찌 보면 금메달과 은메달을 가른 것은 실력 차가 아니라 국력의 차이였다. 한국으로서는 약소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대회였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두 사람은 32년 만에 재회했다. 그때 한국을 찾았던 베렌트가 송순천에게 그랬다지. "당신 주먹이 더 강했소. 그날 경기의 승자는 당신이요". 중년의 두 신사는 오랫동안 포옹을 나눴다. 진하게~ 뜨겁게~

▲ 1960년 로마 올림픽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와 훗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캐시어스 클레이어를 탄생시킨 로마올림픽. 이 대회는 최초로 개회식을 비롯한 주요경기가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로 중계되기도 했다. 한국은 9개 종목에 76명의 선수단을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의 연속이었다. 한국은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노메달 치욕을 당했다. 물론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4.19혁명이 일어나는 등 정국이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나라가 그렇게 시끌시끌하니 선수들이 훈련을 제대로 했을 리 만무했다. 거기다 외국 선수들과의 실력 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는 상황. 메달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는 지도 모른다.

▲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은 역대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따낸 종목이다. 지금까지 금9 은10 동13개 등 모두 32개의 메달을 기록했다. 레슬링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장창선은 한국 올림픽 레슬링 역사상 첫 은메달리스트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한국은 투기종목에서 강세를 보였다. 정신조가 복싱 밴텀급에 출전해 은메달을 보탰고, 이 대회에서 처음 정식종목이 된 유도에서도 김의태(미들급)가 동메달을 메쳤다. 한국의 올림픽 효자종목인 유도에서 처음 나온 메달이었다. 아사아 대륙에서 최초로 개최된 도쿄 올림픽. 이 대회는 지리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열리는 지라 한국은 16개 종목에 출전국 중 5번째로 많은 대규모의 선수단(선수 165명, 임원 59명)을 파견했다.

▲ 1968년 멕시코 올림픽

1968년 올림픽은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다. 제19회 올림픽 개최도시가 멕시코 시티로 정해지자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멕시코시티는 해발 2,240m에 달하는 고지대. 평지에 비해 기압, 온도가 상당히 낮기 때문에 선수들의 생체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예정대로 멕시코에서 열렸다. 그 와중에 한국은 76명(임원 21, 선수 55)의 소규모 선수단을 보냈고, 지용주(라이트플라이급)-장순길(밴텀급)은 복싱에서 각각 은1, 동1개를 따냈다. 다른 종목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복싱에서 2개의 메달을 따낸 한국은, 108개국 중 36위로 대회를 마쳤다. 특히 올림픽 기간 중 파견한 예술문화행사단은 현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 1972년 뮌헨 올림픽

한국은 배구,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수영, 육상 등 메달에 근접한 종목을 선별해 총 62명(임원 6 선수 46명)이 참가했다. 오승립(유도 미들급)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금메달을 하나도 따내지 못해 종합 34위에 그쳤다. 반면 올림픽에 첫 선을 보인 북한은 덜컥 금메달을 따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금1, 은1, 동메달 3개로 당당히 종합 22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호준은 사격 소구경 복사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뒤 가진 인터뷰에서 "원수의 가슴을 겨냥하는 기분으로 쐈다"고 말해 또 한 번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광복 후 3년 만에 벌어진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한국. 뮌헨 올림픽까지 총 7차례 출전했지만 금메달은 여전히 남의 몫이었다. 아, 언제쯤 금메달을 딸 수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슉슉~ 쿠바의 복싱선수 펠릭스 사본입니다. 복싱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제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는 2001년에 은퇴해서 지금은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선수시절이 그리울 때는 없냐구요? 당연히 그립죠. 제가 복싱 좀 했잖아요.^^ 후배들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착 올라간답니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옛날 생각도 많이 나구요. 하지만 지도자라는 직업도 힘든 만큼 참 매력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처음에는 별 볼일 없던 선수가 눈에 띄게 기량이 좋아졌을 때, 제가 가르친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그때 기분은 한 마디로 짱이죠. 쿠바는 아테네 올림픽에서 복싱 종합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복싱도 특유의 매운 맛 보여주세요.

꼬맹이였을 때는 육상선수로 뛰었어요. 그러다가 15살 때 복싱으로 전환을 했죠. 복싱이 저한테는 잘 맞았나봐요. 데뷔한 해에 국내 아마복싱 헤비급 챔피언이 됐거든요. 일단 국내무대를 평정한 후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85년 18살 때 세계주니어선수권에 나갔어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무지 떨리고 긴장됐죠. 그렇게 큰 대회는 처음이었거든요. '경험 삼아' 나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죠. 세상에! 근데 덜컥 금메달을 땄지 뭡니까. 이 대회를 계기로 제 이름이 세계 복싱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겨우 첫 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했어요.

저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을 땄습니다. 아쉽게도 88년 서울 올림픽은 쿠바가 불참해서 나가지 못했죠. 쿠바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바르셀로나 대회에 나갔어요. 많은 사람들이 눈빛을 빛내며 관심 있어했죠. '아마복싱 최강국 쿠바가 금메달을 몇 개나 가져갈까'. 그 실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쿠바는 12체급 중 7체급을 석권했답니다. 저도 한 몫 단단히 했죠. 92년 대회에서는 8강전이 고비였어요. 대널 니콜슨(미국)은 의외로 강했습니다. 접전 끝에 13-11로 이겼죠.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어요. 결승전에서 데이빗 이존라텔을 14-1로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별다른 경쟁자가 없었어요. 결승 상대였던 데이빗 디피본(캐나다)을 20-2로 여유 있게 꺾고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죠.

"조국의 국민을 위해 링에 오르고 있고, 국민에게 이 영광을 바치겠다". 제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한 말이에요. 그때 제 나이는 복싱선수로는 환갑이랄 수 있는 33살이었죠. 주변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어요. '너무 나이가 많은 거 아니냐'구요. 하지만 전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경기에서 모든 걸 보여주겠다' 이를 악물었죠. 결승전 상대는 술타나메드 이브라모프(러시아)였어요. 2라운드까지 9-1로 앞서나가다가 4라운드에서 왼쪽 눈 밑이 찢어져 피를 흘렸죠. 저는 악착같이 버텨냈고, 잠시 후 종료벨이 울렸습니다. 21-13. 주심이 제 손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 가슴이 한없이 벅차 올랐습니다. 올림픽 복싱 헤비급 3연패를 달성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니까요.

이쯤 해서 마이클 베네트(미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시드니 올림픽 복싱 최고의 빅카드는 저와 베네트의 8강전이었어요. 이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었죠. 교도소 출신 복서 베네트는 복싱 입문 2년밖에 안 된 신예지만 실력은 짱짱했어요.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었죠.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경기는 싱겁게 끝이 났어요. 저는 3라운드 1분57초 만에 RSC로 베네트를 제압했죠. 1라운드를 7-2로 마친 후 2라운드에서 17-6으로 점수차를 벌렸어요. 3라운드 초반부터 거세게 몰아 부쳤고, 종료 3초 전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죠. 베네트는 저의 적수가 되지 못했어요. 경기 후 베네트가 그랬다죠? "그 앞에서 나는 그저 링 위에 선 표적에 불과했다".

86년 복싱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해 타이슨은 약관 20살의 나이에 프로복싱 WBC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죠. 그리고 저도 세계선수권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미래의 헤비급 '거물스타' 두 명이 동시에 눈도장을 찍은 거죠. 아직도 인터넷에 이런 질문이 종종 올라온다고 들었어요. "그때 사본과 타이슨이 싸웠다면 누가 이겼을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언제 어떠한 조건에서 어떤 룰을 정해놓고 싸우든 타이슨을 이길 자신 있다"고 말이죠. 현역시절, 끊임없이 프로행 유혹을 받았어요. 프로모터들이 수천만 달러의 스카우트 비용을 제시하면서 저를 괴롭했죠. 하지만 저는 돈을 거부하고 명예를 선택했습니다. 저의 우상 테오빌로 스테븐손처럼요.

지금까지 올림픽 복싱에서 금메달을 3개 딴 선수는 저를 포함해 3명입니다. 뮌헨, 몬트리올, 모스크바 올림픽 슈퍼헤비급을 3연패한 스테븐손(쿠바)과 48년(미들급)에서 56년(슈퍼웰터급) 대회까지 3연패를 이룬 라즐로 파브(헝가리)가 그 주인공이죠. 저는 '스테븐손의 영광을 잇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요. 스테븐손은 어릴 적 제 영웅이었거든요. 스테븐손은 기량도 탁월했지만 경기 외적인 면에서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그는 70년대에 프로로 전향해서 알리와 경기하면 거금을 주겠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아마에 남았죠. 가난하지만 당당한 자세, 조국의 명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 돈보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링에 오르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반할 만 하죠?^^

올림픽 3연패 못지 않게 세계선수권 6연패도 대단한 기록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처녀출전 한 86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이래로 97년까지 단 한 번도 세계선수권 우승을 놓치지 않았어요. 무려 11년 동안 정상을 지킨 거죠. 하지만 6연패를 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97년 대회 결승에서 우세한 경기를 하고도 루슬란 시가예프(우즈베키스탄)에 4-14로 판정패 당했죠. 그런데 우승자 시가예프가 프로권투 선수로 활약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거에요. 시가예프는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준우승자인 제게 금메달이 수여됐죠. 시가예프는 99년 세계선수권 8강전에서 다시 만났는데 제가 판정으로 이겼답니다. 99년 대회에서는 다른 체급 심판판정 문제로 쿠바가 선수단을 철수하는 바람에 경기도 못해보고 졌어요. 그때 결승전 상대가 베네트 였는데, 시드니 올림픽에서 KO로 확실하게 되갚아 줬습니다.^^ '한 번 진 상대에게 또 질 수는 없다'. 제 철칙이죠.

'살아있는 전설' '쿠바의 복싱 영웅'. 제 이름 앞에는 늘상 이런 수식어가 붙어 다녔죠. 그런 얘기 들으면 기분 어떠냐구요? 좋죠.^^ 저는 2001년에 은퇴했습니다. 내심 올림픽 4연패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만 34세 이상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규정 때문에 링을 떠났죠. 좌절보다 영광이 많았던 선수생활로 기억되는 데요.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쿠바 선수단 기수로 활약했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죠. 비록 나이 제한 때문에 글러브를 벗었지만 복싱은 제 인생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도자로서 모든 걸 쏟아 부을 작정이에요 저보다 더 나은 선수를 키워보고 싶어요. 참,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링에 입장할 때 고개 숙이지 않고 다리로 로프를 타넘고 들어오는 게 인상적이었다구요. 왜 그랬냐구요? 별 거는 없구요. 상대방 기 죽이려고 그랬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은 누구일까?'

8월 23일 새벽 5시10분 그리스 아테네의 올림픽스타디움에서 남자육상 100m 결선 경기가 열린다. 바로 이 곳에서 '총알 전쟁'의 최후 승자가 가려지는 것이다. 현재 남자 100m는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는 상황.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정상을 넘보고 있다.

가장 주목해야 할 선수는 '단거리의 제왕' 모리스 그린(30)이다. 일단 그간 거둔 성적에서 50점은 거저 먹고 들어간다. 97년부터 세계선수권 100m 3연패,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관왕(100m, 400m계주) 등 화려한 전적을 자랑한다. 그가 최고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적어도 2001년 까지는.

그러나 '정상은 오르기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말처럼 그에게도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시기가 있었다. 지난 3년이 그랬다. 그린은 2002년 팀 몽고메리에게 세계최고기록(9.78) 타이틀을 넘겨줬다. 고질병인 무릎부상도 악귀처럼 따라붙어 그를 괴롭했다. 그러니 기록이 좋을 리 만무했다. "쯧쯧, 그린도 한 물 갔나보네".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10초37의 저조한 기록으로 준결승에서 떨어졌을 땐 이런 말까지 들었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 체면은 종이처럼 구겨졌다.

어느덧 서른 줄에 접어든 그린. 나이도 많고, 체력도 떨어지고…. 이제 재기는 힘들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올 시즌 보란 듯이 일어섰다. 그린은 지난 7월 12일 미국 대표선발전을 당당히 1위(9초91)로 통과했다. 그가 '컨디션 굿, 자신감 만빵'이라고 외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린이 지난 99년 6월 자신의 최고기록(9초79)를 세웠덧 곳이 바로 아테네 그랑프리였다. '감 잡았어'. 그는 최근의 상승세를 앞세워 기필코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다는 각오다.

하지만 '타도! 그린'을 외치는 신예들의 도전이 만만치 않다. 올 시즌 최고기록 보유자 숀 크로포드(9초88), 미국 대표선발전 2위 저스틴 게이틀린(9초92 이상 미국), 지난해 세계선수권자 킴 콜린스(세인츠 키츠 네비스), 올 시즌 랭킹 2위 기록을 낸 아사파 포웰(9초91, 자메이카) 등이 그린에게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중에서도 크로포드는 경계대상 1호. 특히 그린과 크로포드의 대결은 후원사인 아디다스vs나이키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어 더욱 흥미로운 대결이 될 듯.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더 빠를 수 있었다. 바람이 마지막 스퍼트를 방해했다”. 지난 6월 초속 3.7m의 바람을 업고서 비공인 세계타이기록(9초78)을 세운 뒤 큰 소리를 뻥뻥 쳤던 그린. 트랙 밖에서는 모범적인 사생활로 귀감이 되고, 경기장 안에서는 기상천외한 세리머니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린. '그린, 금메달'이라는 멘트와 함께 그의 전매특허인 앙증맞은(?) '혀 내밀기' 세리머니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과연 0.01초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 2년 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세계기록(9초78)이 깨질 것인가. '인간 탄환'들의 쾌속 질주가 펼쳐질 올림픽스타디움은 벌써부터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를 꺾을 자 누구인가"

중국의 체조스타 리 샤오펑(23). 리 샤오펑 하면 딱 떠오르는 경기가 있다. 바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체조 평행봉 결승. 6번째 선수까지 마쳤을 때 한국의 이주형은 9.812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계속 이주형을 비추었다. 금메달이 거의 확실시 됐다. 그러나 금메달은 7번째 주자인 리 샤오펑에게 돌아갔다. 9.825. 순간 이주형은 고개를 떨궜고, 리 샤오펑은 두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우리에게는 '웬수'같을 수밖에 없는 리 샤오펑. 하지만 19살 때 올림픽 2관왕(평행봉, 단체전)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래킨 그의 성장 엔진은 멈출 줄 모른다. 점점 가속이 붙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이제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체조 황제'라는 닉네임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리 샤오펑은 아테네 올림픽 남자체조에서 최다관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리 샤오펑의 주 종목은 평행봉과 도마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각종 메이저대회에서 우승을 놓친 적이 없다. 세계선수권(2002, 2003년)에서 두 종목 2연패를 이뤘다. 평행봉과 도마에 관한 한 자타공인 1인자임에 틀림없다. 평행봉에서 그의 필살기는 고난도의 '모리스에 파이크'(팔 걸쳐 휘돌며 뒤공중돌아 팔 걸기). 4년 전 이주형을 울린 이 기술로 아테네 올림픽도 접수할 태세다.

다만 올림픽은 이변이 속출하는 무대이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99년 세계선수권 평행봉 6위에 머물렀던 그가 시드니 올림픽에서 덜컥 금메달을 딴 것처럼 말이다. 올림픽 평행봉 2연패를 노리는 리 샤오펑이 요주의 인물로 점찍은 선수는 바로 알렉세이 네모프(러시아)와 조성민(한국). 쓴 맛, 단 맛 다 본 베테랑 네모프는 2003년 세계선수권 평행봉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건재를 과시했다. 팀 동료인 후앙 슈(25)도 경계대상이다.

뭐니뭐니해도 최대 라이벌은 조성민이다. 최근 국제체조연맹(FIG)은 조성민을 리 샤오펑과 함께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다툴 것으로 지목한 바 있다. 조성민의 주무기는 '포시타 1분의 1턴'(두 팔로 지탱한 자세에서 뒤돌기를 하며 물구나무를 서고 360도 회전하기). 이것은 슈퍼E난도의 기술로 성공만 하면 0.3점의 가산점이 붙는다. 리 샤오펑과 조성민은 서로 기술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금메달의 향방을 가늠하기가 더욱 힘들다.

한편 도마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는 상태. 리 샤오펑은 99년부터 2003년까지 세계선수권 도마를 3연패했다. 단, 호시탐탐 정상을 넘보는 노장 마리안 드래굴레스쿠(루마니아)를 주의해야 할 듯.

단신(162cm)이지만 화려한 기술과 다이내믹한 동작을 구사하는 리 샤오펑. 그의 최다관왕 야심은 이루어질 것인가. 이것은 사상 첫 올림픽 체조 금메달을 노리는 한국과도 연관이 있어 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