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아 코마네치, 메리 루 레튼, 안드레아 라두칸, 스베틀라나 호르키나.. 모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체조요정들이다. 하지만 라비니아 밀로소비치(루마니아)를 빼놓고는 90년대 체조를 논할 수 없다. 비록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같은 메이저대회에서 개인종합 타이틀을 차지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특유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기로 전 세계 체조팬을 매료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루운동에서 보여준 만점 연기였다. 그 현장 속으로…
92년 8월 2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체조 종목별 결승전이 벌어진 상조르디 체육관. 밀로소비치(루마니아)의 마루연기가 끝난 뒤 점수판이 공개되자 관중석은 한순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10점 만점. 이미 뜀틀에서 공동우승을 차지한 밀로소비치는 마루운동 금메달로 2관왕이 확정되자 환하게 웃으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Perfect'! 그녀의 마루연기는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완벽했다. 다이내믹한 동작과 우아한 몸놀림의 환상적인 조화! 1분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쉴새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판타스틱한 묘기에 완전히 매혹됐다. 마루가 마치 놀이터 인양 신나게 뛰어다는 모습에 덩달아 흥이 났다. 왜 마루운동을 '여자체조의 꽃'이라고 하는 지 새삼 깨달았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의 이단평행봉 만점 연기를 봤던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혹자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올림픽에서 만점 연기 펼치는 선수들이 수두룩 한데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냐고". '무식이 통통 튀는' 그대를 면박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치지만 간신히 참는다. 물론 오도방정 떠는 이유가 다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체조 종목에서는 무려 42개(남자: 25개, 여자: 17개)의 만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실리바스(루마니아)와 슈슈노바(구소련)는 둘이 합쳐 총 15번의 만점연기를 선보였다. 물론 아무한테나 만점 주는 거 아니지만 너무 남발되다 보니 만점에 대한 값어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체조계는 고심 끝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만점 주는 걸 자제하겠다". 다시 말하면 "선수들이 만점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가 될 거라는 말이었다.
점수판에 '10'이 찍히는 순간의 환희를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된 선수들은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점 홍수'를 이뤘던 88년 올림픽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팬들도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밀로소비치는 당당히 만점을 받았던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너무도 완벽해서 만점 외에 다른 점수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만점 자제' 약속을 어기고 밀로소비치에게 10점을 준 심사위원들이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했던 말이다. 그후로는 세계체조연맹 공식대회에서 10점 만점이 나오지 않고 있다.
밀로소비치는 참 꾸준했다. 91~96년까지 6년간 벌어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전한 선수는 그녀가 유일했다. 게다가 참 잘했다. 올림픽에서 2회 연속 개인종합 메달(92, 96년 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건 코마네치 이후 그녀가 처음이었다.
"나의 목표는 올림픽 메달이다. 색깔은 상관없다. 사람들은 25년 전 세계선수권 챔피언은 모르지만 100년 전 올림픽 챔피언은 기억한다". 2번의 올림픽에서 금2, 은1, 동 3개를 목에 건 밀로소비치. 기자랑 동갑이라서 더 정이 가고, 맷 데이먼(영화배우)이랑 웃는 모습이 닮아서 더 좋은 그녀는 위대한 체조선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